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琵瑟山)은 대구시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 경남 창녕군의 사이에 있는 높이 1,084m의 산이다. 천왕봉(1,084m)과 대견봉(1,035m)이 있다. '비슬(琵瑟)'이라는 이름은 산 정상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 혹은 산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정은 평탄하고, 남서쪽과 북쪽 사면은 절벽, 북동쪽은 완경사를 이룬다. 수목이 울창하며, 정상에서 바라보는 약 100만 m 2(30만 평)는 봄철에는 진달래와 철쭉, 가을에는 억새 군락으로 유명하다.
부처바위와 대견사, 대견사 3층 석탑(중앙)
버스전용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가면 휴식공간과 편의시설이 있다. 숲 속의 집, 오토캠핑장, 야영장, 삼림욕장 등이 있다. '숲 체류형' 관광을 할 수 있다. 또한 대견사(大見寺)·용연사(龍淵寺)·유가사(瑜伽寺)·소재사(逍災寺) 등 사찰이 있다. 지형으로 분류하면, 암괴류/토르/애추/고위평탄면이 있다. 30만 평의 고위평탄면에 진달래, 철쭉 억새가 화룡 첨정, 비슬산의 백미다.
비슬산은 내게 어머니 같은 고마운 산이다. 어릴 적 아침에 일어나서 눈 비비고 문밖을 나서면 큰 산이 바로 보였다. 사람들은 비슬산을 큰 산이라고 불렀다. 비슬산 산림에서 내려오는 영양분 많은 물이 넓은 평야를 적셨고, 일부는 큰 저수지에 저장하여 가뭄에도 견디고 버티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비슬산 동쪽에 위치한 우포늪 달성 끝자락 기준으로 보면, 태양은 비슬산에서 떠올랐다. 대견사까지 직선거리로 약 8km다.
6.25 낙동강 전선이 일부 일시 무너졌을 때, 험준한 산세가 적을 지체시켰다. 이곳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귀중한 생명을 지켜 주었다. 또한 청도 고개로 넘어가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청도 사람들이 피난 온 우리를 피난살이 끝날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며 항상 고마워했다. 비슬산 안심이 용 고개가 생명의 길, 피난길이었다.
다섯 살 때인가, 이른 새벽 비슬산 너머 청도 고모댁 가는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가겠다고 동네 통나무 다리까지 울며 불며 따라갔던 가슴 아픈 추억이 깃든 이름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약 30km 길을 고개 넘어 청도 풍각까지 걸어 다녔다. 비슬산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몇 날 며칠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던 어느 날 그 통나무 다리에서 미끄러져 거꾸로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된장을 발랐다. 특효약이었기 때문이다.
진달래가 피는 농한기 봄철에는 마을 사람들이 큰 산에 나무하러 갔다. 땔감이 떨어져 가기 때문이었다. 동네 어떤 아저씨가 비슬산 큰 산에 나무 하러 갔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전해지면, 해질 무렵 통나무 다리가 있는 개울에서 기다리곤 했다. 지게에 올려져 있는 집채만 한 나뭇짐에 군데군데 꽂혀 있는 연분홍 진분홍색 참꽃 진달래를 보기 위함이었다. 너울너울 춤추는 참꽃이 너무 보기 좋았다. 덤으로 비슬산 계곡에서 잡아온 대나무 도시락 통에서 꼼지락거리는 가재를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는 리어카도 없던 시절이라 지게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른 봄에 큰 산에 산불이 자주 일어났다. 사람들은 나무꾼들이 불을 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6.25 직후라 패잔병과의 교전 시 발생한 섬광탄에서 발화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현풍읍과 낙동강, 대니산 전경
그런 비슬산을 한 번도 못 올라가 보았으니,내게 비슬산은 선녀의 신비로움으로 항상 남아 있었다. 정말 큰 마음먹고 올라갔다. 누리호 발사 카운트다운 3 2 1 발사! 같은 기분과 설렘이 있었다.
