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9일 토요일, 일본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새벽에 12년차 근무지 요코하마에서 교토를 향하여 출발하였다.5월1일2일을 제외하고7일까지 연휴라 모두들 들뜬기분을 느꼈다.
교토는 요코하마에서 뭐낙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신칸센이나 국내선 항공기를 타야 하는 거리다.28일 오후 8시경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가다가 사쿠라기쵸 역 앞에서,갑자기 발길을 신요코하마역으로 돌렸다.5월3일날 출발하는 신칸센을 예약할 작정을 하고 갔다.막상 예약접수창구에 도착하고 보니,마음이 바뀌었다.쇠뿔은 단김에 빼기로.내일 첫차로 출발하기로.해서6시 첫차로 출발,8시 교토 도착 그리고 당일 막차9시40분 것으로 예매표를 끊었다.
약 400키로 거리.차비는 왕복26,590엔 비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티켓은4장을 주었다.달리면서 풍광을 즐기기 위해 창문쪽으로 표를 달라고 했는데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편도에 각각 2장이 사용 되는데,두 장을 동시에 출입 체크기에 넣는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따로 한 장씩 넣으면 출입문 체크 기기에서 빨간불과 경고음이 들린다.
교토(京都)란? 일본 혼슈 중서부 , 인구 1,474,735명 , 면적 827.83㎢ , 산업도시 오사카[大阪]에서 북동쪽으로 47㎞, 문화도시인 나라[奈良]의 북쪽으로도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으며 긴키[近幾] 지방의 중심도시이다.
794~1868년까지 1,000년 이상 왕궁이 있던 일본의 수도였으며, 불교문화와 직물업·요업 등의 전통산업을 선도하여 왔다. 현재에는 오사카·고베와 함께 게이한신 공업지대(오사카·고베·교토를 포함하는 일본 제2의 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이자 국제적인 문화·관광 도시이다.
교토는 교토 분지(야마시로 분지)의 북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삼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사카 방면의 남서쪽과, 나라로 이어지는 남쪽만이 트여 있어 철도·도로 등이 집중되어 있다. 이 지역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완만히 낮아지는 지형으로 평균 해발고도는 55m 정도이다.
시의 북서쪽에는 아타고 산[愛宕山:924m]이, 북동쪽에는 유명한 엔랴쿠 사 [延曆寺]가 있는 히에이 산[比叡山:848m]이 있어 자연적인 관문 역할을 한다. 히에이 산의 동쪽에는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 호[琵琶湖:672㎢]가 있어서 교토의 용수나 발전 등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시의 서쪽에는 가쓰라가와 강[桂川], 북동쪽에는 가모 강[賀茂川], 남쪽에는 우지 강[宇治川]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들은 시의 남서쪽에서 합류하여 요도가와 강[淀川]을 이룬 후에 오사카만 [大阪灣]으로 흘러들어 간다.
기후는 일본 내륙지방의 전형적인 기후로, 덥고 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로 특징지어진다. 연평균 기온은 15℃, 가장 더운 8월 평균기온은 27℃,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은 3℃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575㎜로 비는 6월이나 7월에 3~4주간 계속되는 우기에 집중된다.
2. 출발
날씨는 맑았고,기온은 최저13도 최고20도정도,새벽4시30분에 일어나서 이세자키조자마치 지하철역에서 첫차5시28분 타고신 요코하마역에 도착하니47분.시각표대로 정확히19분 걸렸다.처음 타보는 신칸센이라 역내와 기차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기차가 속도를 내자 창밖 봄 풍경이 주마간산처럼 지나갔다.
좌석을1줄은3석 다른 한 줄은2줄, 가끔씩 한국 열차 내에서처럼 홍익 수레에 간단한 커피 음료수를 싣고 왔다갔다하며파는 아가씨 는 다른 칸으로 통하는 출입문에서는 빠 짐 없이 꼬박꼬박 머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했다.비단 홍익 아가씨뿐만 아니라 모든 역무원들이 그러했다.오다와라,공업지역 나고야를 거처 교토역에 도착하였다.
3. 탐방코스
최고 시속320키로로 달려서 교토역에 도착하여한 동안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지도를 펴놓고 나침판을 가지고 역 밖으로 나와서100미터 정도 가면서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교토타워가 보이지 않았다.그곳이 출발점이 자랜드 마크였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아뿔싸 반대 출입구로 나왔던 것이었다.
