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하늘에 진눈깨비 흩날리는 20대 초반 어느 날이었다.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에 태어난 시골 촌놈이었던 내가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제법 큰 도시에서 졸업 후,목표로했던 대학입시 전기모집 입학시험에실패했다. 마지막으로 후기 대학교에 시험을 본 후 시골에서 합격자 발표를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이란것은 전연도에 군입대신체검사 결과 "갑종"이란 결과를 받아서 그해에는 군대에 입대해서 33개월 육군에 복무해야 했다. 그당시에는 대학 입학시험 기회가 1년에 딱 2번,전기와 후기모집에 합격 못하면 재수를 해야 하는그런 교육제도였다. 그러니,이번후기시험에 실패하면 군대를 갔다 와서다시 공부를 해야 하니, 3년 후에 나시험기회가 있었다.
흔히 하는 말로군대 갔다 오면 머리에 녹이 쓴다고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을 것이고,군 제대 후 20대 중반즈음에 다시 고등학교 때배운지식을 머리에 되새겨 넣어야 했다. 목표 없이제자리걸음이 얼마나 지루한 노릇인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를 보면 알 수 있다. 버스 안에서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기생 녀석은 전기입시 모집 대학에 합격 후,벌써머리에 기름 바르고 빗어 넘겨 폼잡으며,요즘 미팅 때문에 바쁘다면서,나의기를 팍 죽여 놓았다.
농촌에서 자녀를 대학 보내기란,참으로어려웠다. 등록금에는부모의 땀과 피가 묻어있는 엄청난 희생이 담겨 있었다. 가을 추수 후겨울이 오기 전에보리씨를 논에 뿌리고,봄에는 못자리를 만들어 볍씨를 뿌리고,좁은 소로를 따라 다자란 모를 바지게에 지고 옮겨서 모를 심고,마늘,양파 재배를 위하여 뙤약볕 아래에서 허리가 끊어지도록 일해야,겨우 빠듯이 등록금을 마련했다. 부족하면돼지나 소를 팔아서 보태야 했다. 가을들판의 벼 수확이 끝나고서야 겨우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어떤 어려운 고비나 험한 상황 곤경에서 벗어난 경우의 이웃의 축하 인사가,"곽천 띠기,아들 장가보내서,인자 허리 피었네"였다. 허리를웅크리고 해야 하는 일이 농사일의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한 집안에서 자녀 몇 명을 대학 졸업시킨다는것은 기적에 가까운,그 과정이 거대한 인생 도전이자 한 편의 드라마였다.
사실상 이번 후기 입학시험이마지막이었다.실패하면,두 번다시 기회가 안 올 수도 있다. 설사합격하더라도,집안의 막내였던 나는 위의 형제들 대학 졸업하느라 전답을 많이 팔았기때문에 등록금이나 마련될수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농사 지어 나오는돈으로는 등록금마련이 어려워,논밭을 하나둘 타인에게팔아서,이제 가지고 있는 논밭이라고 해야 안골에 있는 논 대여섯 마지기가다였다. 또부모님의 연세가 벌써 예순을 넘어서고 있었다. 학자금마련이 안 될 수도있었다. 그럼,학업을포기하는 수밖에 없다.시험 과목은 국어,영어,수학이었다. 시험은대체로 잘 본 것같은데,문제는 마지막 수학 시간에종모양의 면적을 구하는 적분 문제 하나에제대로 답을 못 쓴 것 같아 불안했다. 답은 1인데,그 증명 과정이 시간이 부족해서 마무리를 확실히 짓지 못했다.
시험일 보름 전에 미리 대학 근처의여관방 하나를 잡았다.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미리준비운동,즉현지 시차 적응, 공간 차의 극복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멀리떨어진 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닌지라,표준 말씨를쓰는 사람을 만나면,처음에 그 이상한 억양에 무슨 외계인 만나는 것처럼,잔뜩 기가 죽었다. 게다가,어른이고아이고 모두들 키가 크고,잘 생긴 얼굴에 흰 데다가 영화배우나 티브이에 나오는 드라마 주인공처럼근사해 보였다.
