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특유의 종이 냄새를 맡는 걸 즐기는 나에게, 새 종이 냄새로 가득한 공기를 한껏 머금은 서점이란 공간은 매우 매력적인 곳이다.
서점 내 베스트셀러가 모여있는 가판대의 빳빳한 새 책들을 둘러보고 있었을 때였다.
옆 가판대에 20대 초~ 중반 정도로 예상되는 앳된 느낌의 여성이 심플한 디자인의 책을 한 권 집어진지하게 살피고 있었다.
"야, 요즘엔 이런 것도 책이냐? 이런 책은 나도 그냥 만들겠다."
책을 유심히 보고 있던 그녀 옆으로 친구로 예상되는 다른 이 다가와 짜증 섞인 말투로 이러한 대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가판대에 놓여있던 또 다른 책을 집어 들어 겉표지만 대충 훑은 후다시 가판대에 툭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그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유심히 보던 여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진지하게 살피고 있던 책을 조심스레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둘은 금세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책을 유심히 훑어보던 여성은 친구로 보이는 다른 이의 비아냥거리는 한마디에 흔들려서 본인의 감정은 숨긴 걸까, 혹은 본인도 그 친구의 말에 동의하였기에 내려놓은 걸까? 불평 가득한 친구의 말에 대꾸 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나는 비아냥 거리던 이가 잠시 머물던 가판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이런 책은 나도 만들겠다."라고 표현한, '이런 책'을 조심스레 집어 들고 훑어보았다.
심플한 디자인의 에세이 집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일부 글귀를 읽어보았다.
억지로 어렵게 쓴 글이 아닌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글 들이었다. 글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한 문장에 여러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감히 나도 그냥 만들겠다니? 누군가는 작가가 공들여 쓴 이 문장들로부터 감정적 치유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삶의 일부분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석구석 글을 쓴 이의 오랜 고민과 정성이 느껴졌다.
나도 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자격은 분명 없었지만, 확실한 건 책 겉표지만 대충 훑어본 이가 본인의 짧은 식견으로 쉽게 평가할 만한 책은 절대 아니었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엄청난 노력을 생각 없는 말로 깎아내리고, 또 그 책을 진지하게 보고 있던 친구의 순간적인 이끌림 또한 깔보는 듯한 못난 태도를 지닌 이가 그 자리에 흘리고 간 건 '지질함' 밖에 없었다. 생각 없이 빈정댄 그녀의 생각 없는 말은 매우 보잘것없었기에, 책 안의 글귀들의 의미는 결코 훼손되지 않았다.
그 책이 분명 본인의 취향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난 개인적으로 이런 심플한 스타일 선호하진 않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이런 책이 인기가 많나 보네." 정도로 표현하거나, 친구가 호감을 가지고 읽고 있다면 마음속으로만 삼키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비단 서점에서 마주친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러한 화법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해서 만든 보고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이런 건 나도 하겠다.", "발로 써도 내가 너보다 잘 쓰겠다."라는 악담을 퍼붓는 직장 상사 혹은 동료일 수도 있고, 원하던 공부를 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이에게 "팔자 좋다, 네 나이에 무슨 공부야." 라며 본인은 가지지 못한, 상대방이 어렵게 낸 용기를 우습게 보며 짓밟으려 한다.
이런 못난이들은 꾸준한 다이어트로 날씬한 몸을 유지하는 누군가에게는, "나도 돈 많아서 개인 PT 받고 시간 많아서 운동이나 자주 하러 다니면 쟤 보다 더 날씬할걸?"이라며 비아냥댈 것이고, 노력으로 성취한 학위증을 보면서 "나도 시간만 많았으면 그냥 땄지." 라며 본인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 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주로 본인이 직접 노력해보거나 경험해 보진 않은 일들에 대해 더욱 쉽게 말한다.안타까운 건 이러한 행동이 본인을 얼마나 못나고, 지질하게 보이게 만드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이전의 나조차도 이러한 화법을 종종 구사하곤 했다. 특히 내가 용기 내지 못한 일들에 푹 빠져 열정을 내뿜는 이들을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질투가 샘솟았다. 부러워하고 있다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감정을 숨기면서 "저 사람은 운을 타고났나 보네.", "나도 여유 시간만 많으면 저렇게 할 수 있을 텐데." 라며 나의 용기 없음을 지질한 변명들로 포장하곤 했다. 그렇게 내뱉고 나면 내 지질함이 느껴져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다.
사람이기에 평생 열등감 혹은 질투심은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은 부러울 땐 그냥 "부럽다!", 멋져 보일 땐 "멋있다!", "대단하다!"로, 비꼬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솔직한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공개하고 나면 오히려 개운 했고, 내가 갈망하던 멋진 이들과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맺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의 노력이 잔뜩 묻어난 결과물을 보면서 "정말 멋지다.", "넌 정말 대단해!"라는 말 조차 내뱉기 어려워 빈정거리는 이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투척해주곤 한다.
"이런 건 나도 하겠다."
누군가의 노고를 부질없게 만들어 버리려는 이들에게 소리쳐 주고 싶다.
"그럼 네가 하지 그랬어?"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제작된 성공적인 결과물을 바라보며 이따위 발상은 나도 그냥 떠올릴 수 있겠다고? 그건 당신이 누군가의 결과물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생각해낸 본인만의 착각이며 오만이다.
설령 예전부터 생각해왔더라도 그 생각을 지니고만 있는 것과, 구체화한 결과물로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 한 노력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멋진 결과물은빈정댐을 일삼는 당신이 아닌, 남모를 노력을 몇 배로 기울인 누군가의 작품으로 세상 속에 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