이번 여행은 역사탐방을겸한관광으로중요한 필수코스가 두 군데 있었다. 임진왜란 때 우리 조선군과 백성의 귀와 코를 잘라서 묻었다는 귀무덤과 상지대의 민족 시인 윤동주, 시인 정지용의 시비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각사,은각사,옛날 왕궁은 덤으로 가보는 것이었다.
결국 탐방했던 곳은 교토역->교토타워->동본원사(히가시 혼간지)->귀무덤->풍국사(도요토미 히데요시 있다는 곳)->교토 국립박물관(산쥬산겐도)->청수사(키요미즈데라)->평안 신궁(헤이안 신궁)->철학의 길->은각사->교토대학->상지대->교토 교엔(왕궁)->금각사->교토역이 되었다.5시30분경에 교토역에 도착하여 막차 티켓을 오후6시18분 것으로 바꾸어서 출발하여8시18분에 신요코하마역에 도착하여 마무리하였다. 자세한 풍경은 밴드의 사진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교토 지도를 참고로, 상기 장소를 폭풍과 같이 둘러보았다. 특히 상지대 가는 길은 비바람이 몰아처, 자칫
지나칠 뻔했다. 일본 대학은 우리나라 대학들 캠프스(100~200만 평이상)처럼 넓지 않다. 상지대학도 1/10 규모라고 생각된다. 그 좁은 캠프스에 상지대 출신 한국인 시인 2명의 시비가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림에도 불구하고, 탐방 기록물 보관 플라스틱 상자를 찾아 뚜껑을 열고 두 분 시인을 생각하며, 나의 방문 사실을 기록했다.
4. 귀무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의 표시로 조선군과 조선인12만6000명의 귀와 코를 베어 보여주고,전국을 순회시킨 후 묻었다는 천인공로할,우리로서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더구나 혼을 위로는 못할망정,그기를 눌렀다는5층 석탑은 정말 잔인함의 극치였다.그곳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모한다는 사당에서 불과100미터 밑 의지 근거리에 있다는 것이 여행 내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조상님들의 명복을 빌었고,아무리 몇 백 년 지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분들을 아직도 그런 곳에 방치한다는 것이 후손 된 도리로서 용납되는 일인지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과연 우리의 선대 위정자들은 무엇을 하였는지,오늘날 역대 정부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부끄러움과 분노심마저 일었다.역으로 조선인들이 과거 일본인들의 귀와코를 베어다가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면 일본인들이 방관만 하고 있었을까 하는 역발상을 나만 하였을까?
앞으로 정부는 귀무덤의 반환을 일본 정부예요 구하여,그곳에 묻힌 조상님들을 다시 모셔와야 하는 범국민적인 운동을 펼쳐서 관철시켜야 한다. 그런 비인간적인 상황을 방관한다면 어쩌일국의국가라고 할 수가 있을까?어서 하루빨리 모셔와서 국립묘지에 다시 모셔져야 한다.
일본 정부가 거부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킨다고 회유 협박하여 일본인이 미개한 야만 민족이라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알려서 조속히 타결 지어야 한다.어찌 위안부상만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대상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남북한이 공동 대응하여 휴전선 판문점 평화의 구역에 모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청수사,은각사,금각사에서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을 보았는데,귀무덤에서는 나만 혼자 있었다.왜 후 손들은 외면 하려고 하고,도피하려고 하고, 회피하려 하고, 수수방관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교토 여행 오는 한반도 사람들은 필히 이곳에 와서 우리 조상님의 처절했던 삶을 되새기고,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당이란 풍국사 앞에서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어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경이 일었다.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가문이 멸문되었으니,죗값은 일부나마 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그런 반인륜적인 인물의 후예 나치의 히틀러 같은 존재가 아닐까?
5. 도시샤(同志社)대학:윤동주 시인,정지용 시인
교토에 있는19세기 후반에 설립된 가톨릭대학으로,정지용(鄭芝溶, 1903~?,영문과), 윤동주(尹東柱, 1917~1945,영문과)의 시비가 교내에 있으며,붉은색 벽돌로 고딕양식의 건물5채가 있는 학교다.
