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해진 공기가 감쌌던 봄에도, 어항 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습한 여름에도, 그리고 코감기로 막혀있던 코가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한 바람을 들이쉴 수 있었던 가을까지 사시사철 '러닝족'들은 뛰고 있다. 스포츠에도 유행이 있으니 이번 유행은 언제 까지려나 싶었던 러닝은 아직 끝날 기미 없이 꾸준하다.
작년부터 러닝에 빠진 오빠가 올해는 11월 16일, 하프 마라톤을 목표로 찍고 달렸다. 주말 아침에 같이 뛰자며 금요일에 죄책감을 덜고 폭식한 내가 아침까지 이어지는 식곤증으로 일어나지 못할 때도 오빠는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나갔다. 퇴근 후 소파에 지쳐 쓰러져있을 때도, 이 더위에 뛰면 실려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도 오빠는 나갔다. 대한민국 수험생들에게 11월이란 수능이라는 결전의 날이 있는 달이라면, 오빠에겐 하프 마라톤 대회가 있는 대망의 달이었다. 대체 마라톤이 뭐길래!
나에겐 러닝, 아마도 오빠에겐 조깅이었을 속도로 함께 뛰기도 했지만 도무지 그 매력에 깊이 빠지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러닝은 계절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밖에 서있는 것조차 힘든 한여름에 뛰기란 셀프 고문 같았고, 살이 에는 듯한 한겨울에는 모자부터 장갑까지 줄줄이 장비를 챙기는 것부터 귀찮아 보였다. 뛰다 보면 어지러웠던 머릿속에서 생각이 잠시 멎는 것, 끝나고 개운하게 샤워하고 나면 밀려오는 뿌듯함 같은 러닝의 효능은 좋았지만 거대한 귀찮음을 이길 정도는 아직인 것 같다.
대회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는 식단과 운동 스케줄을 관리하더니, 전날에는 '카보로딩'을 해야 한다며 피자와 파스타를 왕창 먹었다. 하필 대회를 앞두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려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폼롤러에 붙어있었다. "오빠, 이 정도면 선수급 관리 아니야?"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괜히 놀렸지만 그의 진지함에 숙연해져 대회 당일, 새벽부터 일어나 대회 장소로 출발하는 오빠를 배웅하러 함께 나갔다.
"9시 30분부터 10시 사이에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그 정도면 도착할 거야." 내친김에 골인하는 모습도 남겨줘야겠다 싶어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핫팩을 손에 쥐고 결승선 옆 펜스에 서있었다. 도로 잠에 들고, 다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내내 오빠는 오로지 뛰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다시 한번 마라톤이 대체 뭐길래- 생각을 하며.
올림픽 같은 걸 상상해서였나, 결승선에 차례차례 한 명씩 들어올 거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민트색 반팔 티에 모자, 무지갯빛이 도는 스포츠 선글라스에 형형색색의 러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연어 떼처럼 결승선에 밀려들어왔다. 빠르게 동공을 움직여 보며 오빠와 비슷한 얼굴을 찾다가, 포기하고 비슷한 신발을 찾다 보니 이미 약속한 10시는 지나있었다.
'아직 못 들어온 거면 원하던 기록은 못 깬 건데..'
'끝까지 뭉쳐있던 근육이 복병이었나'
'열심히 했는데 기록에 실망하면 어떻게 위로해 주지'
설상가상 마라톤 관계자들이 길을 홍해처럼 가르더니 그 사이로 구급차가 윙윙거리며 빠르게 지나간다.
'혹시 오다가 다쳐서 중도포기했나'
문득 수능을 치는 아이들을 교문에서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옆에서 나처럼 기다리던 사람들도 누군가는 지인을 찾아 손을 흔들다가 이내 자리를 뜨고, 또 누군가는 이미 지나쳤나 싶어 두리번거린다. 자연스럽게 손을 모으고 동공을 연신 움직이며 찾아보려 했지만 비슷한 인상착의의 다른 사람들만 휙휙 지나갔다. 오빠를 찾느라 유심히 보다 보니 힘껏 주먹을 쥐며 들어오거나 두 팔을 하늘로 향해 벌리며 환희에 찬 얼굴로 들어오는 참가자들이 눈에 콕 박혔다. 자글자글한 소금이 곳곳에 붙은 얼굴에 해냈다는 기쁨이 번지는 걸 보니까 왜 내가 다 벅차오르는지. 아니 대체 마라톤은 뭐길래!
내가 약속한 시간을 넘어서도 조마조마 기다리는 동안 오빠는 끝내 나를 찾지 못하고 보관물품을 찾고 있었고 되찾은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목표한 기록을 훌쩍 깨고, 오빠 역시 나를 닮은 것 같은 여성을 찾으며 일단 손부터 흔들며 들어오다가 포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첫 하프 마라톤 기록은..
1시간 36분 5초!
기록에 대한 감이 전혀 없지만 함께 뛴 그의 지인들이 대단한 거다, 미친 거다 추켜세워주니 그런가 보다 한다. 100점짜리 시험지를 엄마에게 보여주는 아이의 얼굴을 하고 내년엔 풀 마라톤에 도전해 보겠다는 오빠. 못 말린다, 못 살겠다, 하면서 또 열심히 기념사진을 찍어 준다. 메달 쥐어바, 메달 깨물어봐, 포즈를 주문하면서.
결승선을 지나자마자 무릎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는 사람, 기쁨의 괴성을 지르며 들어오는 사람, 함께 뛴 일행들과 손을 맞잡고 만세 자세로 들어오는 사람, 그리고 아이 같이 웃는 오빠를 보며 마라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승부가 아닌 각자의 한계에 도전하는, 오로지 맨몸으로 부딪히는 이 이상하게 매력적인 스포츠에 대하여. 한참을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는 길에서 뜨거운 응원을 받으며 주인공처럼 들어오는 할아버지 참가자를 보며 생각한다. 내년에 나도 10km라도 나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