오늘(20220602)이 그날이다. 아시다시피 전날(20220601) 새벽 06:30 수서역에서 출발하여 고향길 여행을 하고 현풍 숙소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른 새벽에 택시를 타고 비슬산 휴양림 주차장에 내렸다. 등산 후에 내가 왜 비슬산의 매력에 끌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다. 산 정상에 우뚝 쏟은 부처 바위가 나를 그곳에 오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참꽃과 억새도 유명하지만, 암괴류, 토르, 애추(칼바위), 고위평탄면의 존재가 비슬산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요 인물은 삼국유사의 중 일연, 사효자가 비슬산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날 저녁식사를 숙소 근처에서 돼지국밥으로 해결하고, 슈퍼에서 빵 2개, 김밥 2줄, 물 2병, 음료수 2병을 샀다. 아침 출발 전에 1/2을 먹고 나머지는 대견사 뒤편 참꽃 군락지에서 먹었다. 등산에는 가볍고, 간편한 것이 좋다. 가방 속에는 등산 준비 물외에 구두와 간이 양복 상의가 들어가 있었다. 다음 일정, 순천 처갓집 장모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시에 체크아웃이라, 아침에 일찍 등산 시작한다 해도 그 시간에 숙소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 여부를 재어 보았다. 주차장-> 대견사-> 참꽃 군락지-> 주차장이 당초 목표였다.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초행 등산으로 시간 소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이번 등산은 비슬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목표를 수정했다. 구두 양복 상의 등을 백팩에 욱여넣고,다 짊어지고 낑낑거리며 올라가기로 했다. 주차장-> 대견사-> 참꽃 군락지->유가사->사효자굴이 수정된 등산로였다. 즉, 숙소에 되돌아오지 않고 산행 후 바로 다음 여행코스 순천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등산로 출발점(도보)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버스전용 주차장에 내렸다. 편도 택시비는 만원이 공식 가격인 것 같았다. 등산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택시기사 이야기로는 9시부터 전기차가 대견사까지 전기차 운행된다고 했다. 20~30분 정도 소요되며 요금은 4,000원이라고 했다. 정상까지 케이블카 설치 계획도 논의되고 있다고 했다. 등산의 묘미는 걷는 것이지, 타는 것이 아니다.급경사 곳곳에 나무계단을 잘 만들어 놓았다. 뻐꾸기와 소쩍새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바람이 약간 부는 맑고 쾌적한 날씨였다.
옛날 나무꾼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경치 좋은 곳에서 나무를 베어 낸다고 생각하니, 옛날의 윗대 선조들의 생존의 절박함을 느꼈다. 좀 이른 시간에다가 참꽃이 이미 져서인지 대견사 도착할 때까지 다른 등산객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07:20분경에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09:20분경 대견사에 도착했을 때, 마침 노란색의 전기차가 올라오고 있었다.
소재사 입구
2) 소재사(消災寺)
계곡을 가로지르는 소재교를 건너면 소재사 일주문과 마주한다. '재앙을 소멸한다'는 이름의 사찰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됐다고 하나 연대도 창건자도 알 수 없다. 작은 도량이지만 한때 300여 명이 상주했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소재사 앞터에는 방앗간을 비롯하여 두부공장·기왓골 등도 있었다 한다. 현재 이 절의 축대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 금물정(金水井)이 있다고 한다. 샘물 표면에 금가루 모양의 작은 기포가 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뭄 때면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다음 백과)
자연휴양림내 펜션
3) 비슬산 자연휴양림과 펜션 숙소
자연경관을 그대로 활용해 휴식공간을 잘 갖췄다는 느낌을 받았다.다음 등산은 진달래가 필 때 휴양림 속에서 맑은 공기와 새소리와 별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다.
휴양에 필요한 각종 편의시설도 잘 설치되어있는 있는 것 같았다.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화 드라마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등산로 옆에는 비슬산에서 촬영했다는 장면을 담은 설명판이 줄지어 서 있었다. 추노/대왕의 꿈/장영실/옥중화등이다.
매년 4월 중순에서 5월 초 비슬산 정상 30만 평에 참꽃 물결,여름엔 안개분수를 이용한 무지개 계곡,가을엔 오색단풍의 정취를 맛보는 가을 등산,겨울엔 얼음을 소재로 한 동굴, 빙벽, 얼음탑, 썰매장, 고드름 동산 등 오색조명을 이용한 겨울밤은 전국 유일의 자연 얼음 동산으로 큰 인기라고 한다.