정지용은 홍사용 · 박종화 · 김영랑 · 이태준 등은 뒷날까지 그와 가까이 지낸 문우들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3년 4월 장학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정지용은 이 학교 재학 중 〈압천〉, 〈향수〉, 〈카페 프란스〉 등 빼어난 시 20여 편을 썼다.
이런 연관 관계가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었던 윤동주의 대학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서 귀무덤에 묻히신 고국을 그리워하는 원혼들에게 바친 시가 향수가 아닐까?압천이 아닐까?서시가 아닐까?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수없이 해보았다. 귀무덤과 학교는 불과8키로 정도 떨어져 있기때문이다.
윤동주는 장준하, 문익환, 정일권과 친구였다.그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 정지용이 저명한 민예운동가이자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구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로부터 영문학을 배운 학교다. 야나기 교수는 조선의 전통공예를 일본에 소개하는 한편 조선 지배를 강화하는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했던 인물이다. 재학 중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2년형을 선고받고,후꾸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고,그의 무덤은 고향 만주 용정에 있다.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압천(鴨川)
압천(鴨川) 십리(十里)ㅅ벌에해는 저믈어…… 저믈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쌍 떠ㅅ다,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鴨川) 십리(十里)ㅅ벌에해가 저믈어…… 저믈어……
한국 현대시 사상 기념비적인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정지용(鄭芝溶, 1903~1950)은 1930년대 문학의 주요 흐름 어느 곳에나 그늘을 드리우면서도 역량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특정 집단 속에 잘 꿰어 맞춰지지 않는 시인이다. 그의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향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지용은 1903년 충북 옥천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약상을 경영하며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밀어닥친 홍수로 가세가 기울면서 어린 시인은 옥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이때 4년 가까이 산천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몸으로 겪은 고향의 갖가지 풍습은 감수성 짙은 그의 소년기에 깊이 각인되어 문학에 대한 꿈으로 익어간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
정지용은 1918년 4월 휘문고보에 입학하는데, 당시만 해도 웬만큼 부유한 집이 아니고서는 서울 유학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지용의 서울 유학은 그의 뛰어난 재기를 눈여겨본 가까운 친지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실현된 것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1학년 때 ‘요람’ 동인을 결성해 동인지를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 부장을 맡는다. 이어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한다. 홍사용 · 박종화 · 김영랑 · 이태준 등은 뒷날까지 그와 가까이 지낸 이 시절의 문우들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3년 4월 장학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들어간다. 1926년 유학생 회지 『학조』 창간호에 그는 시 「카페 프란스」 · 「슬픈 인상화」 · 「파충류 동물」을 비롯해 시조와 동요 등을 발표, 문학의 범주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시험한다.
그는 신선한 감각으로 근대 풍물과 이국 정서를 화폭에 담은 듯한 시들을 발표한다. 곧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정지용은 이듬해 『신민』과 『문예시대』에 「홍춘」 · 「따리아」 · 「산엣색시 들녘 사내」 · 「갑판 우」 등을, 『조선지광』에 「바다」 · 「향수」 등을 잇달아 쏟아낸다. 또 당시 일본 시단을 대표하던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가 주관하던 잡지 『근대 풍경』에 투고한 시가 호평과 함께 크게 실림으로써 일본의 문단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
1929년 3월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에 관한 논문을 내고 대학을 졸업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심취한 것은 인도의 타고르와 자신을 뽑아준 기타하라의 시, 중국의 한시 같은 동양 사상에 바탕을 둔 시였다. 그는 귀국한 뒤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 교사로 근무한다. 그런데 기초 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는지 종종 학생들에게 신경질을 부려 그에게는 ‘신경통’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1930년 박용철 ·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이 된 그는 『시문학』 창간호에 「이른 봄 아침」 · 「경도 압천(京都鴨川)」, 2호에 「바다 2」 · 「피리」 · 「저녁 햇살」 등을 발표한다. 이런 시에서 정지용은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영문학에 대한 소양과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을 세련된 시어에 담아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감각적이고 선명한 이미지와 간결하면서도 상징성 있는 언어로 시단의 눈길을 끈 정지용은 1933년 김기림 ·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에 가담한다. 그는 곧 구인회의 회지 『시와 소설』에 관여하며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한편, 『가톨릭 청년』의 문예란 편집을 맡고 이 잡지에 방제각이라는 세례명으로 「은혜」 · 「별」 · 「임종」 · 「불사조」 같은 신앙시를 다수 발표해 종교에 심취한 자신의 일면을 문학적 질료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가톨릭에 몸담게 된 정지용은 방학 때 귀국해서 아버지에게 성당에 나가자는 제의를 하기도 한다. 독실한 신자이던 그는 뒷날 휘문중학에 다니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가톨릭 사제 수업을 권유하게 된다.
