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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Feb 10. 2021

츤데레의 미학

내면의 따듯함을 가진 무뚝뚝한 이들의 매력

20대 초반, 겉으로만 센척했지 어리바리하기만 했던 나는 소위 '입만 산 이들'의 교태에 자주 놀아나곤 했다.


"내가 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이번에 네가 결제하면 다음엔 내가 신사동 OO 카페에서 브런치 쏠게!"

셀카 찍기에 최적화된 인테리어를 갖춘 레스토랑에서 지갑 안 가져왔다며 밥 얻어먹은 뒤, 본인의 만족스러운 셀카 결과물들만 잔뜩 건진 채 잠수 탄 그녀하며,


"이건 내가 너 아껴서 하는 말인데, OO이가 네 욕 하고 다니더라, 그런데 나는 항상 네 편이야!" 라며, 내 편인 척 이간질시킨 후 "난 너희가 사과했으면 좋겠어. 난 다 같이 사이좋은 게 좋아, 흐엉흐엉." 이라며, 드라마 속 대사를 외우기라도 한 건지, 새로운 자아가 생성된 건지, 질투로 온갖 이간질을 일삼던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 같은 이도 있었다.


뭐, 어리숙한 20대 초반의 일들인지라 약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네.' 라 생각하며 웃어넘기곤 하지만, 당시엔 몇 날 며칠을 씩 씩 거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은 고맙게도 마음속 상처를 아물게 해 주었으나, 매 해 새롭게 등장하는 입만 산 이들은 아문 상처를 또다시 터트려 놓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게 정말 입만 산 말인지, 진심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초급 정도 수준으로 중, 상급이 되려면 더욱 단련이 필요하겠으나, 특유의 쎄- 한 느낌이 들면 90% 는 적중하는 듯하다.




짧디 짧다고 볼 수도 있을 30여 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입만 산 이들 보단 '내면의 따듯함을 비밀스레 숨기고 있는 무뚝뚝한 이들 (츤데레)'로부터 받았던 호의와 배려들로 인한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기에, 어느 순간 '츤데레'의 끼가 있는 사람이다 싶으면 자연스레 정이 가곤 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츤데레'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낯가림이 있는 탓에 초반부터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어투를 구사하며 조잘대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다!' 싶으면 말도 많아지고, 잘 챙기려 노력하다 보니 누군가에겐 그런 이미지로 비칠 수도 있겠다.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세상 속 곳곳에 숨어있는, '새로운 츤데레 족'을 발견하면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간혹 '입만 산 이들의 교태'를 접하곤 한다. 20대 초반처럼 휘둘리진 않고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고 넘기는 편이지만, 이런 이들과 대화를 길게 한 날은 유독 피곤하다.


"어머 어머, 우린 진짜 잘 맞을 거 같아요, 우리 밥 한번 먹어요!"

입 만산 이들은 본인의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는 주로 과장된 리액션을 섞어 항상 밥이나 커피 술을 제안한다. 막상 실현하려 장소나 날짜를 정해 보자 하면 온갖 변명을 하며 구체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음에 본인의 목적이 필요해진 순간에 또다시 접근한 후, 이전의 제안은 잊은 건지 똑같은 멘트를 반복한다.


'참나, 나도 그쪽이랑 굳이 밥 먹고 싶진 않았어, 맘에 없는 소리는 한 번이면 족하니 그만 좀 하지.'라고 생각하며, 추후에는 목적성이 뻔히 보이는 요구에 절대 응하지 않으리라는 소심한 복수를 다짐하곤 한다.


반면, 내가 애정 하는 츤데레족들은 "밥 한 번 먹어요."라는 제안을 하는 데 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나, 약속을 제안한 후에는 일자와 장소를 정해 만남을 구체화한다. 즉 본인이 내뱉은 말을 꼭 지킨다.  




작년 신혼집을 구할 때였다. 직장과 가까운 지역 위주로 알아보다 보니 모두 역세권이었고, 신혼부부인 우리에게 역세권의 집을 매매하는 것을 불가능했다. 전세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지만, 우리의 계속된 노력 끝에 최근 리모델링을 한, 아담 사이즈지만 방 2개, 거실 1개로 공간 분업화가 효율적으로 되어있는 집을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톤 벽지와 바닥, 그리고 중간중간 원목과, 연핑크 벽지, 네이비 컬러로 포인트를 준 깔끔한 집이었다. 보안을 중시하였기에 현관부터 복도까지 여러 대의 CCTV가 철두철미하게 설치되어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처음 마주친 집주인은 퉁퉁한 체구에 안경을 쓴, 까칠할 것만 같은 인상의 아저씨였다. 게다가 우리가 살 신혼집의 집주인임과 더불어 '건물주'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엄청나게 꼬장꼬장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집을 살펴볼 때도 혹여나 정성껏 리모델링한 공간이 더럽혀질까 봐 신경을 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우리가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먼저 나서서 말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까칠한 인상과 더불어 과묵한 집주인과 계약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경계태세를 풀지 않았다.


