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해라”
스테이지 평가에서 1등부터 6등까지 모두 한국 학생들이 차지했다. 다음날 봐야 하는 FAA 테스트가 걱정이었다. 수업시간에 밥의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기출문제집인 셰퍼드를 많이 못 본 상태였다. 전날 늦게까지 공부하면서 피곤했지만 낮잠 잘 여유도 없었다. 도서관에 일찍 가서 셰퍼드에 있는 문제를 최대한 빨리 풀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저희 도서관은 30분 뒤인 12시에 곧 문을 닫을 예정이오니 이용객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서관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할 거야?”
“전 집에 가서 하려고요.”
“난 좀 자야겠어. 어제 스테이지 시험 준비한다고 한숨도 못 잤거든.”
“나도 가서 좀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할래요.”
나이가 제일 가장 어렸지만 가장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했던 K에게 물었다.
“너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요. 공부 더 하고 싶은데 집에 가면 집중 안 될 것 같고. 형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너 나랑 학교 가서 공부할래?”
“학교요?”
“응. 거긴 24시간 문이 열려 있잖아.”
10년 전 대학원 유학생활을 보냈던 샌프란시스코에는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이나 카페가 많았다. 그래서 과제를 하거나 시험 준비를 할 때 어김없이 집 앞 카페에 가서 밤새 머물다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비행학교가 있던 오클라호마 털사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가까웠다. 밤 10시면 모든 곳이 문을 닫았고 자정이면 인적이 끊기고 상가 건물의 네온사인마저 꺼지면서 온 동네가 암흑으로 변했다. K는 내 제안에 동의했다. 각자 차를 타고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역시나 공항으로 가는 길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편도 1차선 도로를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로 주변을 밝히며 운전했다. 공항 게이트를 지나 학교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들어 쏟아질 듯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봤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을 넋 놓고 즐겼다. 10여 분 뒤 K의 니싼 승용차가 학교로 들어왔다. 학교 문을 열고 스위치를 켠 뒤다. 학과 수업 교실로 이동했다. 낮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곳이라 그런지 집중이 더 잘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셰퍼드 문제를 K에게 물었고 K는 막힘없이 칠판에 내용을 적어가며 설명했다. 서로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그냥 답을 무작정 외우기로 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했다. 2시가 넘어가면서 졸음도 달아난 듯했다. 그렇게 네 시간을 더 공부하고 나니 전체 문제 양의 3분의 2는 다 본 듯했다.
“우리 차에 가서 잠깐 잘래? 아예 한숨도 안 자고 시험 보면 정작 집중 안 될 거 같은데.”
“그럴까요?”
점점 피로가 몰려왔다. 조금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았다. 10월 말 이른 새벽, 바깥 온도는 상당히 내려가 있었다. 둘은 각자 차에 타 히터를 켜고 잠을 청했다. 내 차는 경차라 그런지 K의 차보다 내부가 훨씬 더 추운 느낌이었다. 차 트렁크에 있던 담요와 겨울 점퍼를 온몸에 휘감은 뒤 운전석을 최대한 뒤로 밀어 다리를 뻗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쌀쌀했던 탓에 잠자리가 편 할리 만무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잠들었다. 그리고 8시에 맞춰 둔 휴대전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두 시간이 지났는데 30분도 채 안 잔 기분이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차에 누운 채 멍하니 학교를 바라봤다. 학교 셔틀버스가 도착하고 학생들이 하나둘씩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 학생들이 탄 차들도 하나둘씩 보였다. 다들 평소보다 일찍 등교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K의 차를 살폈다. 여전히 자고 있었다.
“일어나. 8시 넘었어.”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응. 넌 잘 잤니?”
“네. 진짜 꿀잠 잤어요.”
나는 K를 데리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단골집 도넛 가게로 갔다. 학교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도넛 가게는 새벽 5시면 문을 여는데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밤 12시엔 출근해서 낮 12면 문을 닫는다. 밤낮이 바뀔 정도로 부지런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미국인들보다는 한국이나 중국 이민자들이 도넛 가게를 많이 운영했다. H에 따르면 도넛 가게 한 달 매출이 상당하다고 했다. 몇몇 학생들 사이에선 비행을 중단하고 도넛 가게를 차리는 게 더 큰돈을 벌거란 얘기도 오갔다. 그 도넛 가게가 내 단골집이 된 이유는 도넛보다 사실 커피 맛 때문이었다. 이 집 원두커피 맛은 뭐랄까? 그다지 쓰거나 텁텁하지 않았다. 맛이 연하고 깔끔해서 자주 마셔도 위에 부담이 전혀 없었다. 나는 쟁반에 소시지가 든 빵과 초코 도넛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백발의 할머니 점원분이 나를 반기셨다. 한국인 손님이 드문 데다 새벽 이른 시간에 자주 뵙다 보니 서로 얼굴을 알고 안부를 건넬 정도로 어느 정도 친분이 쌓여있는 사이였다.
“저희 커피 둘 추가할게요.”
그날도 할머니는 커피 값을 받지 않으셨다. K와 테이블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따뜻한 온도의 커피가 온몸에 퍼지면서 온기가 돌았다. 커피의 쌉싸름함이 사라지기 전에 초코 도넛을 한입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달달함이 채워졌고 도넛 안에 있던 엄청난 양의 당이 선잠으로 남아있던 몸 안의 피로를 풀어주는 듯했다.
학교로 돌아오자 밥이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는 나와 Y, K를 FAA 시험장으로 안내했다. 스테이지 평가에서 1, 2, 3등을 한 선발대 학생들이었다. 평가시험은 모두 컴퓨터로 진행됐는데 3시간 안에 60문제를 풀어야 했다. 시간은 충분했으나 문제 수준이 까다로웠다. 다행히 K와 함께 풀었던, 셰퍼드에서 본 문제 유형 여러 개가 숫자를 바꾸거나 보기 순서를 바뀌는 등 응용돼 출제됐다. 문제를 풀고 다시 한번 검토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시험 종료 버튼을 클릭하자 그 자리에서 성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91점. 자가용 면장 학과시험 성적보단 떨어졌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10여 분 뒤 환한 표정의 K가 시험장 밖으로 나왔다.
“잘 봤어?”
“네. 형.”
“점수는?”
“100점이요.”
“대단하다. 축하해.”
계기 학과시험은 미국 학생들조차 70점 이상만 받아도 기뻐할 정도였다. 그런 난이도가 높은 시험에서 K가 만점을 받은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밤새 공부한 것이 크게 도움됐다면서 자축했다. 학교로 돌아오자 같은 반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시험 점수와 난이도를 물었다. 합격점수를 받고 시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이 편안했다.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 같다. 물론 그 몰입하는 과정마저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