고등학교2학년 때,여자고등학교의음악 선생을하는졸업생 선배가여고 합창단을끌고 와서는대강당에서노래를지휘하였다. 하얀 합창단복을 입은50여 명이 나 되는천사들이꾀꼬리 같은목소리로우리들의마음을흔들어놓았다. 그러나우선이번입시에합격을 하는것이 중요했다. 그런데,면적을구하는적분 문제가 계속 마음에걸렸다. 시험 전에컨디션도좋지않았다. 여관방이라드나드는술 취한손님들의고함소리,옆방에서들러오는온갖소음,길거리의행상들의호객행위에잠을제대로잘 수가없었다.
교문 옆의한식을하는식당 하나잡아서삼시 세 끼를먹다가 보니,식당 주인 부부와친해졌다. 그래서,시험을치고내려오는 날,발표날부부 중한명이발표 장소에서확인 후,결과를보고 시골 동네에하나밖에없는전화번호를알려주면서꼭결과를알려달라고신신부탁을하였다. 거주지가시골로멀리떨어져있어어쩔 수가없었다. 발표장은옛날 과거시험 발표처럼,나무 기둥을 세우고 가마니로 벽을 만들고, 큰 종이 위에 큰 붓글씨로합격자 수험표 번호를 기재하여 알리는 식이었다.
하루가 지나갔다. 보통등록금을은행에납부까지는보름 정도의촉박한시간이있었다. 셋째 날대학교 입학관리사무실로전화를하였으나,계속통화 중이라연결이되지 않았다. 불통이었다. 시간은자꾸만흘러갔다. 식당으로부터연락이오지 않았다. 식당에도연결이안 되었다. 모든 것이불통이었다. 외로운 섬처럼 분리되고차단되었다.
닷새째 되는 날,점점포기하는마음이강하게일어났다. 그놈의면적 구하는적분문제 때문에불합격하였다고심증을점점 굳혀갔다. 종을엎어놓은것 같은모형에해당하는면적을구하는문제가나를편안하게내버려 두질않았다. 점점내가차지하고 있는인생의면적도줄어들고있다고생각하게되었다. 내가숨 쉴만한면적을구하는문제처럼, 나의 발목과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엿새째 되는 날모든 것을포기하고해인사 여행을하기로하였다. 아직도시간은며칠남아있었다. 해인사의주차장에서부터고려대장경이 있는건물을목표로걸어갔다. 응달에는아직도눈이쌓여있었고,녹아흘러내린질퍽한흙길은나의인생을무척많이닮아있다고생각했다.
커다란안내판에는아래와같은자세한 대장경판 내력이적혀있었다.
고려시대,외부의 적 거란,몽고등이 침입하자,불교를 숭상한 고려는부처님의힘으로적을막아내고자전쟁 중임에도제작하였다.
고려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장경의장경 판수가 팔판 여장에 이르는 데에서 비롯되기도 했을 터이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가리킬 때 팔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쓰는 용례대로 가없이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산벚나무 등으로 ,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한번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오천 이백만 자에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오늘날 몇몇 경솔한 사학자들이, 칼과 창을 들고 오랑캐와 맞서 싸우는 대신에 대장경을 만들기에 힘을 쏟은 그때의 염원을 무기력한 시대사조로 그릇 되게 평가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하며,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한 것이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 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 하여 1251년에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보관 과정도 험난했다. 지금까지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은기적,부처님의 힘이 아니었으면,불가능했을것이다. 세종 때는왜국이 끊임없이 통째로 달라는 것을거절하였다는 기록이 있고,임진왜란 와중에는 승려들과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6.25때도 인민군 900명이 해인사로 숨어들자 비행기로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편대장이 거부하여,잿더미로부터 보호되었다. 또한한때 점령하였던 인민군이 퇴각하기 전에불살라 버릴지를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였는데,1표 차이로거부되어 소실위기를 벗어났다. 그 1표가 화재로부터 대장경을 지켜낸 것이었다.
마치 영화의 파노라마의 장면처럼,대장경의 제작하는 광경이. 지리산 산벚나무에서 피어난 꽃들이 산 중턱에어지러이 흩날리는 광경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나무를베기 전에 정성껏 재를 올리는 모습에 이어,베어진 나무를 산아래 동네로 옮겨서,소달구지에 실어서 목공소로 이동했다. 현재의목판 크기보다 몇 배나 되는 크기로 켜서 그것을 낙동강의 나루터에서 배에 실려 남해바다로 이동하여 바닷물에 잠겨있는 원목이 떠올랐다. 삼 년을 바닷물 속에서 견딘 침목을 다시 낙동강 뱃길 따라 역으로 거슬려 올라와,전국의 이름난 목수들이기다리고 있는 목재소로 운반되었다.
