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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un 24. 2022

연필이 준 위로

얇고 뾰족하게 잉크를 뿜어주는 볼펜의 매력을 담은 글씨를 좋아했었다. 요즘 힘을 쭉 뺀 채 사각사각, 뭉툭 뭉툭 연필의 매력이 담긴 글씨가 정겹다. 연필을 잡은 뒤에 손가락에 벤 나무향이 좋고 쓰기 전과 달라진 연필심 모양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다.


어린 시절 이후로 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던 연필이 다시 좋아지게 된 계기란 연필과 함께한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짙었기 때문일까.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필통에 챙겨 넣던 엄마가 깎아 반질 반질한 연필들이 생각나고 조금 더 자라 커다란 하이 샤파 기차 모양 연필깎이를 열심히 돌려대던 말랑한 어린 손이 떠오른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사춘기 시절 미술학원에 모여 카터칼로 서툴게 4B연필을 깎아내며 뜬금없이 웃음은 터트리던 빨간 여드름이 촘촘히 밝혀있던 얼굴들도 아른거린다.


내 돈 주고 연필 살 일 없이 휴대폰 캘린더 기능에 익숙해진 채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필이 사고 싶어졌다. 충동적으로 문구점에 들려 모양과 두께가 다른 연필 몇 자루 샀다. 그 이후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두루 갖춘 이 향긋한 물체에 내 검지와 엄지의 지문을 지긋이 묻혀주는 중이다.


삭막한 현실에 지쳐갈 때 유독 어린 시절 너무나 익숙하였기에 지겨웠던 무언가가 위로가 될 때가 가 있다. 요즘의 내겐 연필그중 하나다. 자꾸만 소중한 마음이 들어 만지작거려 보고, 내 지문이 묻은 연필 몇 자루 모아 놓단정하게 심을 다듬어주기도 해 본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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