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요코하마 돌아오지 못한 철새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美空云雀)!
일본 요코하마에 10여 년 근무 중에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인생을 노래한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의 가사에 매료되었다.
知らず知らず步いて來た 細く長いこの道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걸어왔네 길고도 좁은 이 길을
振り返れば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뒤돌아 보면 저만치 멀리 고향이 보이고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地圖さえないそれもまた人生
울퉁불퉁한 길과 굽어진 길 지도조차 없지만 그것 또한 인생
인터넷 검색 결과, 요코하마 일야공원묘지에 묻혀있다는 단서와 지도 하나로, 그녀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코난다이역(港南驛)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의 日野公園墓地입구에서 좌측 10시 방향으로 20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제일 높은 곳 부근에 그녀의 묘지가 있다.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주변에 묘지 비석을 세기는 점포들이 10곳 정도 있다. 즉, 항상 어떤 인생의 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의 묘지 규모나 크기는 똑같아, 처음 찾는 이는 현지인 혹은 그녀를 방문한 열혈 팬의 도움 없이는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비석에 다만 “미소라 히바리의 묘” 대신에 “가토 가(加藤 家)”라고만 적혀 있다. 놀랍게도, 방문 시 안내를 해 준 80대 할머니는 매일 그녀를 방문해 묘소 주변을 청소하고 분향한다는 것이었다. 분향 후, 내려오는 길에 멀리 오사카에서 온 방문객 20여 명을 만나 묘소까지 안내하여 주었다. 첫 참배 몇 년 후, 그녀의 열혈 팬인 한국 선배와 함께 엔카이 산(코난 다이~가마쿠라) 등산 후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장근석은 어릴 적, 전기불도 안 들어오는 농촌 시골, 김해에 살았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뜸북새가 논에서 울고 뻐꾹새가 숲에서 울 때 서울로 간 오빠는 기러기 오고 귀뚜라미 울도록 소식 한 장 없다. 말 타고 서울 간 오빠의 비단구두를 기다리던 소녀의 심정은 미소라 아버지 장근석의 고향, 한국에 대한 회귀 본능, 향수가 아닐까? 장근석은 고향에 여동생을 두고 한국을 떠나 간 후,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딸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도 부친의 한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국 공연을 위해 노력했으나, 한일관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철새라면, 본향으로 회귀에 실패한 철새, 뻐꾸기 뜸부기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리 모두가 아닐까?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고국인 한국과 고향에 대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아 선조의 뿌리를 찾고자 하였다. 가난하여 먹고살기 위해서 일본에 까지 와서 노동으로 생업을 삼은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한국을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다. 아버지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듯, 아버지의 나라에서 딸이 “돌아와요 부산항”을, 아리랑을, 도라지타령을 열창하고 싶어 했다.
1) 미소라 히바리의 강물의 흐름 같이 (川の流れのように)
https://www.youtube.com/watch?v=_JPKop-dYJ8
https://www.youtube.com/watch?v=-NhaC-a-oUY
2) 미소라 히바리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https://www.youtube.com/watch?v=5gVwJTZ-nAE
https://www.youtube.com/watch?v=-3gcw_2b-JQ
3) 미소라 히바리의 도라지 (トラジ)
https://www.youtube.com/watch?v=7HMnmfhGUY0
https://www.youtube.com/watch?v=g9lsZmO_wu4
그러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나라를 찾는 꿈은 생전에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정부와 국민 정서는 일제(日帝) 때, 한일합방(韓日合邦)에서 주었던 상처가 너무 깊어 과거사에 얽매여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까지 혐오(嫌惡)의 대상으로 간주, 한국 방문을 봉쇄한 것이다. 그녀의 생존 연대(1937~1989, 52세)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한국 남녀 가수들에게 문화교류의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 그 증거가 일본 열도를 한국의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 등이 유행하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 노래를 일본국에서 마음껏 부르도록 배려와 협조를 해주고 환호하는 데, 한국은 달랐다. 그 고통의 골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끝내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버지의 고향과 선조의 산소를 찾지 못하고, 52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뻐꾸기, 뜸북새 그리고 미소라 히바리. 특히 그녀의 아버지 장근석. 이들은 모두 우리의 자화상, 향수병에 걸린 철새가 아닌가?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그가 태어난 곳으로 두고 죽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1. 뻐꾸기
늦은 봄보리가 노랗게 익어 갈 때, 뻐꾸기 소리를 쫓아 산속을 헤맨 적이 있었다. 아무리 쫓아 가도 그 새를 직접 볼 수가 없었다. 다가가면, 벌써 사라지고 없었고, 보리밭 언저리에는 뽕나무만 잎사귀를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늙은 뽕나무에 달려 있는 오디만 실컷 따 먹고서는, 소매로 입언저리를 슥슥 훔쳤다. 손바닥과 입술은 오디의 색깔과 같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뻐꾸기가 보라색 새일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녀석들도 날씨가 서늘해지면 울음을 멈춘다. 그리고 훌쩍 따뜻한 남쪽 나라로, 바다를 가로질러 멀고도 험한 여행을 하는 여름 철새였기 때문이다.