낯선 용어들을 접하며 바짝 긴장을 한채 부동산 계약을 마치고 나올 때였다.

그는 우리에게 이제 어딜 가느냐며 물었다. 그 날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나는 한여름이었으며, 특정 서류가 필요해 구청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날씨에 걸어갈 순 없으니 택시를 탈 예정이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우리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인의 차로 우리 둘을 직접 태워 구청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의 목적지와는 반대였다. 잠시 돌아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한 선의를 베풀어 준 것이다.


그 순간 '음, 왠지 집주인 아저씨 츤데레 종족이신 것 같은데....?'라는 긍정의 의문을 품게 되었다.




집주인 아저씨는 우리의 신혼집 근처에 거주하기도 했고, 당시 우리가 입주한 건물에 새로운 입주자들이 많아 종종 마주치곤 했다.


누군가 주차할 때면 새로 인테리어 한 건물을 긁을 까 봐 노심초사하며 도끼눈을 뜬 채 기웃기웃 감시를 하는 그는 연이은 입주로 인해 한 껏 예민해 보였다. 우리가 소소한 가구들을 사들이며 집안을 채우고 있을 때 페인트질 안 망가지게 조심해서 옮기라며 잔소리를 하면서도, 갑자기 미처 옮기지 못한 짐들을 본인이 직접 들고 올라와 문 앞에 두고 가곤 했다.


깐깐해 보일 것만 같았던 집주인 아저씨는 커다란 팔에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은 하얀 말티즈를 소중하게 안고 다니기도 했으며, 막내딸의 자전거를  직접 고쳐주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낯을 가리는 편인 나는 집주인 아저씨를 만나면 인사는 꾸벅꾸벅 잘했으나 적극적으로 말은 걸진 않았다. 아저씨도 별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정도로 대꾸했다.


반면, 낯가림이라곤 거의 없고 붙임성이 좋은 남편은 집주인 아저씨를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며 해맑게 종알 종알 댔다. 내향형에 가까워 보이는 집주인 아저씨는 남편의 엄청난 수다 폭격에 정신을 잃은 듯했으나, 어느 순간 많은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우리는 결혼식을 약 3개월 정도 앞두고 신혼집을 구했었기에, 신혼집을 꾸려나감과 동시에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집주인 아저씨는 우연히 마주친 우리에게 먼저 청첩장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냥 형식상 하는 말이겠거니 하면서도 중간중간 짐을 날라주시거나, 차를 태워다 주시는 등 호의를 받은 감사함을 표현할 기회라 생각하여 작은 홍삼 선물과 함께 청첩장을 전해드렸다.


그 이후 집주인 아저씨와는 그다지 마주칠 기회가 없었고, 우리는 어느 가을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정신없던 결혼식을 마치고 나니 부모님으로부터 "너희 집주인 참 좋은 분이더라, 신랑, 신부 양쪽에 다 축의 하고 방명록도 쓰고 가셨다."라는 말을 들었다. 급하게 일 보다 들린 것 같아 보였으며 일정이 있어 식사는 하지 못하고 갔다는 말과 더불어.

이후 우리는 그에게 소소한 답례품으로 감사를 표현했고, 집주인 아저씨는 만날 때마다 조잘대며 반가워하는 남편에게 약 3개월간 정이 든 것인지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라는, 츤데레족들에게 쉽게 나올 수 없는 표현을 선사했다.


이번 겨울, 집주인 아저씨는 건물 앞에 엄청나게 크고 하얀, 해맑게 웃는 눈사람 장식소품을 설치해 두어 우리와 더불어 입주민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최근 발견한 츤데레족인 집주인 아저씨와 더불어, 평소 무뚝뚝하지만 중요한 날은 꼭 빠지지 않고 꾹꾹 눌러 담은 글자를 담은 편지와 정성 어린 선물을 챙겨주던 지인, 재직하던 직장을 퇴사할 때 몰래 꽃다발을 준비해 챙겨주시던 말없고 차가워 보이던 차장님, 결혼식 전 너무 바빠서 청첩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모바일 청첩장만 보내라기에 초대를 꺼려하나 싶어 마음을 비웠으나 결혼식 당일 조용히 나타나 환한 웃음을 머금고 진심으로 축하해주던 지인들까지.

이렇게 츤데레족들은 항상 예기치 못한 감동을 선사해준다.


따듯한 마음과 마음과 더불어 다정한 말투까지 장착한 이들은 물론 굉장히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표현에 서툴거나 가까워지는 시간이 꽤 걸리더라도, 진심이 담긴 따듯한 마음을 본인만의 방법으로 표현하려 노력하는 츤데레족들 또한 훈훈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따듯하고 훈훈한 사회를 위하여 츤데레족들은 국보급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츤데레: 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르는 말. 규범 표기는 미확정. (출처: 다음 국어사전)]


[이미지 출처: KBS 2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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