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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28. 2020

체어 플라이트

“놀면 뭐해?”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은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이다. 이 시기에는 학교나 관공서, 기업 모두 문을 닫고 백화점 같은 유통가에선 폭탄세일에 들어간다. 또 가족들과 함께 미뤄뒀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유통업계와 관광업계로선 놓칠 수 없는 최대 성수기인 셈이다. 계기비행 스테이지 체크를 불과 하루 앞두고 비행 학교가 열흘간의 휴가에 들어가면서 연말까지 계기 과정을 마치려던 내 계획은 무산됐다.


태국 친구들과 파나마 친구들은 텍사스로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며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사촌누나가 있는 LA나 잠깐 다녀올까 생각했지만 그 역시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계기 과정을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찝찝함이 컸다. 크리스마스 전날엔 한국 친구들과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고 다음날 D와 함께 집에서 김장을 했다. 난생처음 만든 김치였다. 공군 부사관으로 항공기 정비와 로드마스터로 근무해온 D는 요리 능력이 출중했다. 그를 따라 월마트에서 배추도 사고 한인마트에 가서 고춧가루와 액젓, 양파 등 김장 재료를 구입했다. 전날 소금물에 재워뒀던 배추는 숨이 죽어 크기가 확연히 줄어 보였다. 김치 속을 만들어 절임배추에 구석구석 넣고 버무렸다. 김장하면서 중간중간 맛 본 겉절이 맛은 적당히 맵고 식감이 아삭하니 처음 만든 것치곤 제법 그럴싸했다. 점심 초대를 한 J의 집에 갓 만든 김치를 들고 D와 함께 방문했다. 삼겹살을 에어 프라이기에 구워 가져온 김치와 먹었는데 궁합이 잘 맞았다. 연휴의 이틀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막상 할 일이 없었다. 남은 일주일 뭘 하며 보낼지 생각하며 책상을 정리하다 사업용 과정을 마친 Y가 건네 준 멀티 엔진 체크리스트가 보였다.


‘그래. 계기 과정 마치면 어차피 외워야 하는 거니까 미리 공부하자.’


깨알같이 작은 크기의 글자로 이뤄진 체크리스트는 16장에 달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언제 다 외우지?
멀티 엔진 비행기 BE-76 모델 N312CM 칵핏 내부


여태껏 배우고 다뤄왔던 비행기는 모두 단발 엔진이었다. 하지만 멀티는 엔진이 두 개다 보니 외워야 할 기동 절차가 더 많고 복잡했다. Vmc 등 처음 보는 생소한 용어들도 많았다. 내용을 이해하고 외우면 쉽게 암기가 가능한데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공부하다 보니 낯선 문자를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기분이었다. 체크리스트를 보면서 멀티 과정은 엔진 하나가 고장이 났을 경우를 대비해 조종사가 어떻게 비행기를 안전하게 운항하고 공항에 무사히 착륙시키는지가 핵심 과제로 보였다. “K야. 나 멀티 체크리스트 외우고 있거든.”

“형? 아직 계기 안 끝내셨잖아요?”

“응. 근데 연휴 동안 할 것도 없고 해서 보고 있어. 너 시간 되면 체어 플라이트 같이 해 줄 수 있어?”

“네. 그럼요.”

BE-76 모델 N312CM에서 체어 플라이트


체어 플라이트(chair flight)
: 조종석이나 일반 의자에 앉아 이륙부터 착륙까지 실제 비행하는 것처럼 체크리스트에 나와 있는 기동 절차를 모의 훈련하는 것.


나보다 먼저 멀티 과정을 시작한 K에게 체어 플라이트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체어 플라이트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시뮬레이션 과정인데 비행 훈련 내내 상당히 도움이 됐다. K는 이왕 할 거 실제 비행기에서 하자며 학교 행어로 함께 갔다. 전날 폭설이 오는 바람에 행어에 있는 비행기들 동체 위에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학교에서 사용한 멀티 엔진 비행기는 ‘더치스’란 기종이었는데 상당히 오래된 비행기였다. 칵핏은 세스나 172에 비해서 상당히 넓었고 요크 무게감도 훨씬 많아 보였다. 단발 엔진과 달리 스로틀과 믹스처, 프롭 레버가 색깔별로 각각 2개씩 나란히 6개가 가운데 있었다.


체어 플라이트 중 BE-76 모델 N312CM

“제가 파워 온 스톨부터 보여드릴게요.”

“응.”

“Fuel selector on. Quantity, Pressure Green. Cowl flaps open. Mixture Rich. Fuel pumps on...”


나는 K의 동작을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체크리스트에 나와 있는 모든 기동 절차를 한번 시연하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바깥 기온이 워낙 낮다 보니 요크나 레버 잡는 손이 상당히 시렸다. 한 번 더 K에게 보여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추운 날씨 탓에 미안함이 앞섰다. 그날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서 체크리스트를 다시 보니 이해가 훨씬 빨랐다. 새해를 앞둔 내 연말 연휴는 체크리스트 암기로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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