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쌀쌀해진 새벽 찬 기운에 잠에서 깼다. 반쯤 뜬 눈으로 머리맡에 있는 커튼을 한 손으로 열어젖혀 창문 바깥을 쳐다봤다. 주차장에 있는 차들과 도로, 건물들이 간밤에 내린 눈으로 덮여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기 위해 나온 몇몇 사람들이 빗자루 같은 도구로 차에 쌓인 눈을 열심히 쓸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잔뜩 찌푸린 눈으로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시계를 봤다. 아침 7시였다.
“오늘 학교 늦게 가도 되겠네.”
하품하며 혼잣말을 내뱉고 이불을 광대까지 끌어올려 다시 잠을 청했다. 미국의 중부 내륙지방은 변화무쌍한 날씨로 유명했다. 특히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예측 불가능한 날씨가 이어졌다. 오전까지 햇살 가득한 화창했던 날씨가 오후 들어 장대비가 쏟아지는가 하면 한 달여 동안 집 밖을 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거센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기도 했다. 비행의적은 날씨다. 세스나 같은 작은 비행기일수록 운항하는데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바람이 기준치 이상일 경우 학교에선 비행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학생조종사들은 언제나 비행 전 항공 전문 기상 예보관에게 연락해 날씨를 꼼꼼히 확인해야 했다.
BE-76 N57RT 플랩과 에일레런 위에 생긴 아이싱
불과 한 주 전 까지만 해도 잔잔했던 가을바람에 비행하기 최적의 조건이었던 날씨가 사나흘 전부터 심상찮게 바람이 강해지더니 급기야 전날부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행기엔 아이싱 현상이 나타났다. 학교에선 날개 위에 생긴 얼음 표면이 자연스럽게 녹기 전까지 비행을 금지했다. 실제로 이 아이싱 문제로 인해 지난 2016년 국내 비행교육원에서도 추락사고가 발생해 교관과 학생, 두 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이싱(icing) : 비행기 동체, 특히 날개 부분에 얇은 얼음막이 생기는 것. 비행기는 공기가 부드럽게 굴곡진 날개 표면을 따라 흐르면서 날개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압력 차이로 양력을 발생시키는데 아이싱이 생기면 날개 표면에 생긴 울퉁불퉁한 얼음 표면 위를 공기가 지나면서 난류를 발생시켜 양력이 줄어든다.
그날 아침 오전 10시에 솔로 비행 스케줄이 있었는데 자동 취소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찾아온 늦잠 기회에 이불속이 주는 포근함과 안락함을 더 즐기고 싶었으나 몸만 여러 차례 뒤척이다 일어났다. 찌뿌둥한 느낌에 더 이상 잠들지 못했다. 한참이나 따뜻한 샤워로 몸을 녹인 뒤 아침을 거른 채 밖으로 나갔다.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내 차 역시 사방이 눈으로 가득 쌓여 있었고 창문과 차 문 손잡이는 얼음이 얼어 열기가 쉽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서 물과 알코올을 2대 8 비율로 섞어 넣어 둔 분무기를 들고 나와 차 창문과 손잡이에 뿌렸다. 잠시 뒤 꽁꽁 언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뿌리고 난 뒤 차 트렁크에서 차량용 빗자루를 꺼내 나머지 눈을 쓸어냈다.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갔더니 내부가 석빙고처럼 한기로 가득했다. 양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어 손을 녹인 뒤 시동을 걸었다. 히터를 켰지만 차가운 바깥 기온 탓에 찬바람이 불어 나왔다. 가방 안에 넣어둔 털모자를 꺼내 귓불을 덮을 정도로 꾹 눌러썼다. 와이퍼로 더러워진 창문을 닦으면서 서서히 액셀을 밟아 집을 나섰다. 출발한 지 5분이 지나서야 서서히 따뜻한 공기가 차 안을 메웠다. 기어를 쥐고 있던 시린 오른손을 히터 앞에 갖다 대며 손가락을 비벼댔다. 학교에 도착했는데 주차장에 차들이 평소보다 훨씬 적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이 비행 스케줄을 죄다 취소하고 집에 머물기로 한 모양이었다. 몇몇 부지런한 한국 학생들만 일찍 학교에 나와 공부하고 있었다.
“논, 애들 없는데 여기서 혼자 뭐해?”
“공부하고 있지. 비행 있었는데 취소됐어. 넌?”
“나도. 심심한데 행어나 둘러볼래?”
“그래.”
태국유학생 논과 바깥으로 나와 눈 쌓인 행어를 천천히 걸었다.
“자가용 과정은 잘 돼가?”
“응. 곧 있음 엔드 오브 코스야.”
“금방이네.”
“넌? 계기는 어때? 재밌어?”
“응. 재밌어. 마치 비디오 게임하는 기분이랄까? 근데 창밖을 못 보고 계기만 들여다보니까 가끔 멀미하기도 해.”
간밤에 내린 눈으로 연료 캡 뚜껑마저 꽁꽁 얼어버린 상태 BE-76
우리는 행어에 묶여있는 비행기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역시나 날개 위에 얼음이 표면이 울퉁불퉁 거칠었다.
“이거 그냥 알코올 뿌리면 안 되나?”
“하하. 그래도 될 걸. 교관들 가끔 뿌려서 없애는 거 몇 번 봤는데.”
“그럼 랜든한테 엄청 혼나겠지?”
“비행 한 달간 금지당할지도 몰라.”
논과 얘기를 나누며 학교 안으로 돌아오는데 파마나 유학생 몇몇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서로 눈을 던지고 맞으며 자기네들끼리 껄껄대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다 보니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들은 세상 태어나서 처음 눈을 본다고 했다. 파나마에선 눈 구경이 불가능하니까. 살다 보면 예기치 않게 일을 중단하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성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면 일을 그르치거나 화를 입기도 한다. 그럴 땐 신이 허락한 휴식시간이라 생각하고 여유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