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당고개(용산)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가 몹시 궁금했다. 절두산 순교성지(https://brunch.co.kr/@@8pxb/170, 2024.06.02)와 새남터 순교성지(https://brunch.co.kr/@@8pxb/171 2024.06.06)는 이미 보고를 드렸었다. 오늘(2025.03.08. 토 맑음)은 당고개(용산) 순교성지다. 이어서 운현궁과 인사동 조계사 앞을 거쳐 경복궁 앞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당고개 순교성지 (堂峴 殉敎聖地)
이곳은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순교 성지다. 용산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직선 660m) 작은 언덕 위에 있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박해의 고통을 찔레꽃 가시로, 하느님의 은총을 매화꽃 향기로 표현하여 ‘찔레꽃 아픔, 매화꽃 향기’를 주제로 조성되었다.
1986년 준공했고, 2010년 신계역사공원 조성과 함께 재개발하면서 재 준공하였다. 외부 지상 건물은 한옥이며, 벽은 황토 토담에 옹기, 도자기 조각으로 꾸몄다.
당고개 성지의 십자가의 길 14처(성당 위 언덕)는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구성으로 설계되어 있다. 기해박해(1839, 현종 5) 때 12월 27일과 28일(음력) 이틀간 10명(여 6, 남 4)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9분이 시성됨으로써, 서소문과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다.
한국의 103위 성인중 62위부터 70위까지의 성인 9분과 124위 복자 중 104위 복자 1분을 모시고 있다. 복자 1분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였던, 이성례 마리아다. 먼저 순교한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감옥 내에서 굶어 죽은 젖먹이 어린 자녀의 죽음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다가 다시 신앙을 고백한 뒤 순교하였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 신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유언, 기해일기에서)
당시 천주교 신자들 처형장소로 일반 신자들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성직자와 지도자들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당초에는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기로 했었는데, 설을 앞두고 칠패시장 상인들이 대목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다른 장소에서 처형하도록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 변경된 장소가 바로 당고개다.
또한 병오박해 때인 1846년(헌종 12) 7월 26일 최초의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 ~ 1846)가 새남터 처형장으로 가던 도중에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갔던 곳이기도 하다. 증언(기해일기, 최영수와 현석문이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기록한 순교자 전기집)에 의하면, 병사 하나가 땀 흘리는 신부의 풀어진 상투를 다시 묶어 주었고, 보라색 겹저고리를 입은 김대건 신부는 머리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당고개 유래
지금은 사라진 문배산(文培山) 기슭의 고개였다. 문배산 주위로 넝쿨내(만초천 蔓草川)가 흐르고 있었다. 서대문구 인왕산 서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독립문 영천시장 아래, 서소문 밖 네거리, 청파, 당고개 주변을 지나 원효대교 아래 한강으로 흘러갔다. 옛날 당고개 주변은 모래벌판이었다.
고갯마루에 무덤이 많았으며, 후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었었다. 이때 당집이 여럿 들어서면서, "당고개" 혹은 "당현(堂峴)"이라 불렀다고 한다. 1986년 문배산 마루에 순교 기념비를 세워 성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2008년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기념비는 철거되었다. 단지를 정리 후 2011년 신계역사공원 안에 ‘찔레꽃 아픔과 매화꽃 향기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성지’가 새로이 조성되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비
성당 입구 좌측에 세워져 있다.
당고개 성지에서
(이해인 수녀 시인)
박해의 칼 아래 피 흘린 목숨 보다 / 더 붉게 타오른 님들의 사랑은 / 이제와 영원히 찬미 영광 받으소서! / 피 묻은 침묵 속에 예수님과 함께 하신 / 마지막 고통의 순간들이 이제는 / 찔레꽃 가시로 우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님들을 닮지 못한 부끄러움 그대로 안고 /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우리 / 이 땅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 처절하게 고독하고 용감했던 님들의 선택으로/ 우리가 누려왔던 빛나는 영광을 / 당연히만 여겨왔던 무심함과 우매함을 용서하십시오
춥고 아픈 겨울 이겨낼 / 천상의 매화 향기 맡고 싶어 / 기도의 산과 언덕을 넘어 당고개 순교성지에 왔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삶으로 보여주신 님들처럼 /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가 / 오직 사랑이게 해 주십시오 / 목숨 바쳐 신앙을 지키신 님들 덕분에 / 우리의 믿음 또한 조금씩 깊어질 수 있음을 / 오늘도 새롭게 감사하며 / 하늘로 이어지는 꽃 탑을 쌓습니다
옹기처럼 깨어지고 부서지고 낮아지는 / 사랑의 순교를 일상의 삶터에서 실천하는 / 가난하고 겸손한 순례자가 될 수 있도록 / 늘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사랑으로 피 흘리신 순교성인들이여 / 찔레꽃 아픔을 매화향기로 승화시키는 / 사랑의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천주교 5대 박해 요약
1791 신해박해(정조 15) 윤지충 권상연 등이 유교식 제사 거부, 조상 신주 불태운 사건
1801 신유박해(순조 1) 주문모 신부(중국)등 300여 명 순교
1839 기해박해 (헌종 5) 앵베르 신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약 130명 순교
-. 당고개 : 1839년 12월 27일(7명), 28일(3명) 순교
1846 병오박해 (헌종 12) 약 110명 순교 김대건 신부(새남터 성지), 현석문 가롤로 기해일기에 기록.
