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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 : 기호학

언어가 세계를 만든다

by 정지영

소쉬르, 기호학, 그리고 언어와 실재의 관계

우리는 일상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의미를 형성하고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 단어가 실제 나무의 본질을 담고 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기호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 질문을 철저히 탐구한 학자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입니다. 그는 언어를 단순한 명명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형성하는 구조적인 시스템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현대 기호학(semiotics)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소쉬르의 기호학: 기호(sign)의 두 요소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들의 체계로 보았으며, 기호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기표(Signifiant, Signifier): 우리가 실제로 듣거나 읽는 단어, 소리, 문자 등의 ‘형식’입니다.

기의(Signifié, Signified): 그 단어가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단어를 보면, ‘나무’라는 글자와 소리는 기표이며, 우리가 떠올리는 ‘뿌리가 있고 줄기와 잎이 있는 생명체’라는 개념이 기의입니다. 중요한 점은 기표와 기의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를 소쉬르는 자의성(arbitrariness)의 원칙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의성: 단어와 실재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나무’라는 단어가 실제 나무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약속일 뿐입니다. 영어에서는 ‘Tree’, 프랑스어에서는 ‘Arbre’라고 부릅니다.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가 언어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은, 언어가 실재를 직접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소쉬르는 언어를 개별적인 단어들의 집합이 아니라 구조적인 관계망으로 보았습니다. 즉, 기호는 단독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 속에서 의미를 형성합니다. 이를 차이의 원리(differential principle)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검은색’은 ‘하얀색’과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가집니다. ‘길다’라는 개념도 ‘짧다’와 대비될 때 비로소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즉, 언어는 단어들이 서로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구조주의 언어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문학 비평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langue)파롤(parole)로 구분했습니다.

랑그(langue):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언어의 규칙과 체계입니다.

파롤(parole): 개별 화자가 실제로 말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랑그가 언어 연구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개별적인 발화보다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체계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인류학,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기호학,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담론 분석 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언어가 실재를 구성한다?

소쉬르 이후 많은 학자들은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구성주의(Constructivism)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시간’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시간이 직선적(linear)으로 흐른다고 봅니다.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개념입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시간이 순환적(cyclical)이라고 밉습니다. 즉, 시간이 계속 반복된다고 믿습니다.


'시간'이라는 언어에 어떤 의미를 담느냐에 따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직선적인 시간 개념을 가진 문화에서는 삶을 목표 지향적으로 계획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순환적인 시간 개념을 가진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와 미래로 반복된다고 보기 때문에, 공동체의 전통과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는 태도가 강합니다. 이처럼 시간 개념의 차이는 개인의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와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언어가 다르면 세상을 인식하는 틀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언어 상대성 이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합니까?

이와 관련해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 등장했습니다. 이 가설은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합니다.

강한 언어 상대성(언어 결정론, Linguistic Determinism):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합니다. 즉, 특정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가 제공하는 틀 안에서만 사고할 수 있습니다.

약한 언어 상대성(Linguistic Relativity):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주긴 하지만, 완전히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를 의심하는 것이 철학의 시작

우리는 언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소쉬르가 보여준 것처럼, 언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가 아닙니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고, 때로는 제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내 사고를 틀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몰랐던 개념을 접하면, 내 세계관도 넓어질 수 있을까요?


언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더 넓은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단순한 언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언어를 의심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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