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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29. 2020

달빛에 취한 야간 비행

“낭만을 즐겨라”

어두컴컴한 밤, 샛노란 달빛이 애머릴로 밤하늘을 유영하는 57 로미오 탱고항로를 안내. 기수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달 표면에 금세 닿을 것만 다. 잔잔하고 감미로운 드뷔시의 달빛(Debussy_Claire de lune)의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떠올랐다. 세상이 온통 달빛에 취한 듯 고요하고 낭만적인 밤이었다.


1년간 백여 차례의 비행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스티븐과 함께 멀티 엔진 크로스컨트리 비행으로 텍사스 북서부에 위치한 에머릴로로 떠났다. 애당초 캐년과 비행하기로 돼 있었지만 학생 평가 비행으로 그의 스케줄이 변경되면서 스티븐과 비행하게 다. 왕복 일곱 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캐년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학교에서 가장 유쾌하기로 소문난 스티븐과 함께여서 더 좋았다. 스티븐은 지루할 틈 없이 비행 내내 내게 농담을 던졌다.


"너 혼자서 잘할 수 있지?"

"응. 근데 왜?"

"난 옆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야."

"그러다 내가 졸면 어쩌려고?"

"너 잊었어?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애가 넷이야."


스티븐과 함께 한 멀티엔진 크로스컨트리 비행 BE-76


그와 잡담을 주고받다 보니 시간이 넘는 비행이 상당히 짧게 느껴졌다. 공항에 착륙한 뒤 FBO에 주유를 맡기고 은 차를 타고 도심으로 나갔다.


FBO(Fixed Base Operator)
: 항공 당국으로부터 공항 운영권을 위임받은 사설 업체로 주유 등의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며 렌터카를 무료로 빌려주기도 한다.


준. 저녁 뭐 먹고 싶어?”

“텍사스 왔으니까 고기 먹어야겠지?”

“그래? 그럼 내가 여기서 가장 유명한 식당으로 안내할게.”

“좋아.”


애머릴로는 가축사육 목장과 농장이 많은 곳이었다. 30분을 차로 달려 어느 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규모가 제법 큰 스테이크 전문 식당이었는데 입구 앞에 세워둔 모형 황소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평일 오후였음에도 길게 줄이 서 있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맛 집이었다. 스티븐과 난 한 시간 동안 실컷 고기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텍사스 애머릴로에서 맛본 스테이크

“스티븐. 너 학교 관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응. 이번 달 까지만 여기서 일할 거야.”

“넌 왜 항공사에 안 들어가? 이미 비행시간도 충분하잖아.”

“난 교관 생활이 좋아.”

“페이도 훨씬 적고 일은 많은데 왜 좋아?”

“가족들이랑 늘 같이 있을 수 있잖아. 항공사 들어가면 며칠씩, 많게는 몇 주씩 집을 나와 있어야 하는데 그럼 가족들을 못 보잖아. 난 그렇게 못살아.”


스티븐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지난해 추수감사절에 그의 집에 초대받아 갔었다. 자녀를 넷이나 둔 가장이었고 아이들 모두 홈스쿨링으로 교육시켰다. 교관 생활해서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려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피곤한 기색을 내보이거나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학생들에게 화내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새벽 일어나 차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학교로 출근해 밤늦게까지 비행하고 귀가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열심히 사는 그의 모습이 멋있었고 그를 닮고 싶었다.

스티븐과 함께 간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 앞에서


그와 난 식사를 마치고 황소 모형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공항으로 복귀했다. 하늘엔 불그스름한 노을이 회색빛 어둠 사이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기름 탱크에 연료가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칵핏에 올랐다. 관제사 안내를 받아 활주로로 향했다. 공항 인근에 공군기지가 있던 터라 커다란 군용 수송기가 여러 대 보였다. 그 비행기뒤로 이륙 허가를 받10여분 동안 대기했다. 그 사이 해는 지고 하늘 깜깜해졌다.


"Five Seven Romeo Tango, clear for take off."

-57 로미오 탱고 이륙 허가.


바닥에 놓인 형형색색 활주로 등에 의지해 파워를 넣고 서서히 이륙했다. 7500피트 상공까지 올라간 뒤 순항하기 시작했다.


 “준, 저기 좀 봐.”


스티븐이 손으로 가리키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입을 벌리고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엄청나게 커다란 크기에 압도당할 것만 같은 둥근달이 샛노랗게 떠 있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태어나서 달을 가장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보다니.”

“아름답지?”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티븐이 내게 물었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보름달이 내뿜는 노란 빛줄기에 하늘은 대낮처럼 환했다. 달빛에 취한 듯 우리는 말없이 밤하늘의 무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 누워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밝게 빛나던 별들을 본 이후 그토록 아름다운 밤 처음이었다. 황량하고 어두운 하늘에 아련하게 번지던 그날의 달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텍사스 애머릴로에서 오클라호마 털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밤하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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