"정의의 원칙은 무지의 베일 뒤에서 선택된다."(The principles of justice are chosen behind a veil of ignorance.)(존 롤스, <정의론> 중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에 연주자로 지원했다고 상상해보세요. 오직 연주 실력만으로 평가받기를 원하지만, 혹시 성별, 외모, 인종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이 되지는 않나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오케스트라가 도입한 것이 바로 블라인드 오디션입니다. 심사위원은 연주자의 모습이나 배경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연주만 듣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오이션 방식은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 개념을 현실에 적용한 사례입니다.
우리는 흔히 공정함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입장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있을까요? 축구 경기를 볼 때 미묘한 판정이 나오면, 내가 응원하는 팀에 따라 "공정하다"거나 "불공정하다"는 판단이 달라지곤 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롤스는 이런 인간의 편향성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무지의 베일'이란 무엇일까요? 무지의 베일은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 능력, 재산, 성별, 인종 등 개인적 특성을 알지 못하는 가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가상의 상태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을 결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적 편향성을 극복하고 공정함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을 쉽게 이해하려면, 친구들과 피자를 나눌 때를 떠올려 보세요. 가장 공정한 방법은 뭘까요? 한 사람이 피자를 자르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먹을 조각을 고르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최대한 공평하게 피자를 자르려고 할 거예요. 자기가 어떤 조각을 먹게 될지 모르니까요. 롤스의 무지의 베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만든다면,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규칙을 만들면, 우리는 보통 두 가지 원칙을 따르게 됩니다. 첫째,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자유는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표현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를 똑같이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둘째, '사회적 불평등은 오직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복지 정책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원칙은 특히 중요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더라도, 약자들이 최소한 견딜 만한 수준은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무지의 베일은 단순한 철학적 아이디어로 그치지 않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령 블라인드 오디션을 들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오케스트라 블라인드 오디션은 연주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는 공정한 방식이죠. 기업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이름, 나이, 성별 같은 정보를 가린 채 서류를 심사합니다. 이 과정은 평가자가 편견 없이 지원자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정책 결정 시 정부 기관에서 정책을 설계할 때 정책 입안자들에게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잊고 공공의 이익만을 생각하도록 훈련합니다.
무지의 베일은 철학적 개념을 넘어 연구와 실험을 통해 효과가 입증되기도 했습니다. 미국 국립과학원에서 실시한 'PNAS 연구'에서는사람들이 무지의 베일 상태에 놓이면, 특정 집단의 이익보다는 공동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무지의 베일을 적용해 자원 분배 실험을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역할이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는 공정한 분배로 이어졌습니다.
무지의 베일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게 될지 모른다면, 어떤 규칙이 가장 공정할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논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실천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일상에서도 무지의 베일을 떠올려 보세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조건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 상태라면, 어떤 선택이 공정할까요? 오늘 하루, 이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주변을 돌아보세요. 공정한 사회를 위한 작은 변화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