그가 편집에 참여한 『가톨릭 청년』은 제호와 무관하게 모더니즘 취향의 실험성이 강한 시를 쓰던 김기림 · 이상 등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정지용 자신도 이 잡지에 신앙시 외에 본명으로 「소묘」 · 「해협의 오전 두 시」 · 「시계를 죽임」 등 모더니즘 시들을 발표함으로써 문학과 종교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나온 『정지용 시집』은 그동안 여러 동인지와 잡지에 발표한 시편들을 다듬어 실은 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이양하의 「바라던 지용 시집」이라는 글은 이 시집에 대한 문단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시집 출간에 맞추어 1935년 12월 7일부터 11일까지 4회에 걸쳐 발표된 것으로, 서평이라기보다 정지용의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다룬 시인론에 가깝다.
정지용의 첫 번째 시집 〈정지용 시집〉
시단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마침내 우리의 욕심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처음 씨의 시집이 출판되었으매 우리는 한아름 꺾어 든 꽃다발처럼 씨의 시집을 그러안고 그의 아름다운 색채를 향기를 형체를 윤곽을 마음대로 그리며 엿보며 어루만질 수 있게 되었다. 이양하, 「바라던 지용 시집」, 『조선일보』(1935. 12. 8.)
이양하는 극채색의 언어로 정지용의 시집을 처음 대하는 감격과 기쁨을 한껏 드러낸다. 『정지용 시집』에 실린 작품 중에는 전통적 순수 서정성을 머금은 시도 보이지만, 바탕에 외래 취향이 깔려 있는 시도 적지 않다. 첫 시집을 펴낸 이후 정지용은 동양적 세계와 자연에 한결 심취하게 된다. 「옥류동」 · 「비로봉」 · 「장수산」 · 「백록담」, 『동아일보』에 연재한 「여창 단신(旅窓短信)」 등은 여백의 미를 살린 산수화 같은 느낌을 주는 시편들이다. 그는 이런 면모를 살려 1939년 2월 이태준이 발간한 종합 잡지 『문장』에 「장수산 1 · 2」와 「인동차」 등을 발표한다. 그는 이 잡지의 시 부문 심사 위원을 맡아 신인을 발굴할 때도 의도적으로 서구의 소재나 어휘를 사용한 것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고 꼬집어내서 탈서구적 취향을 더욱 굳힌다.
『문장』을 통해 수련을 쌓고 정지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조지훈 · 박두진 · 박목월 · 김종한 · 박남수 등은 뒷날 한국 시단의 기둥들로 성장한다. 이 시인들은 정지용에게서 얻은 양분을 해방 뒤 후학들에게 전해준다.
1941년 정지용은 ‘문장사’에서 또 한 권의 시집 『백록담』을 펴낸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행간마다 자연의 신비에 대한 경이가 배어 있는, 남과 북으로 이어진 정지용의 고단한 여정이 시편으로 맺힌 결정체다. 명성이 높아지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다투어 그의 국토 순례를 지원하며 기행문을 쓰게 하는데, 이때의 체험이 무르녹아 나온 것이 『백록담』이다.
이후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사회 상황이 악화되며 마지못해 일제에 협력하는 내용의 시를 내놓기도 하지만, 정지용은 작품 활동을 거의 중단한 채 한동안 침묵 속에 묻혀 지낸다.
정지용의 국토 순례 체험이 낳은 시집 〈백록담〉
자연의 신비에 대한 경이가 배어 있다. 해방 뒤 정지용은 휘문중학교를 떠나 이화 여전 교수와 ‘경향신문사’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여전히 시는 거의 쓰지 못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줄곧 순수 지향적 예술 세계를 고집하던 시인이 느닷없이 민족 문학 건설을 표방하는 좌익 단체인 ‘조선 문학가동맹’에 가입한 사실이다.
