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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즈 (伊豆) 반도 문학 기행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무희와 백석의 이즈국주가도

by 애바다

2016년 12월 31일, 요코하마에서 서남쪽으로 150 키로에 위치는 이즈반도를 당일치기 예정으로 여행하기로 하였다. 물론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이즈반도의 기후가 따뜻하여 꽃이 일찍 핀다거나, 공기가 좋아 휴양지로 이름이 있다 혹은 무슨 소설의 배경이라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어서 평소 호기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내가 그렇게 멀리 있는 데를 일부러 찾아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다가, 일본의 연휴가 연말연초에 즉 12월 29일부터 다음 해 1월 4일까지 모처럼 긴 나만의 시간 휴일이 있었다.2017년 1월 27일부터 구정에 맞추어 한국 휴가를 가기로 하였으므로 오롯이 나만의 시간으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3권중 1권을 읽었기  때문에 눈의 휴식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출발 전날 즉,30일어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여 보았더니, 백석이란 시인이 그곳을 여행하면서 시를 남겼고,한국의 시인들도 단체로 그의 시의 배경지를 찾아서 시 감상회를 열었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흐흐 참 별일도 다 보겠네. 그 먼 데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의 시인을 찾아 그기까지 왔어?"  


다음의 검색어는 "도오진 오키치(唐人お吉)"였다.일본 개국시기에 기생으로서 미국 영사의 시녀로 막부의 추천되어 들어가 애인과 헤어져서, 결국은 국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단편소설"이즈의 무희"의 작품 배경지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서가에서 지도를 꺼내어 살펴본즉, 행선지를 요코하마역->아따미->키노미야역(하차)->이즈큐우시모다역(伊豆急下田,종점)에서 내려,도오진 오키치(唐人お吉)기념관을 보고, 백석의 바닷가로 정하고 둘러 보기로 하였다.



그 후에 이즈큐우시모다역에서 출발하여 몇 정거장 올라가서 가와즈 역에서 하차 후 버스를 타고 슈젠지 역에 하차 후,슈젠 지역에서 미시마 역->아따미 역->요코하마역으로 복귀하기로 하였다. 이미 옛날 사람들이지만 공통점은 작가들도 주인공들도 다 비련의 주인공이란 점에서 똑같았다. 그럼,그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고, 한 사람 한 사람,시모다에서 만난 여인 도오진 오키치(唐人お吉),남의 서정주라면  북의 시인 백석(1912~1995),가와바다 야스나리(1899~1972)의 이즈의 무희(伊豆の踊り子)를 만나보기로 한다. 잘 아시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인터넷에서 많이 탈탈 털어 왔음을 먼저 밝힌다.  



1)개항의 배경


  시모다(伊豆急下田,이즈큐우시모다)의 네수가다산(寢姿山)에서 시모다 앞바다를 내려다보면 포근한 어머니 품 안같이 잔잔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은상 선생께서 용마산 산호공원에서 마산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라고 읊었지만 잔잔함을 말한다면 시모다 앞바다가 단연 앞선다고 할 수 있겠다.


시모다 항의 잔잔함 속에는 막부 말기에 서구 열강에게 개항하지 않으면 안 될 일본 현대사의 단면을 지니고 있다. 그 지난 역사의 뒤안길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시모다(下田)는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 이즈반도의 남단에 있는 항구도시로서 인구가 약 25,800명이다.(2008.10)


