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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넘어 자유로 : 칼 융 -성장의 길

by 정지영

진정한 자유는 고통에서 벗어날 때가 아니라 충분히 고통스러워했을 때 오는 것이다.

(칼 융, <원형과 집단 무의식> 중에서)


삶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실연의 아픔, 실패의 쓴맛, 깊은 외로움... 이런 감정들은 누구도 반기지 않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고통이 찾아올 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외면하려 합니다. 새로운 인연으로 과거의 상처를 가리려 하거나, 바쁜 일상 속에 실패의 아픔을 묻어두려 애쓰곤 하죠.


하지만 20세기 심리학의 거장 칼 융은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고통에서 벗어날 때가 아니라, 충분히 고통스러워했을 때 찾아온다." 인간의 내면과 무의식을 깊이 연구한 융은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고통과 성찰이 지니는 가치를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그의 통찰은 불편하지만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고통을 피하기만 한다면 결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 오직 그 고통을 온전히 마주하고 받아들였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해방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융의 진정한 자유와 고통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그의 이론 전체 맥락에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칼 융은 인간의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의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아차리는 영역이고, 무의식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감정과 행동, 생각을 이끄는 깊은 심층의 영역입니다. 융의 관점에서 많은 고통은 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외로움에 시달린다고 해보죠. 이 고통은 단순히 '혼자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 속에 묻어둔 상처나 과거의 기억, 혹은 '외로워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압박이 그 고통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처럼 고통은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이자,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는 창문이 됩니다. 융은 이러한 고통을 피하거나 억누르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조언합니다.


둘째, '개성화' 여정에서 마주하는 고통 융의 핵심 이론 중 하나인 '개성화(Individuation)'는 인간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심리적 여정으로, 삶의 궁극적 지향점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여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합니다.

개성화 과정에서 우리는 융이 말한 '그림자(Shadow)', 즉 우리의 어두운 면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림자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어 무의식 속에 억눌러온 성격의 일부분입니다. 이를 회피하면 할수록 더 큰 고통으로 되돌아옵니다. 가령 자존심이 너무 강해 실수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피하려 했던 바로 그 약점 때문에 계속해서 좌절을 겪게 됩니다. 이때 고통은 우리가 감춰둔 그림자를 의식의 빛 아래로 이끌어내는 계기가 됩니다. 외면했던 진실을 받아들이고 포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 고통과 성장이 맞닿은 '심리적 통합' 융은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닌, '심리적 통합(Psychological Integration)'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감정과 경험, 그리고 내면의 다양한 측면들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단순한 괴로움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우리 내면의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합니다.


그렇다면 융의 고통에 대한 생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을까요?

고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경험입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이러한 고통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며 회피하도록 부추깁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에 파묻히거나,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에 몰두하고, 순간의 쾌락을 좇으며 고통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하지만 융의 관점에서 이는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일입니다. 고통을 억누르고 피하려 할수록, 그것은 무의식 깊숙이 쌓여 나중에 더 큰 상처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을 예로 들어볼까요? 그는 술을 마시거나 충동적인 소비로 이 고통을 잊으려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의 뿌리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힐 것입니다. 이럴 때 융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 스트레스가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이 이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융은 고통을 그저 견뎌내야 할 무게가 아닌, 변화와 성장으로 가는 문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깊은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돌아보게 됩니다. 가령 큰 실패는 우리가 쫓아온 목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때로는 더 의미 있는 길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현대 심리학의 '포스트 트라우마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 개념은 이러한 융의 통찰과 맞닿아 있습니다.

포스트 트라우마 성장(PTG)은 트라우마를 단순히 견뎌내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는 깊은 아픔을 통해 오히려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자 리처드 테데스키와 로렌스 캘훈은 힘든 경험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하며,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러한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끊임없이 성찰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칼 융의 시각에서 보면, 포스트 트라우마 성장은 '개성화' 과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온 '그림자'와 마주하게 만듭니다. 이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품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아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믿어온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흔들릴 때, 그것은 역설적으로 더 깊이 있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융은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지만, 결국 우리를 더욱 온전한 인간으로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상처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트라우마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으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더불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성장의 중요한 디딤돌이 됩니다. 결국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으며, 그 여정의 끝에는 더 깊은 깨달음과 진정한 자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깊은 상처와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경험을 통해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고통은 우리가 피해 달아나야 할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칼 융은 진정한 자유란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고통을 충분히 느끼고 이해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다는 것이죠. 우리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무의식이 전하는 깊은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고, 그를 통해 더 깊은 자아를 만나게 됩니다.


포스트 트라우마 성장이라는 개념이 보여주듯, 때로는 가장 큰 상처와 시련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관건은 우리가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느냐에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든,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으며, 그 여정의 끝에는 더 깊은 깨달음과 진정한 자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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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교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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