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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29. 2020

더치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계기 비행 평가를 합격한 나는 사업용 조종사 과정 담당 교관인 캐년을 찾아갔다. 그는 내게 멀티 엔진 비행기 더치스(Beechcraft Model 76 Duchess) 체크리스트를 줬다. J로부터 건네받아 연휴 동안 공부했던 과 동일한 자료였다.


“이것부터 우선 외워 와. 내가 교관 배정해 줄게.”


이미 90% 가까이 외웠지만 하루 이틀 정도 더 공부해서 완벽하게 준비고 싶었다. 연휴 동안 선행 학습을 했다는 말을 캐년에게 하지 않았다. 자료를 들고 교실로 돌아왔더학생들이 한데 여서 웅성거렸다.


교관으로 캐년 배정받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다음 차례는 윌일 거야. 윌 학생이 지금 세 명이라 한 명 더 받을 수 있어.”

“스티븐도 좋은데.”

 

멀티 엔진 BE-76 모델 N312CM 칵핏 내부 


사업용 과정을 시작한 학생들 교관을 누구로 배정받을지 궁금해했다. 툰지와 잭으로부터 자가용과 계기 과정을 배운 나는 교관  남들보다 좋다다.  운은 딱 거기까지 였다. 이틀 동안 체크리스트 안에서 헷갈리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외운 캐년을 찾아갔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다 외웠으니까.”

“뭐? 이틀밖에 안됐잖아.”

“사실 연휴 때 미리 자료 구해서 공부했어.”

“그래? 그럼 시작해봐.”

“Take off. Taxi into position in runway. Increase throttle in 2200 RPM. Check all engine instruments indicating green...”


체크리스트 내용을 다 말하는 데만 30분이 흘렀다.


“잘했어. 공부 많이 했네.”

“고마워.”

교관을 정해줘야 하는데. 누구로 할까?”


‘제발 윌이나 스티븐 배정줘. 제발 부탁이야.’


나는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너 교관은 나야.

"뭐?"

속마음을 최대한 감추려고 애지만 그가 내 교관이란 얘기를 듣자마자 황당한 표정과 함께 외마디 단어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싫어?”


학교에서 가장 악랄하기로 소문났던 마이크(왼쪽)와 캐년(오른쪽)


캐년이  노려보며 말했다. 표정에서 언짢은 반응을 알아챈 낌새였다. 나는 말을 둘러대며 다른 교관상황을 물었다.


“아니. 네가 멀티 담당이니까 다른 누구보다 잘 알아서 좋은데. 윌이나 스티븐은 안 돼?”

“윌은 교관과정 학생 맡고 있고 스티븐은 곧 학교 관둘 거라 안 돼.”

“알았어.”

“너 내가 네 교관이 돼서 기분 안 좋구나.”

“아니. 나 지금 기분 엄청 좋아. 내가 원래 감정 표현이 약해.”


굳은 얼굴로 사무실을 나오는데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준, 교관 누구야?”

“나 캐년 배정받았어.”

“오 마이 갓!

다행이다. 캐년 안 받겠다.”


파나마와 태국 학생 날 놀려댔. 체크리스트 테스트를 앞두고 있 한국 학생들은 날 위로하는 척하면서 캐년 대신 다른 교관으로 배정받을 확률이 높아진 데 대해 다들 기뻐했다. 캐년은 키가 크고 덩치도 산만한데다 걸핏하면 정색한 얼굴로 버럭 소리지르는 등 성격이 불같았다. 구술 시험에서 학생들이 대답을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한쪽 입고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는 비열한 미소를 지은 뒤 허점을 파고들어 가차 없이 탈락시켰다. 비행 평가도 깐깐했다. 그와 한번이라도 비행해 본 학생들은 하나같이 주눅 들고 자신감 잃은 표정이었다. 캐년과의 불화로 유학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들도 있었다. 한 태국 학생은 1년 넘게 4만 달러가 넘는 돈을 쓰고도 자가용 면장 하나  교를 떠나야 했다. 캐년은 그 학생이 함량 미달이라 더이상 교육 진행이 어렵다고 랜든에게 말했다. 걱정이 앞섰다. 매일 그 봐야 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했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캐년을 교관으로 배정받은 H를 찾아물었다.


캐년 어때?”

“형. 저 어제 시뮬레이터 수업하다 울었어요.”

“왜?”

“자꾸 실수하니까 막 뒤에서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한국 학생들 가운데 성격이 가장 해맑고 유순H는 캐년 얘기에 빛이 어두워졌다. 파나마 유학생 리더로 늘 씩씩한 모습을 보이던 데브라마저 캐년과 수업하다 눈물을 쏟했다. 안했다. 얼마 남지 않은 비행학교 생활이 그리 순탄치 않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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