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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요리 Sep 06. 2020

7년간의 유학생활에 대한 소회

고등학교 적응기 

미국에서 처음 학교를 가고, 학교에 적응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어쩌면 나는 끝끝내 그 그룹안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도 모른다. 인싸와 아싸 중간의 그 어디쯤 애매한 위치에서 적당히 어울리고 적당이 고립된 그런상태로...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들으며 삽질아닌 삽질하고 고군분투했던 모든 과정은 하나의 글로 정리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에피소드 위주로 몇 개 적어보려 한다. 다행히 지금와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좋은 기억들도 참 많더라... 


수업


학교의 수업 퀄리티는 깜짝 놀랄만큼 높았다. 수업과목 자체도 한국과 달랐고, 수업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가지 활동들이 많아서 단순히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의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생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고 한국 고등학교의 수업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수업을 하는 방식자체가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니고, 선생님과 학생 모두가 수업시간 안에 깊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수학,과학이 나의 취약과목이었는데, 미국에 오니 계산기도 쓰지않고 암산을 하는 나는 졸지에 수학 천재가 되어버렸다. 미국에서는 수학시간에 대부분 계산기를 사용해서 문제를 푸는데, 처음에 계산기를 사야하는지 몰랐던 몇 일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수학 천재이던 시간은 잠깐이고 나중에 AP 수업을 들으면서는 본격 헤매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을 가장 힘들게 한 수업은 각 학년마다 듣는 English 수업(우리나라로 치면 국어)이었다. English 수업은 보통 학년 별로 읽어야 하는 책이 지정 되어 있는데, 전부 기억은 안나지만 The Catcher in the rye (호밀밭의 파수꾼), The Great Gatsby (위대한 개츠비) 과 같은 책이 있었던 것 같다. 미국 고등학교는 시험과 퀴즈가 많아서 방심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수업 첫 날 나누어주는 syllabus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퀴즈와 테스트 날짜를 놓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도 적응이 필요했다. 특히 English 수업에 조별활동이 많았는데, 조별활동에서 뭐라도 한 마디 하려면, 한 자라도 쓰려면 꾸역꾸역 읽어야 했다. 지금은 책 이름을 검색하면 요약부터 주요 요점까지 정리되어 나오지만, 그 때만해도 벌써 15년 전이니 그런 것들이 있지도 않았다.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정 안되는 부분은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식으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큰 난관은 돌아가면서 책 본문을 "소리내어" 읽는 것을 시키는 날이었다. 나의 구린 발음이 만천하게 공개가 되고 (물론 그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갑작스럽게 읽기를 해야 하는 날에는 모르는 단어, 모르는 발음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 차례가 언제 올지 모르니 모르는 단어를 미리 찾을 여유도 없었던, 숨막히는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난다. 

그럼에도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들이 한 명도 없이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와 수업 중간에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학생들을 보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충격이었다. 

수업 중간에 손을 들고 질문을 할 용기까지는 없었던지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또는 선생님들의 office hour에 자주 찾아갔다. 질문거리를 잔뜩 들고 가면 귀찮은 내색 없이 과외하는 것처럼 알려준 것도 고맙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데 수업시간에 얼마나 고군분투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한다라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마음이 찡할 정도로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이런 여러 사건들과 과정들을 통해서 학교수업에 적응을 해 나갔고, 결과적으로 이런 과정들이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고마운 사람들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대체로 "nice" 했다. "nice" 하다는 말은 나를 힘들게 하지도 그렇다고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에서 만나면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정도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였다는 뜻이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구김살 없고 만나면 인사정도는 하는 그런 사이. 먼저 도움을 청하면 흔쾌히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절대 먼저 "알아서" 도와주지는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성향상 쭈구리처럼 가만히 있는게 마음이 편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죽도록 싫어 하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생존을 해야 하다보니 서툰 영어로 먼저 도움을 청할 일이 생겼다. 먼저 도와주지 않으면 어때, 나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왕따시키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당시에는 하루하루를 헤쳐나가는 것이 큰 일이었고 친구가 없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의지하고 힘을 얻은 건 학교 선생님들이었다.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선생님은 이미 한 차례 영어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나의 미국 생활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분이다. 학교생활 전반에 대한 도움부터 내가 갈곳 잃고 방황할 때 홈스테이를  구해주기도 하셨다. (물론 이 홈스테이는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게 끝났지만...) 나 말고도 몇 명의 외국 학생을 담당하셨었는데, 정말 엄마처럼 우리를 품어주셨다. 때때마다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도 대접해 주고, 마음 터놓을 곳 없는 나를 위해서도 시시콜콜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내 일 처럼 기뻐해주고, 힘든 일 있을때 앞장서서 해결해 준 내가 평생 잊으면 안되는 고마운 분이다. 특별히 커리큘럼이 있었던 수업은 아니었지만, 아마 2년 반 내내 내가 가장 기다리던 수업시간이 이었다. 

