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명성황후의 격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상갓집의 개처럼 행세하며, 조선 조정을 손아귀에 넣고 흔들던 세도가 안동 김 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중적인 생활을 했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명복을 조선의 왕 고종(高宗)으로 만들었다. 오늘(2025.03.08, 토 맑음)은 김동인 소설 “운현궁의 봄”의 실재 장소를 탐방한다.
운현궁의 유래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에 있는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2세까지 살았던 집이며, 10여 년간 섭정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저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후 왕도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실행하였으며,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곳이다.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더욱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 앞에 있던 고개 이름에서 유래했다.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의 거처를 본궁이라고 하였다. 운현이라는 지명에 유래하여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 위하여 최상급의 가마 행렬을 갖추어 흥선대원군 사저에 갔을 때 대원군은 위엄 있는 자세하고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고종, 12세)은 천진스러웠다고 한다.
운현궁의 규모
주요 건물들은 고종 원년(1864년)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고종 6년(1869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다. 지금은 소유자가 바뀐 영로당도 운현궁의 일부였다.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1912년에 세운 양관도 운현궁의 일부였다.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에는 4개(경근문, 공근문, 정문, 후문)의 대문이 있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이 있었다.
운현궁의 중심 건물인 노락당에서 1866년(고종 3)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치렀다. 당시 가례 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 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며 국정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대원군이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 씨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어 은둔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대원군과 운현궁
운현궁은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왕궁과도 같았다. 대원군이 하야한 이후 운현궁도 위용을 잃었다.
대원군이 다시 집권한 것은 2차례 있었다. 처음은 임오군란 직후 33일간(1882.7.23. ~ 8.26.)이었고, 두 번째는 동학혁명 당시로서 약 4개월간(1894.7.23. ~ 11.22.)이었다.
2차례 모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신분에 관계없이 불만 세력을 포용하는 인재 등용 원칙이 일관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학혁명 당시의 대원군은 이미 지방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 씨 정부나 청·일 측이 동학군의 봉기를 폭동으로 보았을 때도 대원군은 동학군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쁘게 보지 않았다.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재집권할 당시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임오군란 수습조건으로 일본이 부당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을 때, 또 조선 정부가 양보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강온양면 정책을 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대원군이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과의 협조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교전 중이던 청이나 내정개혁을 강요받던 조선 측 입장에서 보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러시아 측과 접촉하여 러시아를 통하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러시아는 은밀히 청·일을 중재하고 있었고 3국 협동론을 제시하여 조정에 관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국이나 미국과도 외교적 접촉을 시도하였다. 영국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대원군이 조선주재 각국 공사들과의 면담을 통한 적극적인 외교를 시도해 보았지만, 민 씨 정부의 무능과 타락이 한계에 이른 상태에서 조선 정부에 대한 국제적 협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운현궁의 건물들
수직사 (守直舍)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이다.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사용하였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운현궁의 규모가 커졌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었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노안당(老安堂)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었다.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이다. 노안당은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노락당 (老樂堂)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안채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 규모는 궁궐 수준으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전체적인 건물은 一자형 평면의 건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1866년 (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렸다.
남쪽으로는 노락당 남행각이란 복도를 거쳐 노안당으로, 북쪽으로는 노락당의 북행각으로 연결된다. 현재 덕성여대 대지 내에 있는 양관 방향으로 연결되었던 복도각 중 11칸이 동쪽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서쪽 온돌방의 굴뚝은 전벽돌 대신 붉은 벽돌을 쌓았고 상부의 연가가 하나 있다.
이로당 (二老堂)
이로당은 운현궁의 별채로 쓰인 건물로서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인 여흥 민 씨를 의미한다. 앞쪽에 자리한 노안당과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 6년)에 지어졌다.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ㅁ자형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이다. 중정, 서측면, 동측면, 배면에 각기 하나씩 모두 4개의 굴뚝이 설치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의 가례 올릴 때 착용한 예복과 운현궁의 각종 생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은 복제품이고, 실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기획전시실
운현궁의 인물
흥선대원군 (1820년 ~ 1898년)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였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 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 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 그리고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 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잠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여흥부대부인 민 씨 (1818년 ~ 1898년)
조선의 왕족.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어머니다.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일찍이 가톨릭을 믿었다. 1863년 둘째 아들이 임금이 되자 운현궁(雲峴宮)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1866년 흥선대원군이 고종비(妃)를 간택할 때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자신의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다.
천주교 신자인 민 씨는 1887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자, 1896년 10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주교(主敎) 뮈텔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남진(南進)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종 (1852년 ~ 1919년)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다. 1866년 명성황후와 결혼하였다.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경운궁 즉조당에서 대한제국 초대황제로 즉위하였다.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맺어졌다.
명성황후 (1851년 ~ 1895년)
조선 말기 제26대 왕 고종의 비(妃)며 명성황후라 칭해졌다.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이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이 빈한하여 고생이 많았으나,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였다. 1866년(조선 고종 3년) 외척 세도정치의 세력 기반을 없애기 위하여 고종 비의 물색에 골몰하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 씨의 추천으로 16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의범절이 밝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세력을 잃게 되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자 친로책(親露策)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1895년 9월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친로책과 정면충돌을 하였다.
