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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이소의 고구려 국

요코하마 가마쿠라 약광 왕자, 일본 신이 되다.

by 애바다

1. 고구려 왕자 약광의 한반도에서 탈출

668년 고구려의 평양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함락 직전에, 고구려의 마지막 왕 28대 보장왕의 3남 약광(若光)은 대동강에서 직계 가족 10명, 용감무쌍한 무장 부하 30명을 인솔하여,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갈 곳은 하나, 일본 뿐이었다. 백제는 이미 660년에 멸망하여, 의자왕은 당나라에 모진 수모를 당하며, 끌려간 후였다. 백제지역에서는 이미 신라 당의 군사가 반대 세력을 찾아 칼을 세우고 왕족, 잔여 무장세력을 진압, 색출 중이었다. 특히 왕족은 잡히면 즉결 처형이었다.

약광(若光)의 목적지는 일본 교토. 바다는 신라와 당의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미 660년에 백강전투에서 막강한 나당 연합군에 의해, 일본왕의 특명에 의해 출병된, 일본의 지원군 정예 3만 명이 전몰하였다. 살아 돌아간 자는 없었다.


우선 배를 위장하여 고기 잡는 어선으로 위장을 하고, 물과 비상식량을 싣고, 여자들은 남장을 하여 얼굴에 숫 칠을 하고, 가슴을 동여 매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대동강을 출발하여 옹진, 강화도, 보령, 완도를 돌아 보름 만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그곳은 아직 나당 연합군의 세력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3일 후에 다시 출발하여 모진 태풍으로 방향을 잃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일주일 만에 후쿠오카에 도착하였다.


2. 일본 도착

약광은 이미 여러 차례 사신으로 일본을 갔다 와서 일본의 왕족과 친분이 있었다. 특히 후쿠오카 지방의 책임자 하세가와는 이미 얼굴을 익혀 잘 알고 있었고, 바둑도 몇 차례 둔 적이 있었다. 하여 도착 즉시 한문으로 된 서신을 하세가와에게 써서 주어, 그들의 왕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특히 한반도인에 대한 대우는 극진하였다. 이미 왕인박사 등이 문자, 불교 등을 전해 주어 선진 문화에 대한 갈망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새로움에 대한 환호는 대단하였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하였는데, 새로운 것이 아니면, 백제(구다라)가 아니다(나이)는 뜻으로 ‘구다라 나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하세가와는 즉시 일본의 수도 교토에 보고하였고, 1주일 후에 그곳으로 모셔 오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해로 육로로 이동하여 7일 만에 왕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실로 극진한 대접과 고구려국 멸망에 대한 심심한 위로를 해 주었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많은 유민이 7만 명, 3만 명 정도 유입되자, 일왕은 내심 긴장을 하였다. 그들의 정치 세력화를 두려워하고, 염려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민 분산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즉 될 수 있으면 소단위로 쪼개어, 변방으로 이동시켰고, 그지방의 장으로 하여금 특별 감시, 관리를 하였던 것이다. 높은 학식과 지식을 가진 유민들은 각 지방의 호족들의 자녀를 교육을 담당하거나, 유민들의 한반도에서의 각자의 전직을 고려하여, 문,무분야에 최고의 대우를 하였던 것이다.


즉, 다양한 지식이 전체 지역으로 골고루 전수되자, 일본 전 지역에서 산업혁명에 준하는 격변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유민 중에서도, 고구려계 백제계의 알력은 인간지사, 당연히 있었다. 일본왕은 될 수 있으면, 이들 간에 격리, 상호 견제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암암리에 하달하였다. 특히 한반도와의 연계하여 무장 세력화 하거나 반도의 세력과 연계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유민들을 될수록 신개척지, 변방 지역으로 내어 보냈다.

3. 오이소의 고려


약광일행은 광활한 고구려의 만주 벌판을 누비던 사람들이라, 말 타는 솜씨와 활, 칼 다루는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약광일행에게는 그 당시에 변방이었던 오늘날의 일본의 수도 도쿄 인근 지방인 가나가와현으로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농지를 개척하고, 특히 목초지에서 말 키우는 육마사업이 체질에 맞아 떨어졌다.

약광일행을 태운 배 5척이 가나가와현 사가미 앞바다에 도착하자,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던 고구려계 유민들이 천 여명이

바닷가에 나와서 열렬히 환영하였다. 특히 약광은 고구려왕의 3남이 아니던가. 그들은 일제히 이렇게 외쳤다. “어서 오이소! 아서 오이소!” 물론 그 자리에는 백제계 선주민, 토박이 일본인도 나와 환영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그 말의 의미를 물었다. 그 후 그 지역명이 ‘오이소’로 불렸다.


약광일행은 고구려 조국을 잊지 말자는 결의를 다지고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

하기 위해 그 일대를 高麗라 이름 붙이고, 산의 이름도 高麗山으로 바꾸었다.