그의 이와 같은 선택이 이념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지용의 조선 문학가동맹 가입은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투철한 민족정신을 지닌 그가 해방 직전 일종의 ‘의전(儀典) 행위’로 미온적이나마 일제에 협력한 것에 대한 반성, 그리고 오랜 지기인 이태준 · 이병기 등과의 친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지만 몇십 년을 두고 사귄 우의는 끊을 수 없다.”는 그의 말에서도 이런 점은 드러난다.
그러나 정치 투쟁을 지향하는 동맹의 활동이 체질에 맞지 않아 정지용은 좀처럼 창작에 손을 대지 못한다. 이화 여전 교수와 『경향신문』 주간을 거친 그는 1948년 이후 『문장』의 속간호와 소년 잡지 『어린이나라』를 주관하던 중 1950년 6·25 때 납북된다.
1931년 정지용 부부와 장남 구관
정지용은 1920년대에 이미 모더니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작품을 선보인 시인이다. 그의 활동은 모더니스트의 기치를 내세우며 국내에 모더니즘을 끌어들인 김기림의 주지주의나 이미지즘보다 한 걸음 앞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1926년 학회지 『학조』에 발표한 「카페 프란스」 · 「슬픈 인상화」 · 「파충류 동물」, 『신민』과 『문예시대』에 발표한 「따리아」 · 「홍춘」 · 「갑판 우」 · 「바다」 같은 시들은 한국 모더니즘 시문학의 맹아 단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지용은 김기림과 달리 ‘사조나 이론으로서의 모더니즘’에 대한 자의식을 따로 갖지 않는다. 다만 감정 과잉의 시에 불만을 느낀 나머지 되도록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회화적 수법으로 시작(詩作)에 임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모더니스트 이론가인 김기림에 의해 그의 시 속에서 ‘선구적’ 현대성이 발견되고, 자연스럽게 모더니즘의 대표로 부각된 것이다.
첫째로 조선 신시 사상에 새로운 시기를 그으려고 하는 어떤 반역자들의 유일한 선구자인 시인 정지용 씨의 뚜렷한 발자취가 그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시 속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이었다.
김기림, 「1933년도 시단의 회고와 전망」, 『시론』(백양당, 1947)
2)윤동주(尹東柱, 1917~1945)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시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어둠 속에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거는 일이다. 창씨 개명과 국어 사용 금지, 강제 공출과 징병제 등으로 식민지 피지배의 ‘어둠’이 깊어갈 무렵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시인이 있었다. 나아갈 길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 속에서 언젠가 홀연히 닥칠 ‘아침’을 기다리던 그가 바로 윤동주(尹東柱, 1917~1945)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의 어둠 속에서 끝내 ‘아침’을 맞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맑은 영혼으로 자아를 응시한 시인 윤동주
윤동주는 불같이 행동하는 실천적인 인간형이 아니라 고요히 자아를 응시하는 내면적인 인간형에 속한 사람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며 패 · 경 · 옥과 같은 예전에 알던 이국 소녀들, 비둘기 · 강아지 · 토끼 · 노새 · 노루와 같은 순한 동물들, 그리고 프랑시스 잠 ·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보던 다정 다감한 젊은이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는 사람들이 호구지책과 안락한 생활, 사유 재산에 집착할 때 고요한 내면에 병균처럼 파고든 시대의 어둠을 조용히 응시하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씌어지는 것”조차 몹시 부끄러워한다.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이던 그는 해방을 불과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차디찬 이국의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윤동주의 육필 원고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명동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인 농촌으로, 1899년 바로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등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기독교와 교육,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던 곳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 학원 교사를 지낸다.
윤동주는 명동촌의 큰 기와집에서 자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서른 그루쯤 되는 살구나무와 자두나무가 있는 과원, 동쪽 쪽대문 밖에는 깊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그는 나중까지 잊지 않는다. 쪽대문 밖의 우물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보면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비치던 바로 그 우물이다.
