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라의 시간은 길게 누워서 간다

by 움직이기

여행의 설렘으로 온통 신선한 아침, 빨리 나가서 도시를 탐험하고 싶은 마음에 참새마냥 종종댄다.

실크로드 사막도시의 태양이 달아올랐고 나는 어제보다도 기분이 한결 가뿐해졌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미지 탐험에 나서는 이 경쾌하고 감미로운 발걸음!

골목 사이를 고요하게 비추는 흙빛. 부하라에서는 시간이 길게 누워 흐른다.



부하라는 라비 하우스(Labi Hauz)라는 인공연못을 중심으로 구시가지가 오밀조밀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연못 주변으로 나지르 디반베기 메드레쎄, 쿠켈다쉬 메드레쎄 등 신학교와, 실크로드 상인들의 숙소였던 카라반 사라이가 있었다. 그 일부가 카페나 레스토랑, 상점 등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검은색 모자를 쓰는 정통파 유대인들의 무리가 지나갔다. 다양한 문물과 사람들이 오고가는 교류의 장이었던 이곳 부하라에서도 유대인들은 고대부터 환전·대금업에 종사했단다. 아무리 시대와 환경 때문이기로서니, 아무튼 히브리민족의 영민함은 꽤나 인상적인 것이다.

"어디에요?"

부하라로 오는 기차 안에서 만났던 역도코치 아지즈벡씨가 시내에 거의 다 왔나보다. 갑자기 내게 부하라를 구경시켜주겠다던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라비 하우스 근처 기념품 가게 앞을 지날 때, 누가 나를 불렀다. 바로 등에 '우즈베키스탄' 이라고 대문짝만한 글씨가 새겨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 아지즈벡씨였다.



우리는 특별한 말없이 그저 함께 걸었다.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칼론 미나렛까지 걸어왔다. 한낮의 미나렛은 어젯밤과는 다르게 말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각구름 한 점 없는 파랗고 높은 하늘에 바람은 온화했다. 별일이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서 있는 미나렛 앞에서 한국의 삶, 나의 복잡스런 고민들이 어김없이 또 올라왔다. 하지만 결국엔 길을 찾아가게 될 거라고, 크게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긴장 한 올이 풀려나갔고 나는 잠잠해졌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서 미나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냥요. 평온해서요."

흐음. 숨을 들이마시고 깊게 내뱉었다. 아지즈벡씨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시간은 느슨하고 고요하다. 부하라에 며칠째 체류 중인지도 잘 모르겠다. 내 안에서 현재라는 시간은 더욱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꿈틀대는 것 같았다. 과거와 미래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웅크려있던 응어리 같은 것이 서서히 풀어져가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봄볕에 스르르 하고 빗장을 푸는 얼음장처럼.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기 시작한 나를 알아차리고는 좀 놀랐다. 나는 그 사소한 변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사람들을 향해 조금씩 열리는 내 모습도 꽤나 좋았다. 지난밤에는 숙소 주인인 토히르씨와 밤늦게까지 먹고 마시며 대화도 나누었다. 평소의 나라면 불편하고 피곤해서 이런 자리는 일찌감치 피했을 터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심리적 에너지 고갈을 심하게 느꼈다. 사람들과의 교류를 이렇게 저렇게 기피하고 있었다. 사실 이 곳 부하라에서도 다른 사람과 엮이는 일 없이 그저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만 숙소 주인인 토히르씨가 나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는 것이었다. 나는 토히르씨의 살가운 친절이 감사하면서도 매우 부담스러웠다.

토히르씨가 대화를 하려고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다 싶으면 나는 은근히 그리고 냅다 내뺐다. 그냥 딱 간단히 목례하는 정도로 지내고 싶었다. 교류는 지치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우리 진영선생님! 잘 잤어요? 왜 조식은 안 먹는다는 거에요? 그럼 이따가 저녁때 우리가족 식사할 때 와야 해요."

"네? 아...네......하하;;"

"오늘은 어디 갈 건데요?"

"네? 아...네......하하;;"

"오늘 날씨 엄청 좋은데, 부모님한테 영상통화 좀 해봐요. 같이 인사 좀 하게!"

"........................"



보통 이런 식이었다. 내가 밥을 안 먹는다 싶으면 뜨거운 차 한 바가지에다가 빵이니 햄이니 음식을 쟁반에 바리바리 담아서는 방문을 쑥 열고 들어왔다. 참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이 느낌은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굳이 사서 에너지를 낭비하는가 싶었다. 분명 본인 삶도 충분히 바쁘고 분주할 텐데 말이었다.

내가 난색을 표하며 은근히 피해도 토히르씨는 나를 볼 때마다 늘 웃으면서 숙소가 아주 떠나가라 크게 인사해주었고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어찌하면 토히르씨에게 안 잡히고 넘어 가려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는 새벽까지 토히르씨와 차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낄낄대고 앉아 있었던 거였다.

토히르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울기도 했다. 그건 좀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토히르씨는 깊은 눈으로 내가 피곤하고 지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쉬어요."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태양이 반겨주는 신선한 어느 아침이었다.

"한결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진영선생님!" 하며 미소 짓는 토히르씨를 향해 나도 밝게 웃을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 정말 좋아진 것 같아서.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꺾이지 않는 여름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알베르 카뮈 「여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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