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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영 Apr 10. 2021

서로 다른 속도로 각자의 운명에 패배해가며

넷플릭스 신작 낙원의 밤을 보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신화적인 이야기의 틀이 있다. 운명은 잔인하고 인간은 그 안에서 발버둥 친다.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변주되고 덧씌워지고 새로 쓰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철저하게 극단적으로 조여 오는 비극에도 쉽게 빠져든다. 유전자로 전승되어온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모두 지금 살고 있고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누나의 시한부 선고도, 그런 누나와 조카의 돌연한 죽음도, 재연의 난치병도, 도망치듯 온 제주에서의 고립과 희망 없는 기다림도, 파도처럼 몰려오는 북성의 깡패들도 모두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숙명에 구체적인 얼굴을 씌운 것이다.

엄태구 배우에게 태구라는 같은 이름을 준 것도 조금은 엄숙하게 들린다. 등장인물을 배우 본인의 이름으로 부를 때, 관객으로서 어깨를 움찔하게 되고, 이건 마치 완전한 가짜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전제하고자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사건들은 허구이겠으나, 과연 이 표정과 기분은 가짜일 수 없다.

인간, 주인공, 태구는 다만 삶에 쳐들어온 불청객 같은 사건들에 선택만을 강요당한다. 하지만 선택도 이미 정해져 있다. 오로지 따를 뿐인지 묻는다. 누나와 조카를 죽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유를 캐묻지 못하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살육을 해야 한다. 운명은 모른다. 이 다음의 시간에, 태구는 속수무책으로 노출된다. 그 행위와 상황은 그대로 반영되어 전라의 목욕탕에서 이뤄진다. 자신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자신의 의지가 없는, 오직 반응으로만 행한 악행 이후 그는 나체로 몸만 빠져나온다. 그리고 제주도로 도망친다.

실로 나름의 계획은 없다. 그는 애당초 명령을 따르는 깡패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그는, 운명에 휩쓸려 살아가는 인간이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잠깐 눈을 뜨지만 그렇다고 항로를 변경하거나 목적지를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실려간다.

아름다운 공항, 제주도는 모두에게 관광의 낙원이지만 실제로 낙원이 아니다. 원해서 가지 않았으며 영원히 머물 수 없다. 이 시간과 공간은 운명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괴로움을 연장하고 곱씹는 연옥에 불과하다. 그는 아마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것이고 남은 괴로운 삶을 하루하루 씹어 넘기며 참아가며 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상관없는 결말로 이어지기 위한 연결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연옥에서 태구는 재연을 만난다.

재연은 자기 잘못 하나 없이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재연은 시한부의 어떤 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비극에 큰 원인을 제공한, 무기를 밀매하는 삼촌 곁에서 매일 한 발의 탄환 정도의 간격으로 죽음과 이웃하며, 무자비하고 위험한 세상을 살고 있다. 재연은 그 내일이든 오늘이든 상관없는 그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매일을 그냥 살고 있다. 물회와 농담만을 입에 머금으며 그냥 살아있다.

즉, 재연은 태구의 미래이자 지금이다. 그런 둘이 만난다. 이제부터 상관없는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재연이 아프고. 재연의 삼촌이 죽고. 재연도 칼과 총의 난장 속, 그 위험 앞에 노출되고. 태구는 그 모든 것을 목격한다. 태구는 자신의 삶은 이 다음에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재연을 죽게 둘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재연이 자신의 ‘타입’이라서가 아니다. 운명적인 끌림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그저, 둘은 안 괜찮은 점이 같은 것이다. 안 괜찮은 게 뻔히 보이는데,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싫은 것이 같다. 서로의 대답을 반복해서 되돌려줄 만큼 둘은 비슷하다.

여기서 둘의 관계는 확장된다. 서로가 이방인이고 손님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거울이고 닮은 인간, 운명 속의 인간이라는 것을 둘은 인지한다. 둘은 각자의 운명 앞에 각자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는 동료다. 이것은 연민이나 사랑이 아니라 동질감이며 동료의식이다. 서로의 물회는 건드리지 않지만, 서로에게 각자의 물회를 주문해주는 사이가 된다.