그 사나이는 오똑하고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방울,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투명한 살결, 단정한 매무새를 한 미남 청년의 모습이었으리라. 귀족적인 풍모에 깔끔하면서도 맵시있는 멋쟁이였던 윤동주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소학교 시절에 문학과 만난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그는 나중에 일본 유학과 죽음까지 함께 하는 송몽규와 『어린이』 · 『아이 생활』 같은 소년 잡지를 구독하고 연극 활동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닦는다. 5학년 때는 송몽규와 함께 월간 잡지 『새명동』을 직접 등사판으로 펴내기도 한다. 이 등사판 잡지에 윤동주는 자기가 쓴 동시와 동요 등을 싣는다.
당시 윤동주를 비롯한 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는데,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주었다는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20여 리 떨어진 중국인 마을에 있는 소학교에 편입한다. 이곳의 학교에 1년쯤 다닌 추억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함께 시 「별 헤는 밤」을 낳는다. 다음 해인 1932년 윤동주는 고향 명동을 떠나 용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용정 은진중학교 시절에 윤동주는 폭넓은 활동을 한다. 교내 잡지를 발간하느라 밤새 원고지와 씨름하는가 하면 축구와 농구, 웅변에도 소질을 보인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 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을 어머니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2학년 때이던가,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한 일이 있어서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늘 걸려 있었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당시 간도 지방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도 부모를 설득해 1935년 9월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한다. 전학한 해에 그는 숭실중학 YMCA 문예부에서 발간한 『숭실활천』에 시 「공상」을 발표하고 여러 시집을 탐독한다. 1936년 1월에는 1백 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미처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실에서 하루 내내 시집 전체를 베껴 쓰기도 한다. 1936년 신사 참배 거부로 숭실중학이 폐교를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온 그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2년 동안 중학 과정을 더 밟는다.윤동주가 다니던 용정의 은진중학교, 나중에 대성중학교로 이름이 바뀐다.
고종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937년의 일이다.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숟가락」으로 당선된 바 있는 문인으로, 당시에는 꽤 알려진 이름이었다. 진학을 앞두고 윤동주는 문학 공부를 하길 원하지만 아버지 윤영석이 의학을 전공하라고 해서 한동안 갈등을 겪는다. 졸업반인 5학년 2학기부터 다음 해인 1938년 초까지 몇 달 동안 부자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윤동주가 식음마저 전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할아버지 윤하현과 외숙부 김약연이 나서 아버지를 설득, 마침내 윤동주의 문과반 진학이 이루어진다.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을 비롯해 손진태의 역사 시간, 이양하의 영문학 강의 등을 통해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민족의식과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강의가 없으면 주로 산책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정지용 · 김영랑 · 백석 · 이상 · 서정주 등의 시를 열심히 읽고, 외국 문인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 · 앙드레 지드 · 발레리 · 보들레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프랑시스 잠 · 장 콕토 등에 빠져든다.
책을 읽다가 답답해지면 황량한 서강 들판과 인적 없는 창내벌(지금의 창천동)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혼자 걸으며 시를 구상한다. 윤동주를 알던 이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에서 나온 윤동주와 함께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 연희전문 2년 후배 정병욱의 회고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우리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았어.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어. 세수는 골짜기 아무 데서나 하고.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조반을 마친 다음에는 학교로 나갔지. 하학 후에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충무로 일대의 책방들을 순례했어.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丸善), 군서당과 같은 신간 서점과 구서점들을 돌고 나서 음악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며 새로 산 책들을 펴보곤 했지. 가끔은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기도 하고. 다시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 책방을 순례하고 돌아오면 이미 어둑해져 거리에 전기불이 환하게 밝혀졌지.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1941년 일제의 혹독한 식량 정책으로 기숙사에서 나오게 된 윤동주는 넉 달쯤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다.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던 김송의 집에서 윤동주는 「무서운 시간」 · 「태초의 아침」 · 「십자가」 ·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을 완성한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그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필 시고집(詩稿集) 세 부를 만든다. 그는 세 부 가운데 한 부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연희전문의 영문과 교수인 이양하에게, 나머지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준다.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 다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그의 시고를 읽어본 이양하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한다. 「십자가」 · 「슬픈 족속」 · 「또 다른 고향」 등 몇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를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이양하의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에는 출판을 하지 않지만, 졸업 직후 용정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와 출판 문제를 의논하는 등 시집 출판에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 문제가 걸려서 출판 계획을 접게 된다.