-. 1846.7.26. 김대건 신부 당고개에서 잠시 쉬었다. 흐트러진 상투를 포졸이 다듬어 주었다.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았다. 새남터 처형장으로 감.
1866~1871 병인박해(고종 3) 약 8,000~10,000명 순교, 베르뇌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순교
순교 성인과 복자 10명의 성명(본명)
이곳에서 처형된 신자 10명은 성인 박종원(아우구스티노), 성인 홍병주(베드로)와 성인 홍영주(바오로) 형제, 성녀 손소벽(막달레나), 성녀 이경이(아가타), 성녀 이인덕(마리아), 성녀 권진이(아가타), 성인 이문우(요한), 성녀 최영이(바르바라), 복자 이성례 (마리아)이다.
성인(聖人) 또는 성녀(聖女) 칭호는 엄격한 조사, 시복, 시성 과정을 거친다. 한국의 103위 성인, 성녀는 대부분 순교자다.
순교 성인들 가족관계
당고개 순교성지의 성인들 중, 성 이문우 요한 성인 외의 다른 분들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성인과 가족 관계인 분들이 많았다. 부부 관계로는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인 성 고순이 바르바라, 성 손소벽 막달레나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성 최창흡 베드로, 그리고 그분들의 딸 성 최영이 바르바라와 역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성 조신철 가롤로가 있다.
특히 성 홍병주 베드로(형)와 성 홍영주 바오로(동생)는 형제로 당고개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형이 먼저 12월 27일, 동생은 다음날 집행되었다. 당고개 순교성인 아홉 분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고,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되었다.
당고개 순교자 10분 중에서 지면관계상 5분만 소개한다. 나머지분들은 당고개 성지 홈페이지(www.danggogae.org/)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복자 이성례 마리아
복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한국 천주교회 두 번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복자 이성례 마리아는 수많은 고문과 회유 속에서 한때 옥에서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와 옥 밖의 어린 네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며 흔들렸다. 그러나 다시 체포되었을 때는 먼저 순교한 남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의지하며 용감히 배교를 취소하였다. 끝내 순교함으로써 인간적인 갈등을 넘어섰다.
조선의 제2대 방인 사제이며 땀의 순교자로서 조선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신자들을 보살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다.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성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1821년에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남편의 뜻에 따라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장남 최양업 토마스는 공소 방문을 오신 모방 베드로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나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경환이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불쌍한 교우들을 돌보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자,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무더운 7월 새벽 포졸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 사람 모두를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게 되었다.
이때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려 조반을 먹게 한 다음 앞장선 남편 최 프란치스코를 위시하여 어린아이를 업은 이성례 마리아와 부인들이 뒤를 따르는 40여 명의 교우들이 행렬을 지어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 하였다. 순교자는 이런 육체적 고통 보다 더 큰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로부터 오는 고통이었다. 갓난아기는 젖을 달라고 우는데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꿋꿋이 버티어 나가다가 남편이 옥중에서 죽고 어린것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져 자신의 본래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해야겠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순교자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형조에 이르자, 이성례 마리아는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현경련 베네딕다 등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순교자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배교를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냈으며, 그곳 옥중에서 자신의 막내아들이 기아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보았다.
유리걸식하는 네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 둘째 아들 최의정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39년 12월 27일(양력 1839년 1월 31일), 마리아는 동료 신자 7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녀들 때문에 배교를 하고, 순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위해, 처형 전날 어린 자녀들이 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를 찾아갔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청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망나니는 청룡도로 중죄인의 목을 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는 땅 위에 떨어진 목을 치켜들어 입회한 관리에게 증명해 보여야 그의 임무가 끝난다. 순교자가 많은 날은 무쇠팔뚝의 망나니도 힘이 달려 몇 번이나 난도질해야 했다고 한다.