대견사 전경(안내판 참조)
4) 대견사
두 시간(07:20분~09:20분)걸려 대견사에 도착하였다. 벼랑 끝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선 삼층석탑과 부처바위가 멀리 보였다. 여러 의미를 담은 천연 조형물 바위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대견사 3층 석탑
부처바위, 작은 거북바위, 상감 모자바위, 소원바위, 백곰 바위, 형제바위, 뽀뽀 바위 등 토르(Tor)라는 암석이다.
뽀뽀 바위
벌써 숲이 우거져 뽀뽀 바위 위치는 짐작만 할 뿐이다. 설명판에 '여기서 뽀뽀 바위를 보면서 뽀뽀를 하면 인연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관계 당국은 연인들을 위하여, 뽀뽀 바위 주변 사계 청소를 말끔하게 해 주셨으면 한다.
천년고찰 대견사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과도 연이 있다. 스님의 초임지이자 삼국유사의 토대를 쌓은 곳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일연은 1227년(고종 14) 선불장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합격한 뒤 초임지로 비슬산 보당암을 택해 22년간 계셨다고 한다. 즉 보당암은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에 '비슬산 정상에 한 암자가 보당'이라 기록돼 있는 것을 토대로 대견사의 전신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다음 백과)
대견사는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서기 810년(신라 헌덕왕) 보당암(寶幢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 세종 때에 대견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해발 1,000m에 이르는 하늘에 맞닿은 절인 셈이다. 그래서 ‘北봉정, 南대견’이라고도 불린다고.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도량이라는 뜻이다.
고려 말에 몽골 침입으로 폐허가 됐다가 1371년 다시 지었다. 그런데 한일합방 후 비슬산 산세와 대견사가 대마도를 당기고,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속설 때문에 1917년 6월 23일 강제로 폐사됐었다고 한다. 이후 약 100여 년간 폐사지로 방치됐다가, 조계종 동화사와 달성군 노력으로 2014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대견사 초입에 있는 부처바위와 산 아래를 굽어보는 삼층석탑이 대견사의 심벌이다.
진달래 개화시 전경 (안내판 참조)
5) 진달래(참꽃) 군락지
아쉽게도 6월 초순이라 진달래꽃은 다 지고 없었다. 초록의 장관만 펼쳐져 있어, 잔치가 끝난 차분한 녹색의 더 넓은 고위평탄면만 있었다.
진달래 군락지(낙화후)
대견사 바로 뒤편에 30만 평이4월 15일 경이 절정이라고 하는 자연 정원인 진분홍의 진달래(참꽃) 군락지다. 참꽃 군락지는 빙하기의 유적인 고위평탄면 위에 자생하고 있는 것이다. 달성군은 ‘참꽃 문화제'를 열어 관광객이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 관람 체험하도록 했다. 하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코로나 여파로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유가사 근처로 내려오자 돌탑과 시비들이 많이 보였다. 유가사 입구에 "비슬산 가는 길"이라는 스님의 비시가 있다.
비슬산 가는 길
(조오현 스님)
비슬산 굽잇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萬疊疊) 두루 적막(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조오현 스님이 비슬산에 적을 두고 있을 때 쓴 시라고 한다. 만첩첩 두루 적막도 비워 두어도 좋고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모습이 내 생의 모습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유가사 입구
6) 유가사
참꽃 군락지에서 유가사 내려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가끔 이름 모를 동물들의 배설물과 등산로 일부 흙을 파 놓은 흔적을 보고, 등산 스틱에 힘을 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멧돼지를 보면 나무 위로 잽싸게 올라가라는 조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유가사 입구 돌계단
조계종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827년(흥덕왕 2) 도성(道成)이 창건하였고, 889년(진성여왕 3)탄잠(坦岑)이 중창하였다.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으나, 임진왜란의 전화로 소실되었다. 그 뒤 1682년(숙종 8)에 도경 화상(道瓊和尙)이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1976년에 대웅전과 용화전을 중창하였으며, 1979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가사 뒷 전경
문화재로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석조여래좌상과 괘불(掛佛), 삼층석탑, 15기의 부도 등이 있다. 이 중 괘불은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적군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봉안하고 소원을 빌었다 한다.(다음 백과)
7)사효자굴(사효굴)
사효자 상
지극한 효심이 느껴지는 슬픈 이야기다. 사효자교를 지나면, 사효자상과 안내 간판이 나온다. 길에서 150m 정도 걸어서 들어간다.
