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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29. 2020

도박이 된 도전

“스스로 의미를 찾아라”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늦가을, 영종도 오성산 중턱 전망대에 오르자 연파랑 하늘과 층층이 떠 있는 솜뭉치 구름 아래 넓은 인천국제공항이 보였다. 길이 70m, 무게 400톤이 훌쩍 넘는 육중한 몸매의 보잉 747이 활주로를 힘껏 달리다 가볍게 하늘로 이륙했다. 항공기가 날기 위해서는 자연의 힘을 극복해야 한다. 유선으로 된 비행기는 공기 마찰로 인한 항력으로 전진을 방해받는다. 그러나 엔진에서 발생하는 추력으로 그 항력을 극복한다. 중력은 항공기 자체 무게에 승객, 승무원, 연료, 화물 무게까지 더해 아래로 끌어당긴다. 대신 날개 압력 차로 발생되는 양력이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해 항공기를 부양시킨다. 2020년 전 세계 항공사는 코로나19라는 난기류를 만나 추력과 양력을 잃었다.


미국에서 조종사 면허를 받고 왔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국내 항공사들은 신입 부기장을 뽑을 때 대한민국 사업용 조종사 면허 소지자를 자격조건으로 두기 때문에 미국 면장을 국내 면장으로 전환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국내 사설 비행교육원에 또 등록해야 한다. 실기시험 준비를 위한 6시간 비행 계약에만 200만 원이 들어간다. 비행은 주로 양양이나 무안국제공항에서 진행되는 만큼 교통비 숙식비는 별도다.


국내 면장을 받아도 일단은 기다려야 한다. 항공사 부기장 공채가 정기적으로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채가 열려도 3차에 걸친 테스트와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최근에는 항공사 기출문제 '족보'를 제공하는 족집게 학원까지 등장했다.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주고 기출문제를 제공하는데 두 달 학원비가 또 200만 원이다. L은 서울에서 자취하며 이 비용을 내고 공부했다.


2019년 10월 기다리던 신입 부기장 채용공고가 떴다. 제주항공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서류전형에서만 수백 명이 탈락했다. '사이테이션(특정 기종 명칭) 제트레이팅' 자격 보유자만 서류전형 합격 통보를 받았다. 제트레이팅이란 제트엔진 기종 자격을 말하는데, 이를 따려면 2주~1개월가량 소요되고 2,000만 원 정도가 든다. 제주항공은 과거 국내 항공사 가운데 제트레이팅 교육비용을 회사에서 지원했던 유일한 항공사였지만, 이제는 공채 지원 전 제트레이팅 자격 취득이 사실상 필수가 된 것이다.


함께 미국 비행학교를 다녔던 10명 가운데 유일하게 사이테이션 제트레이팅 자격을 갖고 있던 Y만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그나마 Y도 필기시험과 시뮬레이터 평가를 통과하고 실무진 면접까지 봤지만 최종 합격 명단에는 들지 못했다. 당초 두 자릿수를 뽑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일본 불매 여파로 채용 인원이 한 자릿수로 축소됐다. 그리고 새해 들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바이러스 세상이 찾아왔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스스로 교육비를 지불하고 부기장으로 근무하는 '카뎃(cadet)'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외국항공사와 단기 근로계약을 맺고 억대 교육비를 낸다. 베트남 뱀부항공은 17만 달러(한화 약 1억 9,000만 원), 터키 페가수스항공은 12만 달러(1억 4,000만 원)를 받는다. 숙식비는 별도다. 사업용 면장을 따는데 1억 원을 쓴 것도 모자라 또다시 거액을 투자한다. 계약기간에는 정상 입사자보다 수당도 훨씬 적다. 그럼에도 부기장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 쓰겠다는 지원자들이 줄을 섰다. 코로나19로 국내 항공사 채용이 차단되면서 이런 카뎃 지원자를 유혹하는 외국항공사 중개 대행업체는 더 늘었다. 항공사와 대행업체가 훈련생이 낸 돈을 어떻게 나눠 갖는지 알 수 없다. 항공 취업시장은 점점 도박판이 돼가고 있다.


조종사 대신 교관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미국 비행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S(28)는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유학 온 케이스였다. 한국 학생 중에서 가장 어렸지만 열정이 넘쳐 빠르게 면장을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양양공항에서 면장 전환을 한 그는 공채만 손꼽아 기다렸다. 일본 불매운동 파동으로 채용문이 닫히자 일단 사설 비행교육원 교관과정에 등록했고, 지상학술 3개월, 비행실습 6개월을 거쳐 교관 자격증을 취득했다. “교관 과정 시작한 게 올해 초였어요. 1년 정도 지나면 한일 관계도 개선돼 모든 게 정상화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진 거죠."


