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그대

by 장윤경

내겐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얘기를 하려면 한 3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날, 그날은 대학 입학원서를 내러 갔던 날을 빼면 정식으로 학교에 간 첫날이었다. 졸업 겸 입학 선물로 숙모님이 사주신 가죽백을 메고 한껏 멋을 부린 후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나는 어떤 이들에게 제대로 딱! 걸리고 말았다. 대학생선교단체에서 fishing 나온 낚싯꾼들에게.

중고등시절부터 나는 교회에 다녔다.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친구의 언니가 교사로 있는 교회에 나갔다. 드문드문 가기 싫을 땐 결석도 했다. 그 당시에 만난 예수라는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한 구원자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문을 들어서던 날 예수님은 두 사람을 내게 보내셨다. 독문과 3학년 남학생과 철학과 4학년 여학생 선배를. 그것을 나는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둘씩 짝지어 전도여행을 다닌 것처럼 그 두 사람은 혼연일체가 되어 순진한 신입생을 포섭했다. 어리숙했던 신입생은 노련한 언니, 오빠의 유혹에 홀랑 넘어갔다.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이 일조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것도 친절하게 1:1로 공부를 시켜준다니 얼마나 좋으냐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집, 학교, 성경공부 하는 센터만 부지런히 다녔다. 성경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목자, 배우는 사람은 양이라고 불렀는데, 나처럼 성실하게 공부한 사람은 보통 2학년이 되면 목자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1:1로 성경을 가르쳤다. 2학년이 될 무렵 나는 세례를 받고 목자가 되었다. 그곳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단체여서 주일에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1961년 4·19와 5·16 직후의 혼란했던 시대에 국내에서 소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생겨난 선교단체였다.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목표로 하는 초교파적인 단체였다.

나는 불문학과에 입학한 것이 프랑스 선교사로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다고 굳게 믿고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양을 쳤다. 허튼 짓을 할 시간이 없었다. 매일 아침에는 1시간 정도 일찍 등교해 잔디밭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QT 모임을 한 후 수업을 들으러 갔다. 잠도 많은 내가 어디서 그런 열심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대학 3년동안 미팅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남학생을 한 번도 안 만나봤다는 말은 아니다. 문학개론 수업을 들을 때 어떤 남학생이 그 반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며 만나고 싶다고 쪽지를 보내와서 한 번 만나보기는 했다. 그런데 정말 웃긴 친구였다. 별명이 '조선나이키'였는데 흰고무신에 싸인펜으로 해골을 그려서 신고 다니는 친구였다.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런 일로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랬더니 군말 않고 물러섰다.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예수님과 사랑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할 뻔했다.

대학시절 나는 그렇게 ‘길, 진리,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향해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달려갔다. 내 마음 속엔 예수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한 사람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반곱슬머리에 외모가 잘 생긴 것도 아닌데 항상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는 그가 좋았다. 그는 공부도 잘해서 의대 본과 3학년생이었다. 그런데 더 마음에 든 것은 그가 참 기도를 잘 한다는 사실이었다. 주일 대표기도 시간에는 주로 선배 목자들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는데 그의 기도는 정말 조리있고 멋졌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많이 써서 멋진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조리있게 하는 그의 기도는 한마디로 사람을 뿅 가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나의 멘토로 삼아 그처럼 기도를 잘 해 보려고 기도실에 들어가 기도의 은사를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니 닮아가게 된 것일까. 그 뒤로 나도 기도를 조금씩 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셨는지 나를 시험하셨다. 사진부 일을 그와 함께 맡게 된 것이다. 함께 일을 하고 있으면 내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했다.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했다. 그런데 2학년 수련회 때 이런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감문을 썼다. 나의 선교지는 프랑스지만 그와 함께라면 그의 선교지인 아프리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사람들은 박장대소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그와 나는 함께 더 이상 사진부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들이 연애감정이나 싹틔우고 있다면 그건 예수 제자로서의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와 나는 학교가 달라 자주 만날 수도 없었고, 규모가 커져 센터가 나뉘는 바람에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향한 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런데 졸업반이 되자 취업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사로서의 비전은 온 데 간 데 없고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딱 1년만 열심히 공부를 해보겠다고 선포하고 센터를 나왔다. 그런데 그 뒤로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취업해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에 나는 꿈과 낭만을 마음껏 누리는 대신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예수님은 아직도 내 삶의 중심에 계신다. 내 신앙생활의 모델이 되었던 그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좋은 선배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를 떠올리며 가끔은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고 그와 결혼했더라면 아주 이상적인 기독교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을까’라고.

‘그대는 지금 잘 살고 계십니까. 저는 지금 자알 살고 있습니다. 천생연분인 남자 만나 아들 둘 낳고,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대 생각이 납니다. 큰일날 일 아니니 그대도 좋은 기억으로 가끔 저를 떠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 혼자만 그대를 생각한다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렇다고 눈곱만큼도 제 생각을 안 해준다고 따지고 들진 않겠습니다. 우짜든지 행복하세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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