비록 개간하고 개척해야 할 황무지였지만, 왕족들을 딸려 보내 함께 개간을 도왔고, 이주민들을 위한 행정적인 지원도 마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역사상 예를 볼 수 없는 파격적인 대우로 21세기에도 숱한 망명자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들을 위해 천막은 쳐 줄지언정,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 주거나 망명자 집단의 수장을 시장으로 세우는 일이 없음을 볼 때 당시 일본 조정의 환대는 지극한 것이었다.


약광 일행은 일본 땅에 와서 이미 기반을 잡고 있던 사람들과 거대한 토호세력이 되어갔다. 서기 716년 아직 헤이안 천도 이전으로 이때 왕권을 잡고 있던 왕은 독신녀 원정 왕(재위 715~ 724)이다. 일본의 5번째 여왕인 원정 왕은 모녀가 나란히 왕권을 잡은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고구려는 말을 부리는 기마 민족이었다. 특히 고구려의 철갑 기마부대는 그 규모가 몇 만에 달할 정도의 큰 부대였으며 드넓은 만주 벌판을 휘어잡았다. 고구려가 얼마나 말과 친한 민족이었는지는 고분 벽화에도 잘 남아 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전하는 5~6세기의 고구려 고분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지 않은가? 특히 무용총에 있는 고분벽화에서는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4명의 말을 탄 무인이 활을 쏘며 사냥을 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을 만큼 말에 대해서라면 고구려인 아닌가?


고려(다카쿠) 신사에서는 봄과 여름에 큰제사를 지내는데 이때는 고려산 정상에 올라가 상궁(上宮)이 있던 자리에서 제사(春季大祭山神輿·4월 17일)를 지낸다. 이는 한반도계 신, 즉 약광왕자를 섬기는 것이다.


여름철 역시 어선제(御船祭)라고 해서 오이소 앞바다에서 지내는 제례 의식은 마치 한국의 전통시대에 행하던 동제(洞祭) 의식을 연상케 한다. 사자춤도 등장한다.


작가 이와이(岩井國臣)씨는 그의 누리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이소는 조선반도로부터 온 도래인들이 상륙한 지점으로 그들의 활동 무대는 사마천의 고마에 지역과 이리마의 고려향까지 뻗쳐있다. 도래인들은 관동 평야 개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야마토 조정은 왕족 일족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왔으며 그것은 무사의 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래인의 활약을 언급하지 않고 관동의 역사는 기술할 수 없다.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고려(다카쿠) 신사와 사이타마의 고려(고마) 신사 그리고 하코네의 하코네 신사는 모두 연관이 있으며 이는 다시 이즈 신사와 연결되고 더 나아가서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과도 연결고리를 갖는다. 오이소를 빼고 관동 무사(板東武士)를 논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오이소는 일본 무가 사회의 원류이다.” 즉, 관동에 터를 잡은 고구려인들이 사무라이 정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4. 무사시의 고려

오이소의 고려인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백제계 일왕에 의해 오이소 거주 한반도인 일부를 도쿄 근처 무사시노로 이전을 명령했다. 즉, 고구려계와 백제계 간의 알력이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관동지방 무사시노(도쿄 북동쪽 지방)가 오이소 지역보다 더 광활한 평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그곳에 고려군을 설치하고 고구려인 1799명을 옮겨 살게 하였다. 유민들이 말의 종자 번식, 군용 육마 훈련에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간무왕 때는 친왕임국(親王任國)이라 하여 친왕, 곧 왕족을 국사로 파견하게 되며 이들이 태수(太守) 자리를 지켰다. 특히 처음으로 발령한 3명의 태수는 간무왕의 열 번째 아들 가야신노우를 비롯하여 나카노신노우, 가도이신노우로 자신의 아들을 과감히 관동지방에 파견하여, 고구려계를 견제하였다.

간무왕은 일본의 50대 왕으로 교토 시대를 활짝 연 ‘교토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왕인데 어머니가 백제여인 고야 신립(高野新笠)으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왜 간무왕은 자신의 아들을 직접 관동지방 개척에 투입시킨 것일까? 고구려와의 인연? 무사시국은 예전부터 준마의 산지였다. 무사시국의 너른 평야는 대규모 준마 목장이 있었으며 이들 말은 군사용으로 쓰였다. 이러한 말을 관리하는 사람 중에서 크고 작은 무사단이 생겨났다고 일본 사서들은 전한다.


서기 716년 무사시국 벌판에 고구려인의 집단 이주가 있었고 이후 간무왕이 아들을 직접 태수로 파견한 것이 826년 일이므로 100여 년간의 시차가 있다. 이 기간에 고구려왕 약광 일족은 무사시노를 개척하고 싸움용 준마를 길러 후에 간무 왕의 아들들이 태수로 부임할 무렵에는 훌륭한 준마들이 넓은 들판을 누볐다.