이야기는 계속 몰아친다. 무엇보다 태구가 모르는 서울에서 태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다. 태구는 배신당하여 죽을 목숨이다. 태구는 그 운명을 단지 착신하고, 마중 나가고, 도륙돼서, 죽음마저 숨겨지고 잊히면 된다.

그리고 운명이 당도한다. 태구는 결국 어쨌든 죽을 운명이고 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동생 같은 부하 진성과 재연이 죽도록 내버려 두고 죽느냐, 자신만 죽느냐이다. 다시 한번 태구에겐 선택할 수 없는 선택만이, 판단이 의미 없는 결정권만이 주어진다. 태구는 오직 그 운명에 순응한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권리라는 게 의미가 있는가. 태구는 진성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누나와 조카의 죽음의 비밀을, 백사장의 배신을 알게 되고 오직 그 앞에 분노하고 포효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머리를 들이받고 몸을 비틀어도 태구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그는 죽는다. 그의 삶에 가장 폭력적이고 일방적이었던 며칠 몇 주의 정해진 순서에 따라, 그는 생선 같이 뉘어져 죽는다.

재연은 태구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재연이 주인공의 역할을 건네받는다.

속수무책의 운명에 스러져 간 인간을 봤다면, 닮은꼴의 미래를 목격했다면,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재연은 하룻밤의 숙고를 갖는다.

그리고 재연은 결심한다. 저항하겠다고. 과거는 뒤집을 수 없으며 시한부도 막을 수 없으나, 그래도 재연은 저항한다. 재연은 태구가 없는 자리에서, 회전 테이블 위의 접시 안의 단무지로 태구의 삶을 농담질 하고 관장했던 ‘그 잔혹한 운명의 신’들을, 몰살한다. 이미 죽은 몸뚱이에 몇 번이고 총알을 더 내리꽂으면서.

그리고 재연은 마지막 신까지 처단하러 간다.

자신의 삶을 내려다보며 죽음의 시한을 저울질하는 그, 자기 자신의 신을 처단해야 한다.

그 악마는 자신의 육신 안에 있다.

... 난 박훈정 감독의 다른 작품 마녀의 주인공 자윤과 재연을 아주 닮게 봤는데, 후드티를 입은 총을 든 여성이며, 몸을 뒤틀리듯 발작을 일으키는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고, 말미에서 누구보다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여러 모의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연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처방을 찾아내지 못한 자윤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자윤 역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 운명에 스러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그 결정을 내린 악마들에게 최대한의 대미지를 되갚아주려고 하는 저항을 택하지 않았을까.

신세계까지 아울러 나는 박훈정 감독의 세계에서 폭력, 칼, 총은 모두 그 폭력 그 자체보다는 불가항력의 운명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인간의 노력과 대항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이 모든 씬의 잔인함은 과하다 못해 무뎌지지도 않고, 쾌감 있고 선정적이기만 하지도 않다. 칼질 하나하나에 담기는 악의와 선의가 진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 영화를 본 그저 운명 앞의 한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SNS에서 누구라도 볼 수 있고 검색창에서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고 쇼핑몰에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정보 과부하의 시대에서 우리에게 선택은 엄청나게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능성은 오히려 현저히 낮은 느낌이 가끔 든다. 누구라도 볼 수 있기에 도리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태의 자신을 바라보고 지금의 자신이 이토록 불가항력으로 불완전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조금씩의 확증편향으로 더욱더욱 좁아지고 얕아지기만 한 자신의 한계를 매일 체감할 뿐이다. 무엇이든 살 수 있으나 도리어 소비로만 자신을 증명해가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물건과 살 수 없는 물건이 살 수 있는 방식과 살 수 없는 방식을 양단한다.

그렇게 사실 운명은 불가항력이고, 우리는 오직 그 불가항력을 이해해갈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블라디보스토크라도 갈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결국 잠깐 머물기로 한 제주도에서, 그 밤과 술과 음식을 전부 마시고 삼키지도 못하고. 주변의 절망하는 이들과 패배한 이들과 자살하는 이들을 보며 인생은 누리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놓치고 잃을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태구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자신의 죽음도 되새기는 재연처럼.

그렇다면 일단 어떻게든 되는대로 그 죽음과 속수무책의 운명의 신들에게 저항해야 할까. 오히려 그렇기에 분노하고 맞서야 하는 걸까.

어쨌든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 것이다. 오늘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혹은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물회를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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