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비행 평가를 합격한 나는 사업용 조종사 과정 담당 교관인 캐년을 찾아갔다.그는내게 멀티 엔진 비행기 더치스(Beechcraft Model 76 Duchess) 체크리스트를 줬다. J로부터 건네받아 연휴 동안 공부했던것과 동일한 자료였다.
“이것부터 우선 외워와.내가 교관 배정해 줄게.”
이미 90% 가까이 외웠지만 하루 이틀 정도 더 공부해서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연휴 동안 선행 학습을 했다는 말을 캐년에게 하지 않았다. 자료를 들고 교실로 돌아왔더니 학생들이 한데모여서 웅성거렸다.
“교관으로 캐년 배정받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다음 차례는 윌일 거야. 윌 학생이 지금 세 명이라 한 명 더 받을 수 있어.”
“스티븐도 좋은데.”
멀티 엔진 BE-76 모델 N312CM 칵핏 내부
사업용 과정을 시작한 학생들은교관을 누구로 배정받을지궁금해했다.툰지와 잭으로부터 자가용과 계기 과정을 배운 나는교관 운이 남들보다 좋다고 자부했다. 내 운은 딱 거기까지 였다. 나는 이틀 동안 체크리스트안에서 헷갈리는 부분을 집중적으로외운뒤 캐년을 찾아갔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다 외웠으니까.”
“뭐? 이틀밖에 안됐잖아.”
“사실 연휴 때 미리 자료 구해서 공부했어.”
“그래? 그럼 시작해봐.”
“Take off. Taxi into position in runway. Increase throttle in 2200 RPM. Check all engine instruments indicating green...”
체크리스트 내용을 다 말하는 데만 30분이 흘렀다.
“잘했어. 공부 많이 했네.”
“고마워.”
“교관을 정해줘야 하는데. 누구로 할까?”
‘제발 윌이나 스티븐 배정해줘. 제발 부탁이야.’
나는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너 교관은 나야.
"뭐?"
속마음을 최대한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가 내 교관이란 얘기를 듣자마자 황당한 표정과 함께 외마디 단어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싫어?”
학교에서 가장 악랄하기로 소문났던 마이크(왼쪽)와 캐년(오른쪽)
캐년이 날노려보며 말했다. 내 표정에서 언짢은 반응을 알아챈 낌새였다. 나는 말을 둘러대며 다른 교관들의 상황을 물었다.
“아니. 네가 멀티 담당이니까 다른 누구보다 잘 알아서 좋은데. 윌이나 스티븐은 안 돼?”
“윌은 교관과정 학생들 맡고 있고 스티븐은 곧 학교 관둘 거라 안 돼.”
“알았어.”
“너 내가 네 교관이 돼서 기분 안 좋구나.”
“아니. 나 지금 기분 엄청 좋아.내가 원래 감정 표현이 좀 약해.”
굳은 얼굴로 사무실을 나오는데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준, 교관 누구야?”
“나 캐년 배정받았어.”
“오 마이 갓!”
“다행이다. 캐년 안 받겠다.”
파나마와 태국 학생들은날 놀려댔다. 체크리스트 테스트를 앞두고 있던한국 학생들은 날위로하는 척하면서 캐년 대신 다른 교관으로 배정받을 확률이 높아진 데 대해 다들 기뻐했다. 캐년은키가 크고 덩치도 산만한데다 걸핏하면 정색한 얼굴로 버럭 소리지르는 등 성격이 불같았다. 구술 시험에서 학생들이 대답을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한쪽 입고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는 비열한 미소를 지은 뒤 허점을 파고들어 가차 없이 탈락시켰다. 비행 평가도 깐깐했다. 그와 한번이라도 비행해 본 학생들은 하나같이 주눅 들고 자신감잃은 표정이었다. 캐년과의 불화로 유학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이들도있었다. 한 태국 학생은 1년 넘게 4만 달러가 넘는 돈을 쓰고도 자가용 면장 하나 없이학교를 떠나야 했다. 캐년은 그 학생이 함량 미달이라 더이상 교육 진행이 어렵다고 랜든에게 말했다. 걱정이 앞섰다. 매일 그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했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캐년을 교관으로 배정받은 H를 찾아가 물었다.
“캐년 어때?”
“형. 저 어제 시뮬레이터 수업하다 울었어요.”
“왜?”
“자꾸 실수하니까 막 뒤에서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한국 학생들 가운데 성격이 가장 해맑고 유순했던 H는 캐년 얘기에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파나마 유학생 리더로 늘 씩씩한 모습을 보이던 데브라마저도 캐년과 수업하다 눈물을 쏟았다고 말했다. 불안했다. 얼마 남지 않은 비행학교 생활이 그리 순탄치 않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