교관이 비행시간당 받는 수당은 2만~2만 5,000원이다. 20~30달러를 받는 미국 교관과 비슷하지만 날씨에 따라 수입은 불규칙하다. 아시아나항공과 저비용항공사가 요구하는 비행시간은 300시간, 대한항공과 진에어는 1,000시간이다. 3년 동안 비행해야 쌓을 수 있는 시간이다. 적은 수당을 감수하고 교관 생활을 하려는 이유다. “교관이 되면 학생을 가르치면서 비행시간도 쌓을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안개와 비 때문에 비행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아요. 날씨 변수 때문에 한 달에 내가 얼마나 비행시간을 쌓을 수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게 문제입니다."


교관과정에 등록한 사람들은 20대 후반~40세까지 다양했다. 평균 연령은 34세. 기혼자, 가장들도 많다. 다들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속앓이가 심하다고 했다. 9개월 동안 교관 자격을 취득하는데 든 비용은 1,200만 원, 양양에서 원룸 방값과 서울-양양 시외버스 교통비 및 생활비까지 더하면 2,000만 원 넘게 들어간다.


코로나 이후 국내 사설 교육원에서 비행을 배우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 항공사뿐만 아니라 교육기관까지 직격탄을 맞았다. S는 당분간 비행을 접고 일반기업 신입 대졸 공채의 문을 두드리겠다고 했다. 2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꿈을 접고 다른 길을 준비해야 하는 20대 청년의 얼굴빛은 어둡기만 했다. 하나의 꿈을 향해 만났던 비행학교 동창들의 운명도 코로나19로 인해 모두 달라졌다. 휴직하고 비행 유학을 왔던 이들은 대부분 원래 자리로 복직했다. 사표를 내고 왔던 사람 중 일부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직장에 들어갔다.


사실 비행 유학은 어쩌면 도박에 가깝다. 취업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1년에 평균 1억이란 거액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국 유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오던가 아니면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오는 것 같다. 후자의 경우 간혹 기혼에 자녀까지 둔 경우도 많은데 정말 용기 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항공업계에서는 여전히 조종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행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 기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작 국내 항공사에 신규 조종사로 취업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입사경쟁을 치러야 한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란 옛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어렵다. 불편한 한일 외교관계와 코로나 19로 인해 2019년 말부터 시작된 항공업계 불황은 수천 명의 비행 유학생들과 학생 조종사들을 좌절시켰다. 대형 항공사 부기장 연봉에 버금가는 월급을 받으며 안정된 공기업 생활을 관두고 비행 유학을 온 한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도전이 도박이 됐어요.
Cessna 172 야간 계기 비행



해마다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비행 자격증을 따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다. 이미 언론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것처럼 자격증을 갖고도 항공사 취업하지 못하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하다. 정부는 선선발 제도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된 듯하다. 특정 항공사의 경우 선선발로 채용한 학생들을 최종 면접 단계에서 지원자의 30퍼센트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또 항공사는 정부 정책상 항공운항학과 출신들과 울진 비행교육원 출신들을 어느 정도 채용해야 하는 탓에 실제로 미국 유학생 및 국내 사설 비행교육원에서 자격증을 취득한 지원자들의 취업률은 상당히 저조하다. 애초에 중국처럼 선선발 학생들만 조종사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기회비용 낭비를 막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직업 선택의 기회와 자유를 박탈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4년 전 국내 한 유명 TV 앵커는 뉴스에서 조종사 자격증을 갖고도 항공사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을 '비행 낭인(浪人)'이라고 소개했다. ‘고시낭인’에 빗댄 말이었다. 해당 보도는 유튜브 조회수 125만 건을 넘었고 비행낭인은 일반 명사화됐다. 그러나 낭인이란 말은 모욕적이다. 낭인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직업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빈둥빈둥 노는 사람을 말한다. 주인 없이 떠도는 일본의 방랑 무사, 사무라이를 가리키는 일본말에서 온 단어다. 고시생이든 조종사든 꿈을 갖고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 이들에게, 현실의 벽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 낭인이란 꼬리표를 붙이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우리는 하늘을 나는 꿈을 잠시 접었지만 결코 버리지는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올 것이라 믿는다. 다시 요크를 잡고 바람을 가르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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