시모다항은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입항하여 개국(開國)을 요구함으로써 일본이 쇄국(鎖國)을 푸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역사적인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태평양 바다에 접한 시모다는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작은 어항(漁港)이다. 지금도 크고 작은 어선과 유람선이 들락거리는 작은 항구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열면서 에도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막부는 허가 없이 에도로 진입하는 지방 다이묘(大名)의 가족이나 범죄자, 또는 총포물(銃砲物) 등의 위험한 무기의 반입을 막기 위해 길목마다 오늘날의 검문소에 해당하는 세키쇼(關所)라는 감시소를 설치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곳이 육지의 하코네(箱根) 세키쇼와 항구의 시모다(下田) 세키쇼였다.   시모다는 앞바다가 마치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어 태평양에 큰 파도가 일어도 내해(內海)는 영향을 거의 받는다. 이 때문에 어선 등 많은 배들로 붐벼 예로부터 피난항으로 잘 알려졌다. 1년에 항구를 드나드는 배가 3천 여 척에 이른다고 해서 “출선입선 3천척(出船入船三千隻)”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8세기 중반, 시대가 바뀌어 도쿠가와 막부가 점차 힘이 빠지면서 구미 열강의 일본 진출 의욕이 높아졌고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먼저 국교를 맺기에 혈안이었다. 1792년 러시아 선박이 처음으로 홋카이도(北海道)의 시레토코(知床) 반도 옆 구나시리(國後) 섬에 상륙, 통상을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1808년에 영국 상선이 나가사키(長崎)에 입항했고, 1837년 미국 선박 모리슨호가 우라가(浦賀)에, 1844년에 네덜란드 군함이 나가사키에, 그리고 1846년에는 미국이 빅터를 단장으로 하는 정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 개항을 요청하는 등 구미 열강의 일본 진출 시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이던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지금의 도쿄 남쪽 미우라(三浦) 반도의 우라가(浦賀)항에 상륙하였다. 개항을 요구하는 당시 필모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한 후 1년 뒤에 다시 올 것을 알리고 돌아간 것이 1853년 7월 3일. 페리의 두 번째 방문은 이듬해 2월 13일로 이 때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시모다를 거쳐 에도 코 앞까지 깊숙이 들어가 개항을 요구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노쇄해진 도쿠가와막부도 계속 개항을 거부할 경우 전쟁까지도 불사해야 할 것으로 판단, 드디어 1854년 3월 31일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이 구미 제국과 맺은 최초의 국가 간 조약이다. “미일 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 또는 조약이 이루어진 장소 이름을 따 “가나가와(神奈) 조약”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이어 같은 해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와도 동일한 성격의 조약을 체결했다. 말이 조약이지 일방적인 무력시위요, 굴복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 조약을 ‘치욕’ 대신 ‘태평하게 잠자던 일본이 근대 국가에의 길을 걷게 만들어준’ 사건으로 좋은 의미로 기억하는 것이 우리와 다른 점인 것 같다.  


미일 화친조약으로 일본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函館)와 이즈(伊豆) 반도의 시모다(下田)를 개항하고 구미 여러 나라에 문을 열었다. 2년 뒤인 1856년 미국은 시모다에 최초의 영사관을 열고 타운젠트 해리스를 초대 주일 영사(駐日領事)로 임명한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교역에 들어간다.


2) "도오진 오키치(唐人お吉)" 일본 개국시 기생


앞으로 소개할 오키치는 해리스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시모다항 유람선인 '쿠로부네'를 부르는「외국 함선」은 개항을 요구하던 시절 서구 열강의 함선 모습이다.  선단(船團)은 대포까지 장착되어 있는 당시로서는 거대한 군함으로 일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두 번째 때는 2450톤급이 포함된 대형 군함이 7척인 데다 병력 규모가 1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페리의 군함을 “쿠로부네(黑船)”라고 부른다. 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당시의 선박은 상선이나 군함 등이 모두 목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바닷물에 나무가 썩거나 해조(海藻)가 달라붙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콜타르로 만든 도료로 도장했는데 이 도료가 흑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미일 화친조약 체결 2년 뒤인 1858년 맺어진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요코하마(橫濱)와 고베(神戶) 등의 큰 항구가 개방되면서 시모다는 얼마 안가 외국선박의 출입이 중지되었다. 시모다의 개항 기간은 1854년 3월부터 1859년 12월까지 불과 5년 9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기간 동안 일본의 대외창구가 되었고 일본이 쇄국 시대로부터 세계 열강의 일원으로 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모다 항의 개방기간이 짧았던 것은 항구에 대형 선박 접안시설 건설이 어려운 데다 내륙과 거리가 멀어 내륙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과 같이 쇄국정책을 펼쳐오던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프랑스 vs 조선)와 1871년 신미양요(미국 vs 조선)를 겪으면서 오랑캐들을 격퇴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기회로 삼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일본과 강화도조약(1876) 때 체결하면서 부산, 원산, 제물포 등 '삼포 개항' 하였는데 조선의 입장으로는 근대 최초의 조약을 일본과 맺었으나 일방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조선보다 먼저 서구 열강에게 개항하면서 익힌 솜씨를 조선에게 써먹은 셈이다. 개항시기의 약 22년차이가 항상 뼈아프게 느껴진다.  