제재가 끝난 원목에 닥나무 종이에 부처님 말씀을한자 한 획틀림이 없는 붓글씨 원본을 부쳤다. 이어서끌을 들고 나타난 목공들이 혼신의 힘과 정성을 다해 쪼아 나갔다. 한자를완성하면 큰 절을 한번 하고 다시 만들어 나갔다. 온 민족의힘과 기를 모아서,부처님께 나라를 구하여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렇게간절히 청하는데, 그 정성과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천년만년을 우리를 지배할 것 같았던적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고,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것이 이 땅이아닌가? 어디선가
"번뇌를 털고, 일어나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점점 짙어져 오는 저녁의 어두움 외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저녁의 법고 소리가 들렸다.
"두당 두당 두당 두당 ~"
쉴 사이 없이 들려오는, 가사를 입은 스님은 온 정성을 다해 나무 막대기로 북을 치기 시작하였다.
북소리가 멈추자, 법고를 치던 스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둘이서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합장 후 연꽃이 새겨진 바로 옆의 범종을 타종하기 시작하였다.
"당아앙-당아앙-당아앙-~"
문뜩 그 종의 모형이 수학 문제의 면적을 구하는 곡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불현듯 내가 적어낸 것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적을 수구는 2차원이 아니라 소리의 울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공간을 채워주는 3차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곡선이 어쩜 휘어진 부모님의 등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논 뚝에 연초록 어린 모를 바지게에 짠뜩 싣고 지게 작대기를 땅에 집고, "끙" 힘주어 일어서려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허리를 숙여 모를 정성껏 무논에 심는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보였다.
해인사 경내를 이동하던 중,어느고승의 누더기처럼 기워진 옷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패배자로피폐해지고 허물어진 나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을 주는 엄숙한 분위기와 그 옷의 주인공인 해탈한 납승(衲僧·누더기로 기운 옷을 입은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환각에 빠졌다.
"번뇌를 털고, 일어나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겨울의 짧은 해와 쌀쌀한 날씨의 산중의 산사에 관광객은 나만 혼자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 날이 어두워 오자 외지로 나가는 마지막 버스가 이미 출발한 지 30분이 지났다. 나는 백 리 길을걷기로 했다. 무작정걷기로 했다. 그래도달빛이 희미하게 비추어 주어서 다행이었다.그 빛마저 없었다면,나는 어느 집의처마 밑에서 추운 겨울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할지도 몰랐다.
비포장 도로라 커다란 호박돌이 발부리에 차이고 넘어지면서 미친 듯이,집을 향하여 밤새도록 걸었다. 구름에 가렸던 달무리가 나타나면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끔씩멀리서 들려오는 개들이 짖는 소리가 큰 위안이 되었다. 걷는동안 계속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를 호위하듯 뒤따르는 형상을 얼핏 보았는데, 낮에 보았던 바로 그 스님들, 납승(衲僧·누더기로 기운 옷을 입은 스님)과 가사를 입은 법고와 타종을 하던 스님들이 두른 두른 이야기 하며 나를 보호하는 어떤 형체를 보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번뇌를 털고, 일어나라"
마침내 백리 밤길의 긴 여정이동녘에 뿌였게 떠오르는 새벽빛과 닿았다. 새벽녘에열러 진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소리가 났다. 갑자기큰 방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더니,식구들이 방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큰형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형이 소리쳤다.
"니 합격했다아이가! 학교 정문 운동장 옆에 옛날 과거 시험 발표하던 것처럼, 합격자 명단을 붓글씨로 대형 종이 위에 써서 붙여 놓았더군. 내가 궁금해서 그 학교입시관리사무소에 가서 이거 찾아왔다." 흔들어 보이는 것이 합격증이었다.
또 하나의 사실은 식당 아주머니가 동네 이장댁에 며칠 전에 합격 사실을 알렸는데, 젊은 이장 부인에게 갑자기 산통이 와서 119로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면서 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어젯밤에 갓난아기를 안고 퇴원하면서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더라는 것이었다.
"해인사의 부처님한테 빌었더니 당장 효험이 있네" 모두들 무슨 소리인지하고 나를 둘러싸고서,나를 멀뚱히 쳐다보았다.동쪽 비슬산을 배경으로 희미한 구름이 걷히고,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