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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별 May 31. 2021

이젠 안녕

눈을 떠서 시계를 봤다. 이런 지각이다. 허둥지둥 사무실에 도착하여 몸을 최대한 웅크려 자리로 간다. 파티션을 넘어 힐끔 보니 젠장, 사장은 이미 출근했다. 아침은 먹지도 않았는데 왜 속이 꽉 막힌 느낌인지. 사장이 언제 나를 호출할지 모른다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연신 눈치만 본다. 갑자기 알람이 울린다. 그리고 잠에서 깬다. 휴 다행이다. 이건 꿈이었다. 


퇴사한 지 8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회사 꿈을 꾼다. 잊을 만하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곱씹는다. 당시 나는 서류 전형과 면접에 수도 없이 탈락해서 입사 전부터 의기소침했다. 약간의 기대감은 출근과 동시에 사라졌다. 사장은 내가 속한 영업팀 직원의 일 거수 일 투족을 감시했고, 업체에게 보내는 나의 이메일에 철자 오류까지 잡아냈다. 달달 볶였다. 


제대로 가르쳐 주고 혼을 내면 이해라도 할 텐데 그녀는 나에게 뭘 가르쳐 줬나? 기분이 좋으면 지적 한 번이지만, 기분이 나쁘면 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쳤다. 살면서 크게 혼나 본 적이 없던 나는 사장에게 털끝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수시로 스스로를 점검하고 다그쳤다. 


회사는 그만두었지만 내가 썼던 완벽함의 가면은 아직도 벗겨지지 않은 것 같다. 선택한 것 인지 주어 진 것인지 구별이 모호한 아내, 그리고 엄마의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매뉴얼을 만들었다. 집안일부터 친구, 가족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평함을 추구하였다. 출산 후에는 ‘엄마들은 으레 그렇게 한다.’라고 믿으며 나를 돌보기보다는 아이를 위해 시간을 썼다. 모유수유의 달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위해 책과 장난감을 사야 한다며 늦은 밤 잠을 자지 않고 휴대폰을 붙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열심히 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남편과 부딪쳤다. 내 몫과 네 몫을 따지며 여러 차례 다툰 후 에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결혼생활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위한다고 노력했지만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는 항상 나를 찾았고, 나는 항상 피곤에 절어 있었다. 첫째를 낳고 8년간 버둥대다 알게 된 사실은 아이를 보살피기에 앞서 엄마 자신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면이 아니라 나의 일부라고 착각했던 것들 - 잘하려는 마음, 완벽하려는 마음, 통제하려는 마음-을 나에게서 그만 놓아줘야겠다. 부질없는 마음들아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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