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봉착한 투철한 절약정신

카타르의 쓰레기 처리 실태

by 드림별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등짝을 맞은 일이 있다. 나의 할머니는 웬만해서는 손이 나가는 일이 없으신데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께 맞았다. 바로 바닥에 흘린 반찬을 휴지로 닦아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행동에 한 치의 흠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잘못이 있나 싶어 옆에 할머니를 다시 봤다. 할머니는 걸레로 반찬이 묻은 바닥을 박박 문지르고 계셨다. 그렇다. 할머니는 내가 ‘걸레’가 아닌 ‘휴지’로 오물을 닦은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걸레는 물에 빤 후 재사용이 가능하지만, 휴지는 재사용이 불가능 하니 말이다.


할머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약 정신을 가지고 계셨다. 여름철 상한 음식은 씻어서 드셨고, 해진 옷은 항상 꿰매 입으셨다. 자식들이 사다 드린 새 옷은 고이 옷장에 보관해놓으시고선. 이러한 구두쇠 정신은 아빠에게도 대물림되었다. 아빠는 새것을 사는데 인색하셨다. 엄마에 의하면 자신의 돈으로 새 옷을 산적이 거의 없었고, 연애시절 매일 같은 옷만 입고 다니셨다 했다. 엄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빠네 식구들만큼은 아니지만 항상 허리띠를 졸라매셨다. 마트 전단지의 세일 품목은 줄줄 꿰고 계셨고, 옷은 항상 일정 금액 이하의 제품을 인터넷을 통해 구매하셨다. 또한, 불필요한 외식은 거의 하지 않고 항상 손수 음식을 만들어 차리시며 생활비를 아끼셨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산 나는 절약 정신이 몸에 자연스럽게 베였다. 쓰지 않는 전기코드는 항상 뽑아 놓는 것부터 시작하여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는 것, 휴지는 필요한 만큼 쓰는 것 등을 생활 속에서 절약을 실천했다. 한 번은 중간고사 기간에 밤늦게 까지 공부하다 그만 불을 켜고 잠이 든 적이 있었다. 깨고 나서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중간에 잠이 들어서가 아니라 불을 켜고 잔 것이 맘에 걸려서 이었다.


알뜰한 삶을 이어오던 나는 두 가지 위기에 봉착했다. 첫 번째는 남편을 만난 것이다. 시부모님과는 다르게 남편은 아끼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전깃불을 사용한 후 끄는 법이 없어 형광등으로 자신의 동선을 공개적으로 오픈하고 다녔다. 기분 좋을 만큼만 먹는걸 미덕으로 여겨 많이 퍼온 날에는 밥이나 반찬을 남겼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조금 퍼오던가!) 런닝이나 티셔츠가 조금만 헤지면 버리고 새것으로 다시 샀다. 티끌모아 태산을 모토로 산 나는 남편과 가치관이 맞지 않아 신혼 초반에 많이 다퉜다. 지금은 남편이 낭비한 만큼 전기세를 더 벌어오겠거니 하고 내버려 둔다. 안 그러면 무한대로 다툴 것 같아서다.


두 번째 위기는 카타르에서 찾아왔다. 도하의 공항과 마트에는 종이, 플라스틱, 캔 등으로 분리수거를 할 수 있는 쓰레기통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지만 내 집 앞에는 분리수거 통이 없었다. 성인 키 만한 초록색 쓰레기통이 달랑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음식물 쓰레기, 헌 옷, 전자제품 등을 분류하지 않고 한 번에 섞어서 버렸다. 넘쳐나는 쓰레기는 오전과 오후에 청소부에 의해 수거되었다. 분리수거에 익숙한 나는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낯이 뜨거워졌다. 물론 대안도 있긴 했다. 바로 리사이클링 회사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재활용 회사에서 와서 종이와 플라스틱을 수거해 갔다. 그러나 공짜로 장려를 해도 할까 말까인 분리수거를 자기 돈 내면서까지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절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나는 카타르에서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우디와의 단교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만큼 궁금한 것이 카타르의 쓰레기는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처리가 될까 이었다. 천연가스 부국이니 쓰레기도 남의 나라에 수출하는 것일까? 지구 한쪽 편에서는 우유갑 하나도 분리수거를 해서 버리는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쓰레기를 마구잡이로 섞어 배출을 하니 지구는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예상 수명을 계산해야 할까? 범 지구적인 환경보호 대책이 절실하다. 카타르에서부터.



20180723_105119.jpg 집 앞마다 놓여있는 초록색 쓰레기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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