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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스타 Apr 30. 2020

[신혼일기] 나의 사랑의 시작은 이랬다.

한 사람과 함께 삶의 시작을 앞둔 나에게.     

한 사람과 함께 삶의 시작을 앞둔 나에게.     


솔직히 내가 H를 만난 건 아주 특별한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대단한 일이 펼쳐진 건 아니지만 한 사람이 내 인생에 찾아와 깊은 의미가 된다는 것, 그거면 되지 않을까? 이번 글은 진짜 나 다운, 진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꺼내보려 한다.


2012년 당시 H가 찍은 피렌체 야경


사랑의 시작은 이랬다. H는 피렌체에서 만났다. 24살, 나 홀로 떠난 유럽여행이었다.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 많아서 당시 한인 민박 사장님은 저녁엔 숙소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라고 맛집 탐방 모임을 만들어줬다. 그때 함께 갔던 네 명 중 한 명이 H였다. 만약 그 날 내가 피렌체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녁 모임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다는 진리와 같은 말은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그날 네 명의 여행객들은 저녁을 먹고, 젤라토를 먹으며 골목을 돌아다녔다. 화려한 마술사들이 사람들의 박수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고 따뜻한 노란 조명과 땀을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 달달한 젤라토까지 그날의 모든 것이 기억이 난다. 아, 운명적인 사랑을 처음 만나서 기억이 나는 건 아니고 그 날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에 좋은 날이었나 보다. 그때 H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한국에 가자마자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음 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피렌체를 돌아다녔고, 그 뒤로 유럽에서 H를 만나진 못했지만, 한다면 해내고야 마는 H의 의지 덕에 쭉 지금까지 9년째 만나고 있다. 코로나로 3월 예정이었던 우리의 결혼식은 미뤄졌지만, 지금은 두 개의 숟가락, 베개, 자전거, 칫솔과 함께 살고 있기까지 하다.      


H를 처음 만났던 저녁 식사와 그 날의 길거리 공연


함께 살게 되면서 좋은 점은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바로바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그전엔 카톡이나 전화로 얘기하느라 실시간 생각 나누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실시간 대화가 가능해져 H에 대해 더 많이 알아 가고 있다. 인테리어를 하며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고, 카페에서만 먹었던 커피를 직접 내려보며 원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외박이 자유로워져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캠핑도 해보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일 땐 쉽게 시도하지 못했을 일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해보고자 하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더 좋아진 H에게 요즘 내가 하고 싶은 고백은 이런 거다.      


연애 시절 건강했던 H가 갑자기 아파서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 나는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되면 지금, 그리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할지도 모를 힘든 시간을 다 통과한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H도 치료를 잘 이겨내어 건강하게 오래오래 나랑 함께 살아서 할아버지가 된 것일 테니까 얼른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길 바랐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주디스 커


책 한 권이 찾아왔다. 이 책에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만나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온다. 이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사자랑 놀기도 하고, 공룡도 타고, 나무가 빽빽한 숲에서 차도 마시고, 이집트에도 가보고, 에베레스트 산에도 오른다. 바로, 매일 오후 네시부터 일곱 시까지 낮잠을 자는 할머니의 꿈속에서 말이다.      


함께 공룡도 타고,  
숲에서 차를 마시는 이들.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 시간에도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 H가 출근해서 내 옆에 없는 순간에도 연결되어 있고, 앞으로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고,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그때에도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H에게 말해주고 싶어 졌다. 그림책 한 권은 이렇게 또 내게 마음을 고백할 용기를 준다.  

    

그리고, 이 말은 이 노래와 함께 들려주고 싶다. 영화 <코코>에서 이 음악을 듣고 할머니는 희미했던 기억을 되찾는다. H도 언제 어디서나 나와 연결되어 있으라고 일종의 족쇄인 셈의 음악과 함께 나의 사랑을 또 새롭게 고백해보려 한다. 한 권의 책과 음악은 H를 향한 나의 사랑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주었다. H와 함께 살며 혹시라도 언젠가 이 마음을 잊게 될 날도 찾아온다면 그때는 우리 이 사랑을 기억하자.


‘함께 삶’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https://youtu.be/JKV-TpLPJIo

영화 코코 ost, remember me의 오케스트라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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