수십 년 전 영세 후 첫 성지 순례를 제천의 배론성지에 갔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03.01-1861.6.15, 향년 40세) 묘가 배론 성지(https://www.baeron.or.kr/treasure/grave)에 모셔져 있다. 그때 안내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사형 전 날 아이들이 망나니 집에 가서 빌었다고 한다. "제발 우리 엄마 목을 단칼에 잘라 주세요". 가슴에서 무언가가 퍽 올라오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감정을 잊을 수 없었고, 일생의 지침이 되었다.
성 홍병주 베드로
광암 이벽 등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에 기여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의 손자이며, 이튿날 당고개의 같은 형장에서 순교를 한 홍영주 바오로의 형님이다. 또한 유배형을 받아 광주목에서 30년이 넘도록 긴 유배살이를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다시 문초를 당하고 순교한 홍재영 뿌로따시오의 조카이다. 조부의 순교 이후 풍산홍 씨 족보에서조차 파적 되는 파문의 형까지 받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히려 풍산 홍 씨 족보에 성인으로 기재되어 누대에 걸쳐 비워졌던 족보의 계보를 채운 것은 물론 존경을 받고 있다.
성인의 부친 홍빈영(기영)은 신유박해를 겪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부친이 죽음으로 지킨 신앙을 지켰다.
모방베드로 신부님 등 주교과 신부들이 들어와 사목활동을 하고, 성인은 내포지방의 회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박해자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피신하던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세 성직자의 순교 직후인 9월 말에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배교와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명과 함께 문초를 당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1839년 음력 12월 19일 사형언도가 내려졌다.
그리고 1839년 12월 27일(양력 1840년 1월 31일) 동료들과 함께 당고개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형장으로 갈 때에 성인은 소를 모는 소리를 내며 주님 대전에 갈 길이 바쁘다고 재촉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한다. 순교 후에 교우들이 시신을 왜 공개에 장사 지냈으나 추운 겨울밤 땅이 얼어 깊게 매장하지 못하였다. 후에 다시 김 프란치스코와 현석문 가롤로, 최 비리버 등이 땅을 깊이 파서 매장하였다. 그 후 묘의 위치를 찾지 못하였고, 유해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 홍영주 바오로
자신보다 하루 앞서 같은 장소에서 순교를 한 성인 홍병주 베드로 성인의 동생이다. 이 두 형제는 언제나 함께 생활하다가 순교했다. 그러기에 문헌상에도 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항상 서로 권면하고 성실히 믿었다.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그들의 열성(熱誠)과 재주에 감동하여 여러 차례 중요한 일들을 맡겼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피신을 하게 되었을 때 바오로 형제는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를 집에 모시고 보살폈다. 물론 이렇게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 발각되면 목숨을 잃는다. 배교자 김여상은 체포해야 할 대상자의 명단에 그들 형제의 이름을 올려놓았고, 그 해 9월 그들을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포도대장은 이들 형제를 공범이라 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고 교우들의 명단을 대라고 독촉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을 배반하는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포도대장은 이들 형제의 신앙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을 형조(刑曹)로 이송하였다. 당시 형조 판서 홍명주(洪命周)는 바오로의 친척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그들을 신문할 권리를 넘겨주면서 어떻게든지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은 언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판서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은 형리들을 시켜 갖가지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배교시키려고 하였다. 형리들은 그들과 같은 옥에 있는 도적과 살인범들로 하여금 포악하게 다루도록 하기도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 형제에게 사형을 내리게 되었다. “홍병주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리를 배운 만큼 가장 깊이 그것에 빠져 있었으며, 동생 홍영주는 천주교 교리를 가도(家道)처럼 여기고 십자가상을 가리켜 대군(大君)이라 섬기며, 죽을지언정 배교할 수 없노라고 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보고를 하였고 사형 언도가 내려졌다. 다만 한 가족을 같은 날 처형할 수 없다는 법률에 따라 형님인 베드로는 음력 1839년 12월 27일(양력 1840년 1월 31일)에, 그리고 바오로는 이튿날 음력 12월 28일(양력 1840년 2월 1일) 당고개(當峴)에서 참수 치명하여 순교했다. 나이 39세였다.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하신 손경윤 제르바시오의 딸로서 자신보다 한 달 먼저 순교하신 최창흡 베드로의 아내이다. 그리고 성녀보다 하루 뒤에 같은 형장에서 순교하신 최영이 바르바라의 어머니이며, 조신철 카롤로는 성녀의 사위로서 최 바르바라의 남편이다.
