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일 월요일 오전 7시 40분. 출근하는 남편의 차를 얻어 타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 1층에 내려가니 아랫집 그녀도 벌써 와 있었다. 오늘은 그녀와 나, 단 둘이서 서울 구경을 가기로 한 날이다. 하루 날 잡아 훌쩍 떠나는 일이 뭬 그리 어려울까마는 훌훌 털고 홀가분하게 집을 떠나는 일이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큰아들의 대학 진학 문제가 결정되자 그나마 떠날 여유가 생겼다.
아침 출근 시간엔 5, 10분 차이로도 도로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일찍 서두른 덕분에 다행히 도로는 한산했다. 나와 그녀를 내려주고 남편은 회사로 출근했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우리는 간이 버스 매표소에 들어가 예매한 표를 창구에서 받고, 아침 대용으로 그녀가 싸온 고구마를 나눠 먹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여행을 떠나는 건 죽음을 연습하는 것 같아. 모든 걸 집에 다 두고 나와야 하니까. 안 그래?”
여행 간다는 사실에 사뭇 들떠있는 내게 불쑥 그녀가 꺼낸 죽음이라는 단어는 섬찟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니 금방 이해가 되었다.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다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떠나는 게 인생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떠나기 며칠 전에 그녀로부터 카톡 문자 한 통이 왔다. ‘그 날 짐은 최소한으로.’ 죽음을 연습하듯 최소한의 짐을 꾸려 우리는 서울행을 감행했다.
나는 서울을 잘 모른다. 작년에 일이 있어서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다녀오긴 했지만 항상 똑같은 코스로만 반복해서 갔다 왔다. 그렇지만 이번엔 서울 출신에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그녀 덕분에 서울 구경은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그녀는 내게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물었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서울 투어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가보지 못한 인사동이 제일 가고 싶었다. 그녀의 지인이 추천했다는 윤동주 문학관을 리스트에 넣고, 명동 성당도 추가했다.
인사동 쌈지길을 둘러보고는 예정에 없이 북촌으로 향했다. 북촌 가는 길에 헌법재판소가 있었다. 헌법재판소가 보이는 지하도를 나올 때부터 전경들이 쫙 깔려있었다. 도로엔 경찰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태극기 부대가 시위를 하고 있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의 지혜롭지 못한 국정 운영은 국민들의 배신감을 사기에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태극기 부대는 도대체 이성적으로 바른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역사적인 현장에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잠깐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늘진 곳은 바람 때문에 쌀쌀한 감도 있었지만 한낮의 따스한 봄바람은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북촌으로 들어서니 인사동처럼 어린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에휴, 우리도 저 나이라면 저렇게 입고 다닐 텐데.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을까?”
나는 젊고 예쁜 아이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처럼 한숨을 푹푹 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청와대 주변은 경비가 삼엄했다. 북악산 아래 곳곳에 초소가 있었다. 잘 생긴 의경이 우리에게 집이 그쪽이냐고 물었다. 숙녀들의 가방 검색은 예의상 할 수 없지만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지 않은지도 물었다. 청와대를 거쳐 윤동주 문학관으로 갈 것이라고 했더니 통과시켜 주었다. 거리 안내원이 윤동주 문학관은 월요일엔 휴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둘레길이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그냥 가기로 했다. 윤동주 문학관은 공사 중이었다. 다행히 1층 전시관을 살짝 볼 수 있었는데 그의 고향에서 가져와 복원해 놓은 나무로 만든 우물이 전시관 한가운데에 있었다.
둘째 날엔 서소문 성지와 명동 성당, 터미널 근처의 gotomall을 둘러보고 내려가기로 했다. 서소문은 외곽이 철판으로 둘러싸인 채 공사 중이었다. 말로만 듣던 명동 성당은 굉장했다. 본당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 몇 명과 관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밖에 있는 벤치에서 기도하는 분도 계셨다. 무엇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모습은 거룩하기까지 했다. 방해가 되지 않게 멀리서 살짝 몰카를 찍어 왔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gotomall은 도깨비시장처럼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물건값이 아주 싸서 서민들이 이용하기엔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아이쇼핑만 했다. 아, 맞다. 나도 산 것이 있다. 남대문을 지날 때 도매 가게에서 앞치마를 사고, 서울역 중소기업 상품 파는 가게에서는 문지르기만 해도 자동으로 때가 살살 녹는다는 목욕타월도 샀다. 살림꾼 아줌마의 본능이 동해서. 그리고 인사동에서는 고마운 지인에게 드릴 선물도 샀다.
내가 본 서울은 명품 백화점을 제 집 드나들 듯하는 사람들과 초저가 상품들을 들추며 쇼핑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못 가진 자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세계 명품관을 지나칠 때 우리는 화장실에서 볼 일만 보고 매장을 둘러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니까.
그녀와 나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다. 위 아랫집에 살다가 우연히 친구가 된 동갑내기 친구다. 성격도 많이 다르다. 아니 숨기는 거 없이 솔직한 점은 닮았다. 그래서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녀 아니었으면 나는 서울 여행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1박 2일로. 그녀의 끊임없는 인증샷 찍기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 하는 게 익숙지 않아 힘들기도 했지만 성격 좋고 명랑 쾌활한 그녀 덕분에 즐거운 서울 여행을 한 것 같다. 어수선한 시국이 아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긴 하지만.
훌쩍 커버린 아이들, 제법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흰머리를 볼 때면 나는 없고 가족들을 위한 삶만 살아온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쉰을 훌쩍 넘겨버린 것 같아 우울해지기도 한다. 아흔이 넘은 어느 노학자는 자기 삶에서 가장 좋았던 때가 60, 70대였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비록 외모는 조금 나이 든 티가 날지언정 인생의 맛을 제대로 아는 나이가 그때인지 모르겠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되뇌어 본다. 내 인생의 봄날은 지금부터라고. 가끔은 가족들과도 떨어져 있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나는 또 즐겁게 길을 나서리라.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지금 내 앞에 펼쳐진 내 인생의 봄날을 만끽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