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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Feb 12. 2021

떡볶이 아줌마의 이름

OO 엄마 대신 김매콤(가명)님

1997년도부터 6년간 초등학생 신분에 속해있던 내게, 당시의 '떡볶이'란 없던 힘도 솟아나게 만들던 마성의 음식이었다.

학원 가기 싫다며 시름시름 앓아대던 나는, 학원 끝나면 500원짜리 컵떡볶이를 사준다는 엄마의 말에 "만두도 추가할 거야!"라는 의지를 내뿜으며 학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또 그 어떤 불멸의 사랑보다 뜨거웠던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의 우정은 떡볶이를 먹으며 다져지기도 했다. 곧 중학생 언니가 된다는 도취에 빠져있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엔 컵떡볶이를 한 손에 들고, 킥보드를 여유 있게 운전하는 스킬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 중학생, 고등학생 신분을 거치면서도 오직 떡볶이를 먹기 위한 목표로 친구들과 대동 단결하여 담을 홀짝 넘는 대담함을 뽐내기도 했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1주일에 한 번은 달콤 매콤 쫀득한 떡볶이를 먹으며 나의 지친 내면을 달래주기도 했다.


위의 기능이 점차 약해져 가며 떡볶이를 먹는 횟수는 자연스레 줄고 있으나, 떡볶이를 먹고 싶은 욕망은 주기적으로 내게 찾아오고 있다. 떼레야 뗄 수 없는 인연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떡볶이 사랑을 외치던 소녀는 떡볶이를 사랑하는 성인 여성으로 자라났다. 떡볶이를 많이 먹고 자란 성인 여성인 나는 2021년 현재 회사원의 신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회사생활은 물 잔뜩 탄 맹탕 떡볶이처럼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이 유쾌하지 않은 회사생활에도 마음에 드는 사실이 손가락 5개에 손꼽힐 만큼 적게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근처에 맛있는 떡볶이를 파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2021년도의 서울에는 1990년대의 추억을 되새김질해줄 만한 양질의 떡볶이 집을 찾기 쉽지 않은데, 이 떡볶이 집은 어릴 적 추억의 맛을 떠올리게 해 주기에  편이다.


직장 동료 Y양과 나는 점심을 먹은 뒤 오후 4~5시쯤이면 배가 허전해지곤 한다. 우리는 입안에 각종 주전부리들을 넣어주며, 생물학적 나이는 더 이상 신체적으로 성장할만한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이렇게 배가 자주 고픈 것인가 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나눈다. 살찌려고 그런가 봐 라는 누구라도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을 내리며.

결국 배고픈 회사원 둘은 퇴근길 떡볶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우리 살찌니까 튀김은 먹지 말고 순대랑 떡볶이만 먹자."라는, 결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필수적으로 나누면서.


폰뱅킹과 카드결제를 주로 이용하는 나는 어느 순간 현금을 챙겨 다니지 않고 있다. 물론 카드결제도 가능하지만 프랜차이즈가 아닌 떡볶이 집에서는 현금을 내고 싶은 추억이 들기도 하기에 Y양과 나는 꼬깃꼬깃 주머니 현금을 찾아 모았다.


익숙한 떡볶이 집 아줌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는 외친다.

"사장님, 떡볶이 1인분, 순대 1인분, 튀김 1인분이요."


모두 합하면 3인분. 우리는 2인이지만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맛이기에 망설이지 않고 주문한다.


'아줌마'라는 호칭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그다지 유쾌한 느낌을 주지 않아 직접 부를 때는 사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대화를 할 때는 익숙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이 가득한 '떡볶이 아줌마'라는 호칭을 쓰곤 한다.


"튀김은 범벅으로?"

"네!"


"순대 내장은?"

"다 섞어주세요, 다."


주문과 동시에 제안되는 옵션에 우리는 항상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고민할 필요가 있는가.


1. 떡, 튀, 순 3 총사.

2. 튀김은 범벅

3. 순대 내장은 당연히 다 먹어야지


우리는 떡볶이 먹는 취향이 같아서 정말 다행이라며, 서로의 눈알을 맞추고 소중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잠시 후 모락모락 김이 나는 떡볶이와, 바삭하지만 일부분만 양념에 살짝 버무려진 김말이, 야채, 만두, 그리고 구수해 보이는 내장과 간이 섞인 순대가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튀김을 양념에 콕콕 찍어 한 입에 넣는다. 김말이 안의 물렁물렁한 당면들과 함께 김과 튀김의 고소함이 베어 나온다. 마무리는 달콤 매콤한 떡볶이 소스가 아름답게 장식해준다.