현재 시모다는 관광지로 이름이 더 나 있다. 도쿄(東京)에서 특급열차로 3시간이면 닿는다. 이즈반도 전체가 온천지로 유명할 뿐 아니라 연중 날씨가 온화하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시모다에는 해리스의 동상과 기념관이 있는가 하면 항구에는 흑선 모형을 띄우고 있으며, 2004년 시모다에서 개항 150주년 기념 축제를 성대히 한 것도 관광객의 유치에 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천을 비롯하여 자연적인 환경을 최대로 이용한 관광정책으로 인해 요즘같이 단풍이 고운 계절엔 더욱 많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추억을 쌓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

3)시인 백석(1912~1995)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해 1930년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일본 유학 후 1936년 1월 시집 ‘사슴’을 간행해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단했다. 1935년의 정지용 시집에 이어 다음 해 백석 시집의 출간은 한국 현대시가 실질적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김기림은 ‘백석 시집을 가슴에 안고’라는 신간 서평을 통해 백석 시집이 ‘신년 시단에 한 개의 포탄을 내던졌다.’고 표현한 바 있다.

  백석은 문학적 명성만큼 행복한 시인은 아니었다. 구원의 여성 란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했지만 다시 여기서 만난 자야 여사와의 사랑 또한 불행한 결말로 끝났다.


4) 백석의 연인 자야

이별 후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 된 자야(김영한,길상화)가 1000억대의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희사하였는데, 10년 가까이 법정에 청하여 법명을 법정스님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백석과 사랑하였으나 신분상의 차이로 연은 이어지지 못하고, 백석이 해방 뒤 북에 머물다가 분단이 되어 둘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자야(김영한)는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는 기자의 물음에 "천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2억의 사재를 털어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1940년대에는 만주 일대에서 방랑하듯 생계를 위해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소작인 등 온갖 고초를 겪는 극빈의 생활을 경험했다. 백석이 이 시기에 쓴 것으로 여겨지는 역작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같은 시는 그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남북 분단으로 문단에서 사라진 그의 시들은 유종호 신경림 등의 선구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봉인된 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시가 다시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납북·월북작가들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다.   

2001년 북의 유족들에 의해 1995년 백석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1959년 1월부터 사망 시까지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협동농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한 것도 전해졌다. 1958년 10월 이른바 당에서 내려온 ‘붉은 편지’ 사건 이후 당성이 부족한 작가들에게 현지 지도원으로 내려가 ‘붉은 작가’로 단련할 것을 요구하는 당의 명령에 따라 백석은 자원 형식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 오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의 출산을 기뻐하고 양을 몰고 나갔다가 양을 몰고 들어오는 단조로운 생활이었을 것이다.


  분단 이후 백석에 대해 최초로 본격적인 평필을 든 유종호가 그의 시에서 한국적 페시미즘을 논한 것은 그의 문학만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백석의 문학적 인간적 불행은 한국문단의 불행이자 분단시대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사례일 것이다. 인생의 전반부는 천재 시인으로 평가되는 문단적 명성을 누렸으나 인생의 후반부는 산골 오지에서 양치기로 살아야 했다는 것은 그의 생에 드리워진 비극적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말로도 논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 만주에서 방랑을 시작할 무렵에 이미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41년에 발표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그는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낼 적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고 노래했다. 20대 초반의 미끈하고 준수한 미남의 얼굴과 70대 중반의 늙은 양치기의 얼굴에서 백석의 반세기가 교차한다. 산간 오지의 양치기가 돼 산야를 누비면서 바라보았을 수많은 봄과 여름을 떠올려 본다.


그는 하릴없는 여름날 느리게 걸어가는 양들과 흰 구름과 들꽃을 스쳐 가는 바람을 보았을 것이며 바람결에 스치는 그 향기를 느꼈을 것이다.   복권을 위해 당에 충성하는 편지와 시를 쓰며 울분을 다스려야 했던 40대 후반의 자신을 그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회상했을 것이다. 회한과 오욕을 넘어선 경지에서 하늘을 바라보았을 그의 미소가 잔잔하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운명의 사슬을 벗어난 그가 영원한 자유인으로 웃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백석 문학전집’을 통독하면서 한국 현대시의 정점에 서 있는 그의 시와 20세기 한국인이 헤쳐 나와야 했던 역사적 굴곡의 상징적 축도로서 그의 생이 하나가 돼 만들어진 큰 바위 얼굴과 같은 거대한 시인의 초상화를 그려 본다.