Art 수업은 여러가지 수업들 중 내가 영어를 가장 안 쓸 수 있는 수업을 찾다가 듣게된 수업이다. 사실 워낙 미술을 좋아하기도 했기에 수업자체도 즐거웠고, 첫 인상이 약간은 독특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선생님도 많이 기억이 난다. 굉장히 새심하고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린 그림에 대해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떤 점이 좋았는지, 내가 뭘 잘했는지 늘 구체적으로 언급을 해 주었다. 미국에서 학교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이 바닥을 치는 날이 정말 많았는데, Art 수업을 듣고 나면  "어쩌면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를 안 쓸 줄 알고 들은 수업인데, 미술 수업에도 영어를 쓸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내가 그 그림의 의미나 내 느낌에 대해 꼭 설명을 해야 하는 session이 있었다. 아니 내가 무슨 작가도 아니고... 하아.. 너무 힘들었다.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학교 첫 날 라커 열어준 학생부터 수업에서 헤매는 나를 도와주었던 많은 학교 친구들, 점심시간에 누구와 먹어야 할지 모르는 나를 흔쾌히 무리에 끼워준 친구들(미국은 점심시간이 개인 스케쥴별로 다르기 때문에 lunch mate 찾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내가 민폐를 끼쳤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준 모든 아이들아 고마웠어~ ㅎㅎ 

아마 내가 더 적극적인 성향의 사람이었다면 훨씬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앞뒤 가리지 않고 그냥 부딪히고, 들이댔으면 조금은 다른 학교생활을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려움 


학교 수업부터 전반적인 생활에 있어 어려움은 일일히 다 나열할 수 없을만큼 많았다. 그 중 가장 큰 어려움 두 가지는 내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몫을 다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의 외로움이었다. 


수업시간에 조별과제를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내가 속한 조는 어쩐지 손해를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한 사람 몫을 다 해낼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는데, 꼭 그 얘기를 대 놓고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팀에 Justine(내 미국 이름) 있으니까~~" 라는 말을 시작으로 우리 팀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던지, 상대 팀이 어떤 패널티가 있어야 한다던지... 뭐 이런식의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꼭 한 반에 한 명씩 있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순발력있게 대처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상처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너는 한국말 하냐?" 하면서 욕하곤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저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할 수 있었겠다 싶다. 나도 내가 피해를 주는건 알지만 그래도 대놓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 조별활동을 하는 수업이 원망스럽고, 영어를 못하는 내가 싫고, 빨리 수업이 끝나고 이 교실을 나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내가 나의 모국어를 쓰는 나라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ESL 선생님이 소개해준 홈스테이는 단 6개월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6개월은 최악이었다. Host mom도 좋은 사람이었고, (지금와서 굳이 이해해보자면) 나와 같은 학년에 있던 딸도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host mom은 이혼을 하고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던 사람이라 데이트하느라 바빴고, 그 집 딸은 "PARTY GIRL" 이었다는게 문제였다. 엄마가 집을 자주비우고, 그 집 딸은 친구들을 불러 매일매일 파티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고등학생임에도 맥주를 마시고, 가만히 있는 내 방 문을 두드려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도 했었다. 저녁에 친구들을 불러 파티하고 맥주마시는 일은 내가 그 집을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계기였지만, 그 전에도 이런 저런 트러블도 있었다. 아마 나도 어렸기때문에 대처를 잘못한 일이 분명 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집을 나오게 되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정말 미안해 하셨었다. 본인이 홈스테이 소개를 처음 하다보니, 어떤 가족이 홈스테이에 적절할지에 대한 판단이 부족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누구와 살았어도 내 가족과 사는게 아니면 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2시 반이면 수업이 끝나는데, 집에 와도 아무도 없고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생각보다 아주 많이 외로운 일이었다. 힘들었던 시간이라 그런지 기억도 흐릿하다. 흑흑


아이 혼자 유학을 가야하는 상황이라고 하면 선뜻 대답을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내가 홈스테이를 하면서 겪었던 일들도 그렇고, 혼자 살면서 느낀 외로움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러기아빠 혹은 기러기엄마도 찬성할 수는 없고...상황이 허락한다면 가족이 다 같이 가는 것이 베스트인 것 같다. 12학년때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언니가 어학연수 겸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왔는데, 언니와 함께 보낸 1년은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 그런지 유독 즐거운 기억이 많다. 집에 가족이 있으니 학교생활도 더 수월했고, 수업을 마치고 와도 나와 얘기를 하고 뭔가를 같이 할 사람이 있다는게 외로운 타지생활에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실제로 마지막 학년에 GPA가 제일 잘 나왔다.성적도 올랐다는 사실! )


이런 저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나는 유학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음 편에 이어서 험난한 고등학교 적응기를 마무리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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