2020.6월 환경부 소속 국립 생물자원관은 위치추적용 발신기 (5g, 새 체중의 5%)를 뻐꾸기 10마리에 부착하여 조사하였다. 10마리 중 6마리는 여름을 우리나라에서 보내고 8월 말~9월 초에 서해를 건너 이동을 시작했다. 중국 장쑤성, 미얀마, 인도를 거친 후 아라비아 해를 횡단해 10월 초 아프리카 동부에 도착했고 탄자니아, 모잠비크, 케냐 등에서 겨울을 보냈다. 동아프리카에서 월동한 6마리 중 3마리는 다시 올해 4월 중순에 우리나라로 이동을 시작했다. 작년 가을 이동과 유사한 경로를 따라 5월 말 지난해 한국에서 번식했던 지역으로 되돌아왔다.
뻐꾸기의 이동 거리는 왕복 2만 km 이상이었으며,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한 녀석은 2만 4,012km를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뻐꾸기가 아프리카로 갈 때와 한국을 찾을 때 이동 속도는 월동지를 찾을 때 보단 번식지를 찾을 때 더 빨랐다. 월동지로 이동하는 가을에는 평균 이동기간이 77일, 하루 평균 약 142km를 이동했다. 반면, 우리나라로 되돌아온 봄 이동기간은 평균 51일로, 하루 평균 약 232km를 이동했다. 우리나라에서 번식하는 뻐꾸기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아프리카까지 이동했다가, 한국으로 귀환 번식한다. 즉, 뻐꾸기의 고향은 한국이다.
2. 뜸부기
뜸부기도 여름철새다. 모심기를 하고, 초벌 김매기를 할 때쯤이다. 아버지가 일하는 들판에 중참으로, 어머니가 솥뚜껑을 뒤집은 뚜껑 위에 부친 호박전을 보자기에 쌌다. 막걸리 주전자와 같이 들고 논두렁길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뜸북! 뜸북!”하고 물을 튀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쫓아 가보면 이놈들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빠른지, 금방 없어졌다. 날아가는 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이놈은 어디에 살며 무엇을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이놈들이 병아리 만한 새끼를 여럿 거느리고, 바삐 다른 논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이사 중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은 아시아 동부에서 번식하고 필리핀과 등지의 동남아시아에서 겨울을 난다는 여름 철새인 것이었다. 물에 사는 닭이라고 물닭이라고도 한다. 뜸부기 몸길이는 40㎝ 내외이며 수컷이 암컷보다 크다. 수컷의 몸통은 회색빛이 도는 흑색으로 배에는 회색의 가로무늬가 있다. 부리는 황색, 액판(額板)은 붉은색, 다리는 황록색이다.
암컷은 수컷의 겨울 깃과 비슷한 색깔로, 머리 꼭대기는 어두운 갈색이고, 목 옆은 황색이 낀 붉게 녹슨 색이며, 턱 밑과 멱은 흰색이다. 몸 윗면은 어두운 갈색으로 엷은 황갈색의 폭넓은 가장자리가 있다. 몸 아랫면은 황색이 낀 붉게 녹슨 색 또는 크림빛의 흰색으로 배 중앙 이외에는 석판 갈색의 가로띠가 있다.
