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고 싶어서 고민한 '삶의 이유'
이 글은 대학교 3학년 끝무렵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린 나만의 답이 적혀있다.
지금은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 이 생각에 변함은 없다.
그 당시의 일기를 끄집어내본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보편적인 대답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대답이 통하지 않는 몇몇 부류들이 있다. 나도 이에 포함된다.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라...
내가 이 고민을 진지하게 하기 전까지는 이것이 맞는 말임과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나는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는 '행복'은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기거나 돈과 사회적인 명예, 권력을 획득하는 등의 거창한 것이 아니어서, 기본적인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일단 충족되고, 인격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느정도의 인정이 수반된 상태라면 일반적으로 충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나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야할 이유를 '행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찾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가면서 늘어날 인생의 변수와 불행을 생각해봤을 때에는 지금 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이 거창해보이지 않는 행복의 정의도 충족하기는 쉽지 않다는 면에서, 이를 모두 충족한 필자는 부자도, 권세가도 아니지만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었음은 분명해보인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앞으로도 나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나의 고민의 시작점에서 저지른 오류 중 하나는 '행복'의 주어를 '나'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과연 나의 행복은 나와만 관계되어 있는 것일까? 고립된 나의 행복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전우익 작가의 책 제목에서
결론은, 인간은 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내 행복은 대부분 이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다시 정의해보자.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혹은 열심히 살아가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다만, 이 주어를 '나'와 '나의 공동체'로 놓으면 어느정도 답이 나온다. 이 때, 공동체는 당장 내 주변의 친한 사람들, 내가 아끼는 생물체 등이 될 수 있고, 이것이 확장되면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각자가 느끼고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본다.
여기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되 항상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돈, 명예, 권력을 얻는 등의 일명 '사회적 성공'을 거둔 후에도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인생의 허망함과 부질없음이 뒤따를 것이다.
인생은 어찌보면 참 단순하며, 지위와 상관없이 평범하게 돌아간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하며, 죽는다.
이러한 필연적 과정 속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나와 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면 하나의 온전하고 성공적인 삶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그 답은 '나와 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범위는 나의 그릇을 점차 넓혀나가면서 무한히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목표를 가지고 사니 어떤 성공을 거두어도 삶의 목적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확신이 생겼다. '공동체'의 범위를 무한히 키워나갈 수 있기에. 주변 소중한 사람들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세계 반대편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나의 선한 에너지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아! 물론 삶의 이유에 대한 답은 또 언젠가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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