  이즈(伊豆)에서의 백석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이즈는 문학의 고장이다. 백석 여행 시의 출발점이 이즈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여행 소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백석은 1933년 겨울 이즈반도를 찾았다가 두 편의 시와 한 편의 산문을 남겼다. 그가 데뷔하기 전이다. 도쿄의 아오아먀(靑山) 학원에 유학하여 4년(1930~1934) 간 영문학을 공부했다.


공교롭게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이즈의 이야기로 문단에 데뷔를 했고 백석은 그 이즈반도에 가서 데뷔 전에 시를 썼다. 귀국 후에는 자신의 시의 상징적인 구원의 여인인 '란'을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인 통영(統營)의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 찾았다. 백석의 여행시의 시작은 시기枾崎의 바다인지도 모른다.

  대나무 울타리로 막아놓은 해변 너머로 연록의 바다는 멀어질수록 청록으로 짙어지다가 뿌연 섬에 이른다. ‘이즈의 무희’의 고향이 저 섬이었을 것이다. 일본 유학 시절 ‘이즈 반도’를 여행한 배경에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데뷔작 ‘이즈의 무희’ 소설과 영화가 있으리라는 추측은 자연스럽다.

이즈반도는 온천이 많은 곳으로 일찍이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일본의 유명 인사들이 요양과 교류를 위해 들렀던 곳이기도 하니 백석의 관심도 자연스레 이곳에 쏠렸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백석은 도쿄에서 배를 타고 올 수도, 기차로 슈센지(修禪寺)까지 와서 소설 속 무희네 연희패들 족적을 따라 아마기산(天城山)을 넘어 시모다 항 인근 가키사키(枾崎) 해변에서 그 시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백석 시인이 일본 유학 시절 다녀와 시를 지었던 이즈반도 가키사키 해변. ‘이즈의 무희’에 나오는 이곳에는 어린 무희의 고향 섬이 실루엣처럼 떠 있다. 백석은 이곳에서 ‘참대창’에 참치를 꿰어 말리는 풍경을 보았고 가슴앓이하는 병인의 쓸쓸함을 담았다.

“저녁 밥때 비가 들어서/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참대 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섬돌에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 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얼굴이 해쓱한 처녀가 새벽달같이/ 아 아즈 내인데 병인病人은 미역 냄새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같이 누었다”(‘시기枾崎의 바다’)

백석의 다른 시들도 그렇듯이 평안도 고향 사투리가 원색적으로 들어 있는 시편이라서 해독하기 수월 치는 않지만 느낌만은 선명하다. 대나무가 많은 고장에서 참대를 깎아 세워 그 위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를 끼워서 말리는 풍경은 높고 쓸쓸하다. 이슥한 저녁에 물기가 밴 왕골로 짠 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은 참치회도 먹지 못하니 눈물겹다는 시인의 언설.


그 눈물겨운 사람은 시인인가, 남이즈 시모다 항 인근 가키사키 바다의 병든 어부인가. 창 너머 어둑한 행길에 새벽달같이 해쓱한 얼굴로 스쳐가는 처녀는 첫사랑과 헤어져 시모다 항구 주점에서 쓸쓸히 늙어가는 이즈의 무희인가. 아 아즈내(초저녁)인데, 아픈 사람은 미역 냄새 풍겨오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같이’ 누워버렸다. 누운 것은 시인인가, 어부인가.

백석은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도쿄의 아오아먀(靑山) 학원에 유학하여 4년(1930~1934) 간 영문학을 공부했다. 아직 시인으로 데뷔하기 전인데, 이 시기에 백석은 이즈반도를 여행한 후 ‘시기의 바다’와 ‘이즈국주가도(伊豆國湊街道)’ 시 두 편과 ‘해빈 수첩’이라는 산문 한편을 남겼다. 귀국 후 펴낸 첫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기의 바다’는 ‘통영’과 비슷한 정조를 띤 시편으로 기행지 이름을 시 제목으로 내세우는 백석 스타일과 쓸쓸한 바닷가 정조를 읊는 맥락에서 닮았다.

시사랑 문인 협의회 회원들이 시즈오카 찻집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시사랑 문인 협의회’(회장 최동호) 문학기행을 따라 지난 주말 일본 시즈오카현 남 이즈 시모다 항구와 아마기산 인근을 돌아보았다. 기행에 동참한 최동호 이숭원 유성호 교수, 한세정 정수연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기행문을 작성하는 중이다. 일행은 시즈오카 공항에 내려 두 시간에 걸쳐 해안의 산맥 속 깊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시모다 항까지 갔다.