결국 윤동주 생전에 시집 출판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뒤 윤동주와 이양하가 갖고 있던 시고는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된다. 나머지 정병욱에게 준 시고만 그의 어머니가 명주 보자기에 싸서 마루 밑 깊숙한 곳의 항아리에 감춰둔 덕분에 해방 뒤인 1948년 1월 30일, 드디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빛을 보게 된다.
〈서시〉를 비롯한 19편의 시가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육필 시고집을 그가 죽고 나서 해방 뒤에야 비로소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윽고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3년 7월, 여름 방학을 앞두고 그는 집에 전보를 치는 등 귀향 준비를 서두른다. 그러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윤동주가 사상범으로 특고 경찰에게 검거된 것이다. 교토 제국대학에 다니던 송몽규도 함께 잡혀 들어가는데, 이들의 죄명은 ‘치안 유지법’ 위반. 말하자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다만 송몽규는 한때 중국의 난징 쪽에서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적이 있고, 윤동주는 도시샤대학의 일본인 교수와 민족 문제로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긴 하다.
얼마 뒤 윤동주는 2년형, 송몽규는 2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년 간도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든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아버지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과 함께 시신을 넘겨받으러 일본으로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 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 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간도의 소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한 윤동주(앞줄 왼쪽)
그 얼마 전, 후쿠오카 형무소에 들어간 윤영석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기 위해 시약실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윤영석은 그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발견한다.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엽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균 실험을 했는데, 윤동주도 바로 그 실험에 이용되어 죽지 않았나 싶다.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던 송몽규도 그로부터 23일 뒤 윤동주의 뒤를 따른다. 방부 처리를 해놓아 윤동주의 주검은 말끔한 편이었고, 장례는 3월 어느 눈보라 치던 날에 용정 동산에서 치러진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산 시인 윤동주. 그의 시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식민지 피지배 현실이라는 테두리와 내면세계 사이에서 그는 심각한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의 시에 중요한 심상으로 등장하는 ‘우물’과 ‘거울’은 바로 개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종족과 역사라는 큰 틀에 비추어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기 응시와 자기 성찰의 매개적 상징물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일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끊임없이 윤리적인 자기완성을 꿈꾸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한 점의 욕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하던 청년 시인은 이렇게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처럼 떠나고 만다.
선언(宣言)
노동자(勞動者) 농민(農民) 제군(諸君)! 진보적(進步的) 지식 계급(知識階級) 제군(諸君)! 아세아(亞細亞) 십억만(十億萬)의 착취(搾取) 압박(壓迫) 침략자(侵略者)로서 군림(君臨)해 오든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최후(最後)의 심판(審判)의 날은 왓다. 36년간(三十六年間) 전 세계(全世界)에 가혹(苛酷)하기 그 예(例)가 없엇든 제국주의(帝國主義) 일본(日本)의 강제적(强制的) 지배(支配)와 노예적(奴隸的) 압정(壓政)에 신음(呻吟)하든 우리 조선 민중(朝鮮民衆)도 드듸어 자유(自由)와 해방(解放)의 날은 왓다. 그러나 제군(諸君)! 오늘 우리는 이 환희(歡喜)의 날을 마지하면서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절대 다수(絶對多數)인 노동자(勞動者) 농민(農民)의 완전(完全)한 해방(解放)을 목표(目標)로 한 과감(果敢)한 투쟁(鬪爭)이 남어 잇다는 것을 알어야 한다.
1935년(一九三五年)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야만적(野蠻的)인 강압(强壓)으로 조선(朝鮮) 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藝術同盟)이 해산(解散)되자 혹(或)은 지하(地下)로 혹은 비협조적(非協調的) 태도(態度)로 우리들의 문학 활동(文學活動)은 일시(一時) 정돈(停頓)되고 오직 일부(一部) 개종(改宗)한 반동분자(反動分子)만이 뿌르죠아 문학자(文學者)와 보조(步調)를 일치(一致)하여 왓다. 이리하야 과거(過去) 십 년간(十年間) 조선(朝鮮) 프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자연(自然) 침체(沈滯)의 비경(悲境)에 잇엇든 것이다.
그러나 8월 15일(八月十五日)을 계기(契機)로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살인적(殺人的)인 무거운 철쇄(鐵鎖)는 끈어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