이제 오늘의 번뇌는 사라지고, 행복 시작이다.

Y양과 나는 떡볶이와, 튀김, 그리고 순대를 먹으며 "흐으음~."이라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평소 무릎 아프다며 아껴 쓰는 발재간이지만, 발도 경쾌하게 동동 굴러가며.

중간중간 목이 메일 땐 구수한 어묵 국물을 마셔주며, 목구멍 안으로 떡, 튀, 순 삼총사를 밀어 넣어준다.


배가 차오를 때면 우리는 결단코 실행하지 못할 미래의 약속을 나누며 떡볶이 흡입을 마친다.

"아, 과식했다. 다음엔 그냥 떡튀나 떡순만 먹자, 살찌니까."




식사를 마친 후 결제를 해야 할 순간이 왔다. 어랏, 그런데 우리가 먹은 양의 금액보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모자란다.

생각해보니 떡, 튀, 순 세 가지 종류를 먹으면서, 동시에 막대 어묵도 집어 먹었던 것이다. 다행히 떡볶이 아줌마는 계좌 이체도 가능하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폰을 꺼내 폰뱅킹으로 이체를 진행했다.


매일같이 '사장님', 혹은 우리 둘끼리 있을 땐 '떡볶이 아줌마' 나 '떡볶이 사장님'이라 불렀기에 핸드폰 화면에 적인 예금주명은 낯설었다. 혹시라도 엉뚱한 계좌에 이체하는 건 아닐까 싶어 떡볶이를 눌지 않게 휘휘 젓고 있는 아줌마 앞에 다가갔다.


"사장님, 김매콤(가명) 님 맞으시죠? 김매콤 사장님."

난 소중한 떡볶이에 대한 지불의 값이 명확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떡볶이 아줌마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웃어댔다.

"예, 맞아요."


입금은 정상적으로 되었고, 나는 그녀에게 폰 화면을 보여주며 정상적으로 입금이 되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왜 웃는지 의아하다는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떡볶이 아줌마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애 낳고 살면서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준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기분이 좋았어요, 맨날 누구 엄마라고만 불렸지."

환하게 웃으며 연신 웃어대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워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안녕히 계세요." 라며 꾸벅 인사하곤 떡볶이 집을 나왔다.




누군가에게 내 이름 세 글자로 불린다는 게 이다지도 기쁠 일이란 말인가. 씁쓸함과 동시에 내 주위의 모든 엄마들이 생각났다. 나의 엄마 조차 "OO엄마."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나조차도 남들이 OO엄마라고 호칭하는, 엄마라는 존재의 개별성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나중에 아기를 낳아 김귀염(가명) 엄마가 된다면? 사람들은 나를 '귀염 엄마'라고 부를 것이다. 귀염 엄마도 좋겠지만, 귀염 엄마라는 호칭에만 익숙해져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는 상상 속 귀염이에게 많은 희생을 하고, 엄청난 사랑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퇴근 후 돌아온 남편에게 떡볶이와 튀김 냄새를 폴폴 풍기며 말했다.

"우리가 나중에 김귀염 엄마 아빠가 된다 해도, 나에게 귀염 엄마라는 호칭 대신 내 이름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어. 나도 귀염 아빠라는 말 대신 호묵(가명)이라고 계속 부를 거야."라는 제안을 했고, 남편은 또 혼자 뭘 그리 심각하냐며 반듯이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오늘은 입맛이 없네"라는 나에게 "또 떡볶이 사 먹고 왔지."라는 말을 덧붙며.




최근 엄마의 생일 편지에 '사랑하는 엄마'라는 표현 대신 '사랑하는 OOO님'이라는 엄마의 실명을 적었다. 나의 엄마의 돌아가신 아빠 (할아버지)가 지어주었다는 그 이름.

엄마는 활짝 웃으며 "이름으로 적어주니 더 좋네, 앞으로도 이렇게 적어줘."라는 대답을 했고, 난 그렇게 하겠노라 멋쩍게 대답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OO 엄마', 'OO 아빠'들은, 본인의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아름답기에 충분한 존재들이었고, 여전히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OO이 엄마가 아닌, 항상 사람들의 미각을 충족시켜주는 떡볶이계의 능력자, 프로페셔널한 김매콤님 처럼.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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