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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별 Nov 23. 2020

단호박 240개가 내게 남긴 것  

 친정 부모님께서 가을 내 키우신 단호박을 네이버 블로그와 쇼핑을 통해 무려 45박스나 팔았다. 수량으로 치면 225개 정도. 이게 뭐 대단하냐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기까지 총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때는 18년 가을, 남편 회사의 귀임 발령으로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다. 친정 부모님을 뵈러 충북 음성에 갔는데 수박 농사를 바쁘게 짓고 계셨다. 비닐하우스를 둘러본 나는 수박 두 통과 쌀을 챙겨 집으로 왔다. 입에서 하얀 김과 숨이 뒤엉켜 나오는 겨울이 되면 친정에 들러 단호박을 몇 통 가지고 왔다. 물론 공짜로. 시댁 친정이 모두 시골이라 각종 야채와 쌀, 콩, 고구마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가져다 먹었다. 자식 된 권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다음 해 봄이 왔다. 모종을 심어 기른 수박이 비닐하우스 내에서 덩굴을 뻗어 나갔다. 커다란 이파리 사이로 내 얼굴보다 더 큰 수박이 영글었을 때, 탄저병에 걸렸다. 수두에 걸린 것처럼 이파리에 타원형의 반점이 생기더니 이내 다른 이파리로 뻗어 나갔다. 급기야는 수박 겉면에 누런 반점이 덕지덕지 생겼다. 부부는 서로를 비난했다. "그렇게 농사지을 거면 아예 짓지 마." 속상한 마음에 나는 무례함을 더했다.


 가을이 왔다. 돈 들여 지은 비닐하우스를 놀릴 수 없어서 단호박 씨를 심으셨다. 수박은 그나마도 농협과 거래하는데 단호박은 거래처가 없다. 판로가 막막한 아빠는 계약 재배를 선택했다. 장사꾼에게 씨를 공급받아 밭에 심었다. 3개월 남짓 물 주고 비료 주며 애써 키운 단호박 2천여 개를 다시 그에게 넘겨주었다. 단돈 200만 원을 받고서는.

 씨 값 몇십만 원과 kg당 천 원에 보내버린 단호박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결국 손에 쥐는 건 돈 몇 푼과 관절염. 그런 부모님이 미련스러워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그 단호박 내가 팔게. 나한테 줘."

"네가 그 많은 걸 무슨 수로 팔아?"

"그래도 이너무 하잖아. 줘봐 내가 팔아볼게. 나 블로그도 해. 거기 올리면 팔릴지도 몰라."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창고가 없어서 오래 두지 못한 다는 둥, 그 많은 택배 포장을 누가 하냐는 둥의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아빠 마음속에 있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변화에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판로 개척을 스스로 알아봐야 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재고를 떠않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한 직장에서만 28년을 근무한 그에게는 당연한 그것.


그렇게 일 년을 흘려버리고 다음 해가 왔다. 남동생, 여동생, 올케, 제부부터 연로하신 고모와 고모부, 백세를 앞두신 할머니까지 대거 노동에 동참하여 수박 모종을 심었다. 밀도 높은 농촌 체험이 끝난 뒤 나는 친정에 눌러앉았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2주간 얹혀 지내며 나와 아이들의 숙식을 해결하니 부모님께 문득 미안해졌다. 밥값은 해야겠다고 생각해 아침저녁 수박밭으로 출근하는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보통은 귀찮게 하지 말고 애나 보라고 하셨지만, 그날은 달랐다. 점심때 먹은 소주로 인해 취기가 오른 아빠는 내게 수박 젖순 따기를 시켰다. 엄마는 극구 말렸고. "얘가 뭘 안다고 그래."라고 하면서.


나는 밥값은 해야겠다는 마음과 빤히 예측되는 둘 사이의 언쟁을 중재하고자 수박밭으로 들어갔다. 단기 속성 특강으로 엄마한테 젖순치는 노하우를 전수받길 기대했는데 웬걸 뭐라시는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비닐하우스 구석에서 유튜브와 블로그로 한창 씨름을 하고 다시 아빠한테 가서 간신히 노하우를 익혀 한 끼 식사값은 했다.(고 생각한다.) 겨우 하루 농사일 거들고 삭신이 쑤셨다. 수박밭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부모님은 비닐하우스에 다시 단호박을 심는다 하셨다. 단돈 천 원짜리 단호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빠 그 단호박 나줘. 내가 팔게."


 또다시 회의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 사이 아빠는 장사꾼에게 다시 씨를 제공받았고 나는 엄마 아빠 모르게 스마트 스토어에 가입을 하고 단호박을 올렸다. '예약 출하'라는 문장과 함께. 단호박이 무럭무럭 크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서 단호박 주문이 5kg치 들어왔다. 가능성을 본 나는 다시 아빠를 설득하였고, 240개를 할당받았다.

 빠른 판매를 위해 블로그에 공구 글을 올렸다. 엄마 계좌번호와 함께. 내가 팔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대학 동기, 봉사활동 동기 등 단체를 가리지 않고 공구 글을 퍼 날랐다. 친구들은 지갑을 열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3박스를 사서 친정과, 시댁, 그리고 자기 집으로 배송시키기도 했다.


 단호박이 잘 팔릴수록 안도감과 낯 뜨거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단호박 5kg에 19000원. 정당한 가치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친정에서 돈 한 푼 안 내고 가져다 먹은 것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농사일 하나 거들지 않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비용을 지불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부모님께 막말을 했다. "그렇게 농사지을 거면 짓지 마세요."라고 하면서.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는 “추석 음식을 마음 편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직접 음식을 하지 않은 가정의 권력자들 것이다.” (64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나는 떠올렸다. 가사일을 돕지 않는 남편이 아내에게 "왜 집이 이 모양이야? 이렇게 청소할 거면 하지 마."라고 하는 것을. 나는 남편이 가사노동의 가치를 몰라주는 것에는 굵은 목소리를 내면서, 농사일에 대한 가치를 깨우치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않았을까?

 

 내가 게으르다고 폄하한 아빠도 사실은 그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직장에서만 28년간 근무한 아빠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을 자주 입에 올리며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하셨다. 결국 조기 퇴직을 하신 후 할머니와 고모가 사시는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곳에 집을 짓고, 놀리던 땅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60대에 귀농으로 인생 2막을 여신 부모님에게 현실은 그리 녹록지 못했다. 병충해와 씨름하고,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었다. 절절 끓는 고온의 비닐하우스에서 쪼그려 앉아 만든 수박은 농협으로 팔려갔지만, 가격을 정하는 건 그들이었다.

 내가 만든 상품의 가치는 타인에 의해 정해졌다. 제2의 을의 인생 시작이었던 것을 그들은 알았을까?


 급여로부터 나의 위치를 확인받는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 대한 대가를 온전하게 누렸으면 좋겠다. 특히 농촌에서부터. 그런 점에서 이제부터라도 친정에서 공짜로 가져다 먹는 짓을 그만해야겠다. 곧 도착할 김장김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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