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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 10. 2023

흘려듣기가 안 돼서 흘려 씁니다

마음속 생채기로 남는 말들이 있다. 나였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의 기분을 고려해서 말할 텐데 라며 곱씹다가 분노가 이는 그것들에 해결책을 주는 것에 충실한, 이성적인 판단에 능숙한 이들은 "그냥 흘려들어"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 잘못 감정 소비를 하는 것조차 아깝다는 이성적인 근사한 판단. 나조차 누군가의 고민에 그렇게 멋진 답변을 해주기도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이유 모를 공격, 본인의 아픔을 나에게 전가하려는 부정적인 말들을 흘려듣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흘려듣기의 정석' 같은 지침서가 나온다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구매해 볼 예정이지만 수십 년째 그러한 지침서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실언을 나도 모르게 코웃음 치고 넘길 때가 가끔 있는데 그 순간 이게 바로 그 어렵다는 '흘려듣기'라는 방법 인가 싶다. 하지만 깊게 박혀 있는 나만의 도덕적 기준을 한참 넘는, 이성적으로 접근해보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무례 말들은 흘려보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되새김질되며 더욱 선명질 뿐이다.


"네 말은 잘못 됐어"라는 날 선 반응 할 때도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아픈 말들을 쏟아내는 이들은 본인이 한 말을 (못하는 척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잘못된 말에 대한 나의 의견과 상대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더라도 결국 각자의 의견에 충실할 뿐이기에 결국 그 대화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분노만을 남길뿐이다.


성격상 흘려듣기를 아주 잘하는 지인들을 따라 해보고자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나는 누군가가 준 생채기에 여전히 아픈 약한 인간인가 보다라며 자조했다. 빈번하게 자조하던 습관은 나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고 명확히 내 기분을 표현하기 어렵게 하기도 했다.


흘려듣기가 죽어도 안 돼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새벽. 오래된 책들 옆에 방치된 빈 노트를 꺼내 생각나는 감정들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담아내듯 날리는 글씨로 휘갈겨냈다. 버리지 못했던 감정이 어찌나 많았던지 A4용지 크기만 한 노트를 세장 꽉 채워버리고서야 비로소 볼펜을 꽉 쥔 손에 일던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은 부었고 꾹꾹 눌러 담은 휘갈긴 글씨들이 창피했지만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마음속에 약간의 이성과 안정아왔다.


그 이후로도 흘려듣기가 안 되는 날들이면 그 말들로 인한 노여움들을 흘려쓰듯 버렸다.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지만 그렇게 쓰다 보니 그저 '분노'로 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감정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또 비슷한 상황이 다가왔을 왜 그 말을 유독 흘려 넘기기 어려운 것인지 객관적으로 인지한 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정형화할 수 없는 부정적 감정들은 살면서 계속 찾아온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버리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버릴 수 없는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서. 흘려듣기가 어려워 아픈 누군가에게 우선 날 것의 감정이라도 흘려 써보라고. 겁내지 말고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라고. 그 종이가 창피하고 그 흔적이 남는 게 두렵다면 그저 찢어버리면 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전히 흘려듣기가 어려운 나 또한 오늘도 흘려 쓰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중이니까.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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