시모다 항 인근에 백석이 시를 남긴 ‘가키사키 해변’이 있다. 시즈오카에서 이즈반도 시모다 항 가는 길 연변 산속에서는 봄 산의 왕벚꽃나무처럼 하얀 온천 굴뚝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이즈의 무희에 나오는 연희패들이 들렀을 법한 온천의 저녁밥 짓는 연기 같다.


시사랑 회원들은 이날 저녁 시모다항 여관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백석의 시와 자작시와 클라리넷 연주까지 곁들인 시낭송의 밤을 ‘아즉하니’ 보냈다. 이번 기행의 단장으로 참여한 강은교 시인은 ‘어둑한 기슭 행길에 새벽달같이 선 해쓱한 처녀’에 대한 백석의 애틋한 감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밤에 의미를 부여했다.


시기 해변은 바람이 거셌다. 시모다 항 뒷길을 배회하다 우리는 백석이 노래한 이즈 해변의 가로를 달려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이즈의 무희들이 넘은 아마기 고개로 향했다.

“녯적본의 휘장마차에/ 어느메 촌중의 새 새악시와도 함께 타고/ 먼 바닷가의 거리로 간다는데/ 금귤이 눌 한 마을 마을을 지나가며/ 싱싱한 금귤을 먹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이두 국주 가도伊豆國湊街道’)

옛날식 휘장 마차에 촌에서 온 새색시도 같이 타서 가키사키 해변길을 달리는 가슴은 콩닥거린다. 게다가 조선에서 맛보기 힘든 시큼한 금귤을 먹는 일이라니, 얼마나 즐거운가. 백석의 시편들은 쓸쓸하고 슬픈 정조가 돋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먹을 것을 소재로 한 시편에서는 감각적인 즐거움이 넘친다고 기행에 참가한 유성호 평론가는 말했다.


백석은 “정서적 비극성이라는 어둑함과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밝음”으로 요약된다는데 가슴 앓는 이가 등장하는 가키사키 시편과 금귤이 등장한 이즈 해변의 시편은 백석의 향후 시 전개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두 편이라는 얘기다.

가키사키 해변을 달리는 내내 그랬지만, 아마기 고개를 향해 산속으로 진입한 길 연변에서도 귤나무들은 수시로 등장했다. 시고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옛적 휘장 마차에 올라 푸르디푸른 태평양가를 촌 새색시와 함께 따각거리며 갔던 그 기분이 그대로 달리는 버스 안으로도 휘몰아 들어왔다. 버스는 이내 깊은 산속으로 접어든다. 이즈의 무희가 넘어왔던 아마기 고개로 향하는 길이다.

5) 이즈의 무희


1927년 발표한 ‘이즈의 무희’는 스무 살짜리, 도쿄에서 이즈로 여행 온 고등학생이 아마기 고개에서 무희의 연희패와 만나 사모다 항까지 동행하는 이야기다. 도중에 열네 살짜리 천진한 ‘가오루’와 애틋한 교감을 하는데 그 정서는 황순원의 ‘소나기’와 닮았다.


무희는 온천에서 목욕을 하다 학생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알몸으로 부끄럼도 모른 채 뛰어나와 손짓을 할 정도로 투명하고 애잔한 캐릭터다. 그들은 시모다 항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한다.

시모다 항은 온천장을 흘러 다니는 지방 순회 연희 패들이 객지에서 그리워하는 고향을 닮은 항구였다. 오전에 떠나온 시모다 항은 바람이 거셌고, 항구 뒷길에서는 태평양에서 떠오른 오전 태양이 늘어진 빈 버드나무 가지를 야윈 겨울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6) 와사비 밭

시모다에서 수선사로 버스 이동중에 중간에 쉼터가 있다. 와사비가 유명한 곳이다. 산 계곡 맑은 물이 흐르는 미나리 밭같은 청정 지역이 있다.




■ 위치 지도 : 下田ロープウェイのりば(新下田駅) : https://goo.gl/maps/tC4Uws3HCFrFWwz87

Kawazu Seven Waterfalls 河津七滝 : https://goo.gl/maps/vap12a15fzXLrLzS8

修善寺역 : https://goo.gl/maps/zxpw4wuceJ3js4yJA

修善寺 : https://goo.gl/maps/c51fEWV8pajZbbr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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