성녀가 태어나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많은 교우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당하였고, 교회는 지도자 없이 뿔뿔이 흩어져 회생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이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교우들은 부녀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고, 남자들은 글조차 읽을 수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성녀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자신과 더불어 옥중 생활을 하다가 순교한 맏딸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와 옥중까지 데려갔다가 친척의 손에 넘겨 거두어 주기를 부탁한 두 살짜리 막내딸 막달레나 만이 살고 다른 자녀들은 일찍 잃은 아픔을 겪었다.
성녀는 기해박해가 일자 남편과 함께 사위 조신철 가롤로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일가족 모두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고 옥중고초를 겪게 되었다. 사위 조신철이 9월 26일에 순교하면서 차례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성녀의 남편 최 베드로는 형장으로 향하기 전에 부인에게 전해 달라는 쪽지를 옥리에게 부탁하였다. 그 내용은 “눈물과 고통은 육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순교하게 됨을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면서 나의 뒤를 따르기 바란다. 천국에서 만납시다.”였다.
배교를 강요하는 포도대장의 호통에 오히려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게 주신 천주의 것이니 그분만이 아무 때라도 그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재하시는 천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또한 문초로 인한 상처와 이와 벼룩 등으로 견디기 어려운 옥중 생활에 대하여도 “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내 힘만 가지고는 다만 일각이라도 벼룩이나 이가 나를 뜯어먹는 것을 참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서는 참아 받을 힘을 내게 주십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옥중에 데려온 두 살짜리 어린 딸에 대한 모성에 호소하여 자식을 살리고 자신의 생명도 보존하라는 회유에 “주께서는 생사의 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의 생명은 천주께 달렸습니다. 그분을 거역하면서까지 내 생명을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천주님을 위해 죽으면 천주께서 내 딸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하면서 모정의 유혹으로 신앙을 잃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막내딸을 친척의 손에 맡겼다.
형조로 이송되어 역시 배교와 동료 교우들을 발고하라는 문초를 당하였으나 극심한 형고를 이겨내었다. 마침내 12월 11일 형조에서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는 온몸이 사학에 젖었고 온 집안이 이에 감화되었으며 결코 배교하지 않고 죽기를 원하므로 일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기에 결안하여 시행하겠노라는 보고를 하였고, 19일 결안이 내려 12월 27(양력 1840년 1월 31일) 여섯 명의 동료 교우들과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 치명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당시 성녀의 나이는 39세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 이문우 요한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외증손으로 경기도 이천의 광주 이 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5살 때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가 양자로 삼아 서울에서 자랐다. 양모의 간곡한 권유로 혼인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가장으로서의 좋은 모범을 보이며 살았다.
그러나 성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자,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수덕생활에만 전념하며 교우들을 도와주는데 헌신하였다. 모방 신부의 복사가 되어 전교 활동을 도우며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의 뜻에 따라 성직을 준비하는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배웠다.
1839년 박해가 일어 앵베르 주교와 자신이 모시던 모방 신부과 샤스땅 신부가 관에 갇히게 되고 교우들이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옥중의 교우들을 도와주었다. 주교과 신부들이 순교하자 7~8명의 교우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의 시신을 찾아 노구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시골로 피신하기 위하여 서울의 교우 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낼 때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천주께서 나를 부르신다.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대관께 잘 여쭈어서 네 목숨을 구해줄 터이니 깊이 생각해 보아라. 아무 이유도 없이 저 무식쟁이들 모양으로 죽고자 한단 말이냐며 배교를 강요하였다.
성인은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함은 인지상정이거늘 어찌 즐거운 마음으로 죽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 법에 복종하면 우리의 대군대부이며 하늘과 땅과 천사와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를 배반하여야 할 것이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인께서 지금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는 벌써 오래전부터 깊이 생각하고 결심한 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또한 성인은 옥중생활로 나약해진 교우들의 신앙을 강하게 이끌고 그들의 신앙을 돕기 위하여『옥중제성(獄中提醒)』이라는 천주가사를 지어 함께 기도하게 하였다. 형조로 이감되어 다시 문초를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성인은 양부모와 교우들에게 옥중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옥중 교우들의 신앙생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주님께 대한 사랑, 교우들이 주님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옥에 들어온 지 거의 3개월이 되던 1840년 2월 1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에 교우들이 그의 시체를 찾아 장사 지낼 때 그 시체에 빛이 났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4
주변 풍경
옛날 성지 입구에 경의선(용산~신의주)이 지나갔다. 경의선 숲길에 용산에서 가좌까지 지하화 되어 지상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철로와 열차를 전시해 놓았다.
<참고 자료>
-. 당고개순교성지 팸플릿
-. 당고개 순교성지 홈페이지 (www.danggogae.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