상성 폭포
약 30m 더 가면 상성 폭포가 나온다. 오랜 가뭄 탓에 물줄기가 힘이 없었다. 아버지의 기침소리에 왜병에게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굴의 위치가 계곡 중턱에 있어, 메아리 효과로 기침소리가 계곡물 건너편 이동 중인 왜병들에게 쉽게 들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효자굴 올라가는 입구
사효자굴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의 4 촌 동생인 재훈(再勳)의 네 아들 결, 청, 형, 호는 왜병을 피해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비슬산 중턱(양리)에 있는 동굴에 숨었다. 왜병들이 굴 앞을 지날 때 아버지의 기침소리(천망병, 기침병)로 굴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해치려 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들이 차례로 나아가 죽음을 당하였다.
사효자굴 내부
마침내 왜병들도 그들의 효행에 감동하여 아버지를 풀어주면서 ‘4 효자의 아버지(四孝子之父)’라고 아버지의 등에 종이를 부착하여, 그 왜병들은 물론 다른 왜병들도 그 아버지는 죽이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이 굴 앞에 ‘사효자굴’이라고 쓴 비석을 세워 이들의 효성을 추모하였다.
초곡리
8) 초곡리
가뭄 햇살에 너무 덥고 갈증과 다리 힘이 풀렸다. 시원한 냉면 한 사발을 먹고 싶었지만, 식당이 없었다. 사효자굴과 석빙고를 지나 계속 내려오다 보니 정말 뜻밖에도, 최근에 석방된 전임 대통령의 집이 나왔다. 노인 한분과 딸이 그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힘들게 앉아 있는 노인분의 슬픈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 따님이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서울에서 모셔 왔다고 했다. 지지 여부를 떠나, 기념사진을 찍어 드렸다. 모든 위정자들이 국민을 진심으로 받들고, 오로지 국민을 위하는 참 정치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평안한 여생을 누리기를 희망하여 본다.
현풍 시장
8) 현풍읍~대구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나서야 방향을 잡고서, 도깨비 시장을 거쳐 겨우 현풍 정류장에 도착했다. 마침내 냉면 식당을 발견했다. 그 유명한 현풍 할머니 곰탕집이 옆에 있었지만, 갈증과 목마름에 냉면집으로 향했다. 앉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다.
현풍읍에서 바라본 비슬산
정류장 건너편에서 대구행 버스를 겨우 탔다. 대구에서 순천 가는 고속버스 터미널의 이름 혼동하여 자칫 힘든 여행이 될 뻔하였지만, 천우신조로 순천행 고속버스를 타게 되었다. 실수는 ‘대구 서부‘터미널로 예약하고 ’ 서대구‘터미널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터미널 이름의 ’서‘가 같은 ’서‘가 아니다. 즉, ’ 대구 서부‘ 고속버스는 놓치고, 약 두 시간 후에 터미널에 들어온 다른 ’ 서대구‘경유 고속버스를 탔다.
2. 신의 작품
암괴류 샘플
(1) 달성 비슬산 암괴류'(達城 琵瑟山 岩塊流, 너덜겅)
우리말로는 너덜너덜한 돌들이 거랑(개울)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로 ‘너덜겅’이다. 2003년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35호로 지정되었다. 암괴류는 비슬산의 초입부터 보게 된다. 비슬산 공영주차장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하면 바로 자연휴양림을 만난다. 그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비슬산 암괴류가 나온다. 낙석주의라는 안내간판이 있다. 길이가 2킬로미터에 달하는 비슬산 암괴류의 마지막 하단 끝부분이다.