명성황후의 친로책은 일본을 자극하였으며, 1895년 10월 8일 친일파와 일본공사가 보낸 20~30명의 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명성황후로 추책 되어 남청량리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에 이장하였다. 경복궁 깊숙한 곳 구 민속박물관(한동안 전승공예관으로도 사용) 오른편에 명성황후 조난비가 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
명성황후는 예의범절이 밝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궁녀 이 씨가 서자 완화궁(完化宮)을 낳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대단히 기뻐하자 서운해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과 실책에 대하여 대원군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모았다. 명성황후가 1874년(조선 고종 11년) 왕자 척(拓)을 낳았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척족 일파가 득세하여 집권하려는 낌새를 눈치챈 흥선대원군은 완화궁을 장자로 하여 태자(太子)로 정하려 하였다. 이것이 갈등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에 분개한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 본격적으로 등을 지게 되었다. 원로(元老)인 이유원(李裕元)을 북경에 보내어 왕자 척(拓)을 정자(正子)로 승인받았다. 흥선대원군의 내치가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점을 보고 척족과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하였다. 나아가 흥선대원군의 장자 이재면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最應)등의 지원을 얻으며 명성황후의 세력을 더욱 키워 갔다.
1873년(조선 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고종은 대외 개방주의를 내세워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안으로는 흥선대원군 내치를 시정해 나갔다. 명성황후 중심의 일족들이 궁내의 요직을 차지하자 흥선대원군과의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 1882년 임오년에 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는 간신히 충주목 민은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을 하고 명성황후가 죽은 것으로 잘못 판단하여 명성황후의 장례식까지 치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갔다. (운현궁 홈페이지 참조)
운현궁의 주인들
1대 이하응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순조 20년∼고종 35년)
2대 이재면 (1845년 ~ 1912년) 완흥군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자
3대 이준용 (1870년 ~ 1917년) 영선군 이준용은 이재면의 장자.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4대 이우 (1912년 ~ 1945년) 흥영군 이우
5대 이청 (1936년 ~ )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이 되고 고종으로부터는 4대손이다. 외모라든가 풍기는 모습이 고종을 닮았다. 1993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리 운영하게 되었다.
쇄국정책의 결과
외국과 왕성한 교역통상을 전개한 고려와는 달리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와 폐쇄적인 사대교린관계만을 유지하였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오직 조선만이 세계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대원군은 중국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봉기 또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침공 등의 사건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된 것은 문호를 개방한 때문이라 믿었다.
때문에 조선왕조를 수호하는 방법은 국내 인민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원군은 집권 첫 시기부터 청나라와의 사대적 외교관계 이외의 모든 대외관계를 차단하였다. 대원군은 1866년(고종 3)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당시 우리나라에 잠입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였다. 잇따라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조선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외국의 선진 과학기술을 섭취하여 나라의 부강 발전과 근대화를 실현시켜 외래 침략자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렇듯 중대한 민족적 과업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쇄국하는 길만이 봉건왕조를 수호하는 것으로 알고 쇄국정책에만 완고하게 매달려 국제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일본의 개항 시기
1854년 미국의 해군 제독 매튜 페리가 7척의 근대식 군함을 이끌고 개항을 강요했다. 일본은 굴복했다. 일본과 미국 사이에는 불평등조약인 미일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졌다. 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 2개 항구의 개항, 관세 철폐, 치외법권 인정 등이 강제됐다. 1844년 개항한 청나라에 이어 일본도 서양 중심의 세계 질서에 억지로 편입되었다.
일본 이즈반도 문학기행 탐방하였었다. (https://brunch.co.kr/@jylee2020/27, 2016.12.31) 일본 이즈반도의 시모다항에 개항을 요구하기 위하여 나타난 선단(船團)은 대포까지 장착되어 있는 당시로서는 거대한 군함이었다. 일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두 번째 때는 2450톤급이 포함된 대형 군함이 7척인 데다 병력 규모가 1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페리의 군함을 “쿠로부네(黑船)”라고 불렀다.
조선의 개항 시기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에서 12개 조로 이뤄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맺고 부산을 개항했다. 이 조약으로 조선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들어가게 됐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1876년 다시 군함을 몰고 와 개항을 강요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개항 시에 수모를 당했던 수법을 배워 조선에 그대로 써먹었다.
대원군의 집권 시기와 조선의 멸망, 새로운 희망
1864년 1월 21일~1873년 대원군 집권 시의 쇄국정책과 일본보다 늦은 약 20년 차이의 개항시기 지연으로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과 늦은 개항은 우리에게는 너무 뼈아프고 아쉽다. 정치가는 사욕보다 대화와 타협으로 국가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청사진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우리의 손으로 펼쳐진다. 특히 우리의 젊은 세대와 꿈나무들에게 기대가 크다.
<참고 자료>
-. 운현궁 홈페이지 : https://www.unhyeongung.or.kr/
-. 운현궁 팸플릿
-.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