5. 신이 된 고구려 왕자 약광

고구려 출신의 약광왕(若光王)을 제신으로 모신 무사시 지방의 고려신사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한이 절절이 배어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이 신사에서 궁사(宮司: 우리나라 절의 주지와 같은 직책)를 맡고 있는 고마 스미오(高麗澄雄)가 학계의 초청으로 내한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제28대 보장왕(寶藏王)의 후손으로 고려향의 개척자인 약광의 59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을 잊지 말라는 결의를 다지고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 즉 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 아직까지 고려인들의 족보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처럼 서기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이역만리 일본 땅에서, 그것도 1천3백 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서까지 고구려 후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고구려 조상을 섬기는 신사를 지켰다.

고려신사 입구에는 이 신사의 내력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이렇게 씌어 있다.

『고려신사는 고구려국의 왕족인 고려왕 약광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중국 대륙의 송화강 유역에 살았던 기마민족으로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중국 대륙 동북 부로부터 조선반도의 북부를 영유하고 약 몇 백 년간 군림했다. 그 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


이때의 난을 피해 고구려의 귀족과 승려들이 다 수 일본으로 건너와 주로 동국(東國)에 살았으나, 레이키(靈龜) 2년(716년)에 그중의 1천7백99명이 무사 시국(武藏國)에 옮겨져 새롭게 고려군이 설치되었다. 고려 약광왕은 고려군의 군사(郡司)로 임명되어 무사시노(武藏野) 개발에 힘썼으며, 다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여기에 묻혔다. 군민(郡民)은 그의 유덕을 기리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명신(高麗明神)이라고 하며 숭배해 왔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왕 약광의 직계 자손에 의해 신사가 지켜져 왔으며 지금도 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고려 약광의 존재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더욱이 이 신사의 제신 인 약광왕이 출세 개운(出世開運)의 신이라는 점도 남다른 대목이다. 역시 기록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답게 신사 안에는 「출세 명신의 신」에 대한 안내판이 또 세워져 있었다.


『이 신사는 멀리 나라시대 겐쇼오(元正) 천황 때 고려군을 통치했던 고려왕 약광을 기리는 신사다. 따라서 그 창건은 1천3백여 년 전의 옛 관동지방에 속한 유서 깊은 신사다. 이 신사는 기원(祈願)을 잘 들어주는 영험한 신사로 알려져 고려군의 총진수(總鎭守)로서 군민에게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는 미즈노(水野), 하마구치(浜口), 하토야마 등 5명이 이곳에 참배한 후 계속해서 총리대신(總理大臣) 또는 국무대신에 취임하는 등 출세를 함으로써 출세 관련 신으로 신봉(信奉)됐다. 특히 하토야마는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하여 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 이 신사는 정계, 재계를 시작으로 해 각계각층의 숭배와 공경을 받아 전국적으로 숭경자(崇敬者)들이 널리 퍼져 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가 2017년 9월 20일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에 있는 고마(高麗·고구려를 의미) 신사를 참배했다. 일왕 부부가 고마 신사를 참배한 것은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약광의 후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궁사(宮司)의 설명과 함께 신사를 둘러본 뒤 참배를 마쳤다. 일왕이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내 개인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당시 아키히토 일왕은 “무령왕의 아들인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과의 교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며 “이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朝香宮誠彦王)가 충남 공주시의 무령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현재도 일본의 정·재계를 주름잡는 거물들이 그들의 출세를 빌기 위해 고구려 신을 찾는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바로 약광왕이 살아 있었을 당시에도 일본의 실력자들은 약광왕을 찾아 한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일본에서 비중 있는 인사들이 참배하는 고려신사는 그 규모나 대우 면에서 으뜸이다. 이 신사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한이 절절이 배어 있다.


고려신사옆의 하천(고려천)에서 가족들과 물놀이를 하며 담소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그 분위기가 흡사 한국의 어느 냇가로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갑자기 유프라테스강가 바빌론에 유배된 유대인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사유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조선인 선조들의 후손이란 생각을 하자, 뭔가 친근감이 생겼다. 한민족의 이동 경로중 어떤 한 가지가 파생된 집단이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구려 약광왕자, 그는 끝내, 그의 조국, 고구려를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신이 되어 한반도 후손들을 돌보고 있다.


<< 위치 주소>>

1) 오이소 고려산 : https://goo.gl/maps/BXXvB3cvLXLxo1rRA

오이소 고마 高麗 : https://goo.gl/maps/z94mmVvDL7XRRvjFA

(마을 지도 간판이 온통 高麗로 덮여 있음)

2) 무사시 고마 : https://goo.gl/maps/z9CCQoW7bjAMc1xcA

3) 지치부 : https://goo.gl/maps/Mqy1D8W4eCmNzrjk9

4) 양산공원 치바사쿠라 : Hitsujiyama Park - Google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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