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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스타 Apr 08. 2020

[신혼일기] 우리의 경험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시간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불확실했지만 내 안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만약 H가 아닌 내가 아팠다면, 그 누구보다 H가 치열하게 이 질병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증상들이 나타날 것이고, 어떤 치료의 종류와 단계들이 있으며, 그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리고 갑자기 멈춰버린 나의 시간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주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길 사람이라는 확신. 이것은 당시 5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H에게 받은 선물과도 같았던 것이다.                


슬퍼할 새가 없었다. 나 역시도 H에게 그런 확신을 주고 싶었다. 체계적인 분석은 H가 일상에서 늘 해오던 것이었다. 식당을 갈 때, 컴퓨터를 살 때, 식재료를 살 때 H는 나의 생활패턴과 취향, 그리고 H의 합리적 관점을 추가하여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H는 그랬다. 윤택해져 가는 삶을 거저 얻고 누려보기만 하던 내가 갑자기 H의 역할을 해보려니 마음만 급하고 점점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의학지식을 얻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의사와 간호사가 제공하는 물리적 치료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돌봄이란 무엇일까 고민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젊음'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한정적이고 닫힌 의미를 안고 있다. 한창 자신을 마구 펼치고 성공하기 위해 달리며 일해야 하는 시기로 말이다. 이런 닫힌 시각에서는 한 젊은 이가 아프다는 것, 그래서 잠시 그의 시간을 멈춰 치료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올 수 없고, 보고 들은 것이 없으니 다양한 생각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결국 아픈 이들은 언제든 상처를 받기 쉬운 취약성을 갖게 된다. 한 사람을 둘러싼 세계는 사람, 직업,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으로 구성된다면 질병은 이 모든 세계를 바꾼다. 그것도 아주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같을 수 없고 한 사람의 이야기는 고유하다. 고유한 이야기들이 세상에 나올 때 다양한 관점이 생겨나고, 내가 아플 때 나의 고유한 이야기를 말할 자신감을 얻게 된다. 반대로 내가 돌봄자의 위치에 설 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을 위로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을 읽으며 나와 우리의 경험은 가치가 있고 글로 쓰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고, 무엇을 경험하게 해 줬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질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변화를 겪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지. 글로 쓰기 위해 세심하게 질문하고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지금 H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생각과 감정이 결코 사소 하지 않음을 충분히 이야기해주었는지, 제대로 애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는지, 지금의 상태를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하고 '완전해지기 위한 것'만을 이야기하진 않았는지. 모든 이의 지금은 항상 최선의 모습이라고 했던 글이 떠오른다. 소중하다, 소중해!               


글을 쓰면서 어제도 삐치고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한, 매일 넘어지는 나를 생각한다. 글과 실제의 나는 늘 다르니까 좀 더 잘 사랑해주고 싶어서 이 간극을 줄여보고자 글을 써본다. 세상에 서로를 이토록 잘 아는 사람은 둘 뿐인데 같이 있는 시간만큼은 편안하게 기댈 수 있고 놀고 지지고 볶으며 재미있게 충만하게 매일을 채워나가는 것, 우리의 경험은 이런 마음을 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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