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3.08.14. 월, 맑음, 28~32도)은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계획,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선생(1337년~1392년 4월 4일, 향년 55세) 묘소를 탐방했다. 신념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건 사나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침 징검다리 연휴라 시간을 일부러 내었다. 한 여름철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 나섰다. 수십 년 전에 한 번 참배한 적이 있었다. 묘소 올라가는 길 우측에 연못이 새로 생긴 것이 큰 변화였다.
홍살문 /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 (부인 경주 이 씨와 합장)
선생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 3에 있다. 그리고 약 2km 남동방향에 선생을 배향하는 충렬서원이 있다. 그 중간쯤에 선죽교가 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던 선생의 마음을 표현한 단심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선생 어머니의 백로가 그리고 훗날 조선 태종이 된 이방원의 하여가도. 초등학교 시절 고스란히 전해져 왔던 그 짜릿한 감동을 되새겨 보았다.
단심가 / 백로가
丹心歌 (단심가)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토 되어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寧有改理與之(영유개리여지)
가실 줄이 있으랴
1. 포은정몽주선생 묘
고려 말기 충신으로 성리학의 시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1360년(공민왕 9년)에 문과에 장원급제 후 예문관검열,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을 지냈다. 고려는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따랐다. 그러나 선생은 주자가례(朱子 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노력했다. 고려 수도 개성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 진흥을 위해 힘썼다.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했다. 대명률을 참작하여 신율을 간행하여 법질서 확립하고자 했다.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1392년(공양왕 4년)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정몽주 선생 동상 / 묘소 설명판
외교가였다. 왜구 피해가 심해지자 일본으로 건너가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고려인 포로 수백 명과 함께 돌아왔다. 또한 친명파로서 새롭게 떠오르는 명나라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파견되어 홍무제를 설득하여 억류되었던 사신과 함께 돌아왔다. 게다가 이성계와 함께 직접 왜구 토벌전에도 참전하는 등 무관의 경험도 있다.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그의 동태를 파악하러 갔다가 귀갓길에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은, 고려 재건을 위해 이미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다.
조선 건국 후 그는 바로 복권되는데, 역설적이지만 한 때 맞수였던 조선 태종은 1401년(태종 1년) 정몽주 선생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였다. 고려 왕조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그를 사대부의 귀감으로 삼았다. 또 다른 역성혁명 방지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현재 36개 서원과 사당에 배향되어 있다.
선생이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고, 혈통에 대한 의혹이 있는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찬성하였다. 이는 고려 왕실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 그의 선택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이 있다. 선생이 순절 후 개성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태종 6년(1406)에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장 행렬 앞의 명정(銘旌,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졌다. 상여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관에게 물어보니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여, 여기 문수산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소 입구 안내석 / 신도비
묘역 입구, 신도비(神道碑)는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김수증(金壽增) 이 글을 쓰고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비신 상단부의 명칭)을 썼다. 왕조와 시대를 뛰어넘은 선생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정몽주 선생 어머니의 백로가 시비가 있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자식 걱정이 가득 담겨 있다.
문화관광 해설 사무실
모현당 / 연못
묘소 올라가는 좌측에 문화관광해설소 건물과 모현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그리고 우측에 연못이 있다.
묘비 / 전망
중종 12년(1517)에 건립된 묘비에는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고 한다.
명당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내가 보아도 좋은 묏자리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평화로운 안온한 기분이 든다. 단 분으로 상석,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곡담, 호석, 난간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정몽주 선생 묘(좌측 멀리 보임)와 이석형 선생 묘
선생 묘소 우측에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있다. 부인 정 씨가 정몽주 선생의 증손녀로서 두 분이 합장되어 있다.
충렬서원 / 외삼문
2. 충렬서원 (忠烈書院)
충렬서원은 1576년(선조 9)에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과 조광조(趙光祖, 1482~1520)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죽전에 충렬사(忠烈祠)로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충렬서원 안내도 / 설명판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1605년(선조 38)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 용인현감 정종선(鄭從善)등이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는 모현면에 옮겨 중건했다. 1608년(광해군 1) 사당 3칸, 동재와 서재 각 2칸, 문루 3칸 규모로 완성하고 문루 위에는 강당을 지었다. 이때 조광조 선생의 위패는 새로 창건된 심곡서원으로 옮겼다. 1609년(광해군 1)에 忠烈書院(충렬서원)으로 사액되었고, 1701년 (숙종 27) 정몽주 선생의 손자 정보(鄭保)와 병자호란 때의 충신인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1706년(숙종 32)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
강당 / 충렬서원 강당 중건기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1년 사당을 중건하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신축하였다. 1998년부터는 홍익한 (洪翼漢), 윤집(尹集)과 함께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오달제(吳達濟, 1609~1637)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내삼문 / 사당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사당, 내삼문, 외삼문, 동·서 협문(夾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이루어진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강당 등이 있다. 최근에는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丹心歌)를 새긴 비가 건립되었다. 사당 중앙에는 감실을 마련하여 정몽주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좌·우 위에 정보와 이시직의 위패를 하였다. 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향사(鄕祠)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5 변(籩) 5두(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