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 5년 차, 매일 발생하는 사건 사고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침마다 해야 하는 발제 아이템은 출입처에서 던져주는 보도 자료에 의지했고 퇴근 후 취재원을 만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히 단독 보도도 뜸해졌다. 장소와 사람만 달라질 뿐 어제와 비슷한 사건 사고 소식,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지도 못하면서 걸핏하면 내놓는 정부의 새 부동산 정책, 보수와 진보 둘로 나뉜 세상 속에 서로 물고 뜯는 정치 이슈로 가득한 뉴스에 염증이 났다. 시청률 0.1퍼센트 더 올리겠다며 자극적인 아이템만 고집하는 회사 보도에도 이골이 났다.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지쳐가고 있었다. 한국 기자상까지 거머쥐었던 모 선배가 내게 말했다.
엉덩이가 무거워지면 기자는 그때부터 죽은 거나 다름없어.
사회부 근무 당시 법원 앞 생중계하던 모습
그의 말대로 ‘기자’였던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삶의 의욕마저 잃은 듯했다. 당장 대책이 필요했고 나는 이직을 선택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일하다 보면 잃어버렸던 기자로서의 초심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직을 하는 건 마치 재혼하는 것과 같다.
이직 경험이 있던 사회부장의 조언을 좀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새 환경에 적응하는 건 나이가 서른 넘어서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업무 시스템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고 나이 어린 후배의 건방진 텃새도 이겨내야 했다. 1년쯤 지나자 고민 상담하러 오는 후배와 주말마다 함께 등산하는 선배가 생길 만큼 새 회사에 제법 잘 적응했다. 문제는 그렇게 몸이 편해질 즈음 전 직장에서 가졌던 불만과 매너리즘이 스멀스멀 반복되기 시작했다. 이도 저도 아닌, 정권 눈치보는 보도에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모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그녀는 이런 말로 날 위안했다.
솔로 크로스컨트리 Cessna 152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어.
그래서 난 새로운 것을 찾아 하늘 위로 가보기로 했다. 경험하지 못한 하늘을 날고 싶었다. 무모한 도전일지라도 처음 카메라 앞에 마이크를 들고 생중계하며 가졌던 설레는 감정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떠났다. 마음껏 날면서 만끽한 끝없는 자유와 짜릿함, 그리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자연의 아름다움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 경험이 그리울 때 언제나 헤드셋 가방을 들고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간 함께 같은 하늘을 날던 이들은 내 평생의 소중한 인연이 됐다. 삶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남은 내 삶의 긴 여정 속에서 맞이할 또 다른 여행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조종사는 플라이트 플랜(비행계획서)에 맞춰 운항하다가도 예기치 못한 난기류를 만나면 항로를 수정한다. 인간은 모두 자기 삶의 조종사며 인생은 긴 항로를 지나가는 비행이다. 100년 전 하늘을 나는 차를 꿈꿨던 헨리 포드의 말로 글을 마친다.
“만약 모든 일이 너에게 불리하게 되어 가는 것 같을 때면 기억하라. 비행기는 바람을 가르고 이륙하는 것이지, 바람의 힘으로 이륙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