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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Aug 17. 2023

마음이 어두울 땐 화장실로

최근 아킬레스건 쪽에 염좌가 생겼다. 많이 걷거나 무리해서 운동을 할 경우 찌릿찌릿 불편함을 야기하던 녀석으로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꽤 오래갔고 통증도 강했다. 게다가 자궁 쪽이 약해지며 잦은 복통에까지 시달리다 보니 잠을 자주 설쳤다. 설상가상으로 냉방병에도 걸리며 일상을 지탱할 기운이 싹 빠져버렸고 루틴이 하나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잔병치레 따위들에 무너져버리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획한 것들이 틀어지는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니 '열심히 해서 뭐 하나'라는 기운 빠지는 생각 속에 갇히기 시작했다. 꾸준히 먹던 영양제들도 거르기 시작했다. '이런 거 계속 먹어도 별 효과도 없는데 뭘' 부정적인 생각의 지배 하에 입꼬리는 서서히 내려가고 미간 근육은 두터워졌다.


다시 기운을 내보자는 마음에 책을 손에 쥐고 활자를 눈에 담아보다가 금세 핸드폰을 켜 SNS 속 일회성 웃음 짤들에 중독되어서 허허실실 웃고 있는 내 모습에 갑자기 화가 났다.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 이런 무거운 감정에 빠졌을 때 탈출하는 나만의 방법들을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다이어리를 뒤적여 이전 비슷한 상황을 이겨낸 뒤 적어뒀던 메모를 찾아냈다. 나만의 슬럼프 이겨내는 방법 3가지. 첫 번째 방법. 전시관 가서 타인의 시선을 담은 작품 하염없이 바라보기, 두 번째 방법. 공원이나 한강에 나가 하염없이 걷기.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아킬레스건 염좌가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전시관까지 갈 엄두도, 폭염 속에 욱신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하염없이 걸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무거운 감정에 탈출하기도 전에 뜨거운 햇빛 속에 잡아 먹힐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이다. 바로 '화장실 청소' 사실 화장실 청소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행위였다. 까만곰팡이와 하수구에 끼인 머리카락 그리고 세면대의 물때들을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났다. 이기적 이게도 결혼 전에는 부모님이 해주시는 걸 당연시 여겼고 결혼 후에는 남편이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신혼 초 깨끗하게 수리된 화장실에 피어난 까만곰팡이를 치약과 락스로 직접 지워보고 난 뒤의 희열에 중독된 뒤로 어느 순간 화장실 청소는 내가 도맡아 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슬럼프가 머리를 어지럽게 할 때면 "생각을 멈추자 하나, 둘, 셋"이라는 나만의 구호를 외치며  베이킹소다와 식초 락스 등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가곤 했다.


아킬레스건은 아직  아팠지만 화장실 청소를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습한 날씨로 인해 타일 구석 속에 평소보다 더 짙게 베인 검은곰팡이들과 누런 물 때 등을 열심히 닦아냈다. 예전에는 요령이 없어 독한 락스를 확 부어버린 뒤 독한 냄새에 콧구멍을 막은 채 청소를 했다면 요즘은 베이킹 소다나 식초 그리고 치약등을 활용한 나만의 건강한(?) 청소법등도 체계화해 가는 중이다. 다 사용했지만 여전히 세면대에 쌓아두던 바디 스크럽제통과 클렌징폼용기들을 치워주고 나니 세면대가 넓어졌다. 락스와 베이킹소다 치약 등에서 몽글몽글 피어난 거품들을 뜨거운 물로 흘려보내고 나니 속이 후련해진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욕실 물기를 제거한 뒤 청소를 하기 위해 밖으로 빼냈던 치약, 칫솔, 샴푸 등을 재배치했다. 깨끗해진 그 공간에서 향긋한 샴푸와 따듯한 물로 샤워까지 하고 나오니 몸이 노곤노곤해진다. 그동안 방치해 뒀던 비타민 영양제도 한 알 삼다. 이 순간에는 핸드폰 생각도, 난 한심해 따위의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깨끗해진 화장실 그 자체에서 비롯된 성취감에서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며칠 아파서 놓쳐버렸던 계획들이 더 이상 깊게 떠오르지 않는다. 깨끗해진 화장실에서 양치와 세수를 하고 새롭게 시작할 하루가 기대될 뿐.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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