암괴류(岩塊流)란 큰 자갈 또는 바위 크기의 둥글거나 각진 암석 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산 사면이나 골짜기에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하는데, 비슬산 암괴류는 8만〜1만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에 형성된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규모가 경사 15도로 기울어진 채 산자락을 길이 2km, 폭 80m, 두께 5m에 달한다. 암괴들의 직경이 약 1∼2m에 이르는 것으로 국내에 분포하는 수 개의 암괴류 중 규모가 가장 커다고 한다.
암괴류는 빙하기가 끝날 무렵 지표면의 흙이 씻겨 내려가자 산비탈 땅속 깊은 곳에 묻혀있던 둥글둥글한 거대 바위들이 흘러내리면서 차곡차곡 쌓은 듯 남아 계곡을 이룬 돌강(Block stream)을 말한다. (다음 백과)
토르(Tor) 샘플
(2) 토르(Tor)
토르(화강암 기반의 지하에서 풍화된 미세한 알갱이가 제거되고 남은 화강암체)가 잘 발달한 대견사지 부근에는 부처바위 등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분포하고 있다. 하나하나가 산만큼 커다란 바위 집합체다. 비슬산 괴암석(Tor)의 모습이 마치 선녀들이 타다가 놓고 간 비파(琵琶) 혹은 거문고(琴瑟)와 같다고 해서 비슬산(琵瑟山)이라고 했다.(출처 : 대구신문)
애추(비슬산 강우 레이더 관측소 앞) 샘플
(3) 애추
'비슬산 강우 레이더 관측소' 주변 칼바위 등에 있다. 칼바위는 애추(崖錐, 풍화된 암석 조각들이 경사가 급한 비탈로 떨어져 내려가 절벽 밑에 부채꼴 모양으로 쌓인 각진 돌의 집단)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빙하기 지각 변동 때 생겨난 날카로운 칼바위들이 30도 내외의 급경사를 이룬 채 무수히 모여 있는 애추 군집이 장관이다.
(4) 고위평탄면
고위평탄면 모습
등산 전에는 진달래와 억새가 비슬산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암괴류 토르 애추 고위평탄면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암괴도 중요한 볼거리라고 생각한다. 암괴가 빙산으로 말하면 보이지 않는 수면 하부이고, 진달래와 억새는 상부의 보이는 조그마한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위성으로 촬영된 사진으로 보면 고위평탄면은 1천 m 정도 바닷물에서 솟아올랐다는 증거가 있다고 한다. 빙하기이래 약 8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약간 경사진 논밭처럼 평평하다.
3. 비슬산 인물들
보각국사 일연
1) 일연
비슬산 대견사(보암당)는 일연의 깨달음 수행의 장소였다. 대구는 일연(1206년~1289년)의 탄생(경산, 본명 김견명, 경주 김 씨), 깨달음(대구 달성 비슬산), 열반(군위 인각사)의 현장과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의 ‘왕력 편’이 쓰인 대구 인흥사와 집필지로 추정되는 운문사, 완성지인 인각사가 모두 대구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연이 20대를 비슬산 대견사(보당 암)에서 보낸 수행 지였다는 사실은 이 산의 깊은 내력을 말해준다. 일연은 이곳에서 다양한 신앙과 경전을 접했는데 이것은 훗날 삼국유사(고려 충렬왕 7년, 1281년~1283년)의 폭넓은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일연이 역작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277년(충렬왕 3)부터로 추정된다. 일연이 혼자 쓴 야사로 평가받고 있지만 수많은 고대 사료를 수록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 특히 고조선의 건국 신화를 서술해 한반도 역사의 기원을 기록한 것이다.
현풍 곽씨 12 정려 각
2) 사효자
사효굴의 주인공 곽결,곽청,곽형,곽호 4형제가 효자 사공(孝子四公)으로현풍 곽 씨 십이 정려 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에포함되어 있다. 효자의 본보기로 후세에 길이 전하여지고 있다. 십이 정려각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삼강(三綱)을 지킨 곽 씨 집안 12 정려(28인)를 기리는 정려비이다. 정려각에는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임금(재위 1724~1776) 때까지 곽 씨 일문에 포상된 12 정려가 모셔져 있다.
정려각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적인 건물이다. 그 내부에 정려비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旌閭記)를 모신다.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