우리나라의 중부지역에는 6월 초에 수컷이 먼저 도래하고, 약 15일 후에 암컷이 모습을 드러낸다. 6∼9월에 벼 포기를 모아 둥우리를 틀거나, 논가나 평지의 풀밭에 둥우리를 틀고 3∼6개의 알을 낳는다. 식성은 메뚜기 등의 곤충 이외에 어린싹이나 풀씨도 먹는다. 10월 초순경이 되면 대부분 남하한다. 1980년대에 급감했고 1990년대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고향 찾기에 실패한 것일까?
3. 미소라 히바리 아버지, 장근석
장근석이 태어난 1919년은 3.1 운동이 일어나 한민족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치며 들고일어난
해였다. 얼마 후 그의 아버지는 장정치는 만주로 돈벌이하려 간다고, 신의주행 철도를 탔다가, 소식이 끊겼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즉,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혹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사업을 하여 한몫 잡았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래도록 귀향하지 않아, 호적에는 가위표의 붉은 줄이 찍혀 있었다. 철새처럼 어디로 인가 사라진 것이었다.
장근석은 홀어머니 밑에서 소학교를 겨우 마치고,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친척이 운영하는 생선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18세가 되던 해 1936년 장근석은 조그마한 밀항선을 탔다. 목숨을 걸고 밀항선을 탄 것이었다. 시모노세키 인근의 어느 어촌항에 일행 6명과 함께 숨어들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중간 연락책의 집에 보름 정도 머물다가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져, 소리 없이 떠났다. 떠났다기보다는 물이 땅바닥에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장근석이 일본 도쿄에서 조금 떨어진 요코하마에 나타난 때는, 이듬해 1937년 사쿠라가 만개한 어느 봄날이었다. 어느 생선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뼈가 빠지게 일하여, 마침내 그 점주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그 점주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그 점주는 장근석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그 딸의 이름은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였다. 장근석의 이름은 가토 마스 키츠(加藤 增吉)로 개명되었다.
4.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탄생
1938년에 둘 사이에 가토 히바리(加藤 和枝), 즉 일본 노래의 한 축인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가 에서 태어났다. 그 후 그녀는 세이카 학원(精華学園) 고등부를 졸업했다. 장근석은 그의 어린 딸,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를 사랑하였다. 어린것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엔카를 구성지게 잘 불러주어, 그의 향수병을 달래주었다.
엔카(演歌)는, 서양으로 부터 새로운 음악이 들어오면서 일본 민요의 변형 형태로 만들어진 음악이다. 일본 민요와 다른 점이 ‘라-시-도-미-파-라’로 구성되어 있어 비 평균 음계를 사용한다. 엔카와 한국의 트롯이 음악적으로 비슷하다. 일본 엔카와 한국의 트롯이 정서적인 면에서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동양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엔카가 널리 불려지게 된 것은, 봉건사회에서 근대화로 이동하는 시기에 서양 문물의 전달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가사 내용이, 일본 근대기에 공업의 발달로 농촌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농어촌의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타향살이하는 이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 사랑과 이별, 인생, 외로움과 술에 대한 노래, 항구 등의 정서를 대변하는 형태를 담고 있어 그것이 ‘엔카’라는 장르로 만들어졌다.
9세에 데뷔하여 주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대표 곡들로,‘북쪽 고향의 여인(北國의 女)’, ‘눈의 고향 (雪國)’등을 들 수 있다.‘북쪽의 고향의 구석진 술집에서는 여인이 날 위해 기다린다’, ‘눈 내리는 아름다운 고향에 가고 싶다’ 등의 가사 내용을 담은 엔카는 타향에서 사는 일본인의 고향 생각의 감초 역할한다고 볼 수 있다.
5.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의 전성기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 正文)씨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증언하였으며, 그 꿈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는 금지된 시기라 항상 아쉬워하였고, 일본어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해서, 영어로 곡을 불러 공연하는 것까지 검토했다.
