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고 뾰족하게 잉크를 뿜어주는 볼펜의 매력을 담은 글씨를 좋아했었다. 요즘엔 힘을 쭉 뺀 채 사각사각, 뭉툭 뭉툭 쓴 연필의 매력이 담긴 글씨가 정겹다. 연필을 잡은 뒤에 손가락에 벤 나무향이 좋고 쓰기 전과 달라진 연필심 모양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다.
어린 시절 이후로 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던 연필이 다시 좋아지게 된 계기란 연필과 함께한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짙었기 때문일까.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필통에 챙겨 넣던 엄마가 깎아준 반질 반질한 연필들이 생각나고 조금 더 자라커다란 하이 샤파 기차 모양 연필깎이를 열심히 돌려대던 말랑한 내 어린 손이 떠오른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사춘기시절 미술학원에 모여 카터칼로 서툴게 4B연필을 깎아내며 뜬금없이 웃음은 터트리던 빨간 여드름이 촘촘히 밝혀있던 얼굴들도 아른거린다.
내 돈 주고 연필 살 일 없이 휴대폰 캘린더 기능에 익숙해진 채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필이 사고 싶어졌다. 충동적으로 문구점에 들려 모양과 두께가 다른 연필 몇 자루 샀다. 그 이후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두루 갖춘 이 향긋한 물체에 내 검지와 엄지의 지문을 지긋이 묻혀주는 중이다.
삭막한 현실에지쳐갈 때면 유독 어린 시절 너무나 익숙하였기에 지겨웠던 무언가가 위로가 될 때가 가 있다. 요즘의 내겐 연필이 그중 하나다.자꾸만소중한 마음이 들어 만지작거려 보고,내 지문이 묻은 연필 몇 자루를 모아 놓고 단정하게 심을 다듬어주기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