7월에 “갓파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고, “애수 부두(哀愁波止場)”로 일본 레코드대상 가창상을 수상했다. 당시 인기 배우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성격차이로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 직후인 12월에 텔레비전 드라마 “야와라”(柔)의 주제가로 사용된 동명의 곡을 발표해 크게 인기를 얻어 180만 매의 음반을 판매하고, 일본 레코드대상을 수상했다. 곧이어 발표한 “가나시이 사케(悲しい酒)”는 145만 매, “맛카나타이요(真赤な太陽)”는 140만 매를 판매해 크게 인기를 끌었다.
6.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의 죽음
친어머니였던 가토 기미에(加藤喜美枝)가 사망하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우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인기 또한 전성기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떨어져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몸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제생회 병원에 급하게 입원, “만성 간염 및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수개월간 요양한 뒤 퇴원하고, 10월에 신곡 “미다레가미(みだれ髪)”를 레코딩 해 복귀했다. 5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복귀 콘서트 “불사조 ~ 날아라 새로운 하늘을 향해”를 가져 완전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미 상한 몸으로 인해, 전국 공연을 가지던 도중에도 수차례 극비 입원하는 등, 위험한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川の流れのように”을 발표했다. 곧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하지만, 다시 입원과 일시 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자택에서 라디오 특집 생방송 “미소라 히바리, 감동의 이 한 곡”을 방송하고 난 뒤 급격히 악화되어 (順天堂病院)에 입원하게 됐다. 이로 인해 이후 예정되었던 콘서트나 전국투어도 모두 중지되었다.
그녀는 죽기 2년 전인 1987년에 대퇴골골두양사(大腿骨骨頭壤死)라는 병으로 후쿠오카 재생병원(福岡再生病院)에 입원하였고, 100일여간의 투병 생활 끝에 재기하였으나 결국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에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이후 각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 명이 조문했다. 그녀는 호소력 짙은 가창력에 미모까지 갖추었으며 1천4백 여곡을 발표했고, 수많은 히트 곡을 남겨서 음반 판매량이 4천만 장을 넘었다.
그중에도 말년의 병상에서 일어나 발표한 곡, 괴롭고도 무거운 여인의 사랑을 표현한 ‘흐트러진 머리(みだれ 髮)’는 그녀가 자신의 심경을 작사가에게 의뢰하여 작사한 곡이라 한다. 이곡의 마지막 가사를 보면, /날려버린 여자의 기원이 슬프게 하네/ 홀로 외톨이로 있지 말게 해 주오/ 는 어쩌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하였건만, 인생의 말년에 와서야 그녀는 자신이 한국 출신임을 밝힐 수 있었다.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일본 주식회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는 최대의 찬사와 함께, 그녀의 사후에 “국민 영예상”이 주어졌다. 그녀의 자서전적인 인생을 노래한 듯, 그녀의 아버지 장근석을 추모한 듯한 노래 ‘강물의 흐름 같이 (川の流れのように)’ 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최고 가요로 여겨진다.
강물의 흐름 같이 (川の流れのように)
그녀의 대표곡인, 그녀의 인생을 노래한 川の流れのように 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知らず知らず步いて來た 細く長いこの道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걸어왔네 길고도 좁은 이 길을
振り返れば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뒤돌아 보면 저만치 멀리 고향이 보이고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地圖さえないそれもまた人生
울퉁불퉁한 길과 굽어진 길 지도조차 없지만 그것 또한 인생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ゆるやかにいくつも時代は過ぎて
아-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어느새 세월은 흘렀네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とめどなく空が黃昏に染まるだけ
아-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그저 하늘이 황혼에 물드는 것뿐 이라네
(2절) 生きることは旅すること 終りのないこの道
살아간다는 건 길을 떠나는 것 끝도 없는 이 길을
愛する人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雨に降られてぬかるんだ道でも
사랑하는 이와 함께 꿈을 찾으며 비에 젖고 실패한 길이라도
いつかはまた 晴れる日が來るから
언젠가는 다시 비가 개인 내일이 올 테니까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おだやかに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季節雪どけを待ち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하는 계절,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おだやかに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いつまでも 靑いせせらぎを聞き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까지라도 푸른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 이모 저모>>
1) 묘소 위치 : 横浜市健 福祉局 日野公園墓地
https://goo.gl/maps/mjKgz7ttkNhUmS2x5
https://goo.gl/maps/2nUZh24KN9edqFeV8
(실재 묘소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