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국 히바(khiva)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여기까지 와서 그 아름답다는 히바에 가보지 않으면 두고두고 미련과 후회가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럼 일단 질러보자. 애매한 미련과 후회를 남기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었다.
정적만이 감도는 새벽, 히바 행 열차에 올라탔다. 모든 승객들이 잠들어 쥐 죽은 듯 조용한 기차는 내 미처 예상치 못했다. 승객도 많은데다가 비좁고 어두워서 도무지 내 자리를 찾기가 불가능해보였다. 나는 통로에 망연자실한 채로 서 있었다.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기차역에 울려 퍼졌을 때, 마침 한 승무원님이 구세주처럼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무원님의 뒤를 따라 조심조심 객실로 들어섰다. 좁은 통로를 가운데로 해서 각각 위, 아래에 간이침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무슨 기차가 식당 빈 그릇 반납하는 곳같이 생겼나 생각했다. 첩첩이 쌓아올린 식판 같은 인상을 주는 이런 독특한 새벽기차는 인생처음이었다.
승객들의 팔다리들이 참 가지각색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승무원님은 뭐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삐져나온 승객들의 팔 다리를 신속하게 정돈하시며 훠이훠이 통로를 헤쳐 가셨다. 그리고 내 자리를 찾아 주셨다. 뚝딱뚝딱 승무원님의 몇 번의 손길에 분명히 아까 의자였던 내 좌석은 신통하게도 어느새 긴 침대로 변신해 있었다.
"잘 자요!"
흐음, 이제 가기만 하면 되었다. 잠을 청해보는데 비좁은 침대와 숨 막히는 공간이 불편해서 그런 건지, 긴장이 덜 풀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히바에 가는 설렘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자야해... 기차는 바퀴를 구르며 새벽의 무거운 정적을 깨고 달리고 있었다. 창밖엔 어스름한 나의 형체만 보일 뿐 세계는 온통 침묵과 어둠에 잠겨있었다.
기차 안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간밤에 위쪽에서 잠을 자던 승객들은 다들 어느새 참새처럼 새초롬히 아래쪽 좌석에 쭉 앉아있었다.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푸석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비벼대었다. 창 밖에 끝없이 트인 대지를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좋다.
어느덧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기차는 점점 히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입김이 나올 만큼 차가운 히바의 공기가 정신을 바짝 깨웠다. 드디어 고요한 사막도시 히바에 도착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유역으로 고대문명이 발달했다. 기원전 6세기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이후에는 스키타이의 지역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후 6세기 중엽부터는 돌궐 제국이 지배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이후 이슬람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14세기 티무르 제국을 거쳤다. 이후 16세기에 우즈베키스탄은 히바 칸국, 부하라 칸국, 코칸트 칸국으로 분리되었다.
히바칸국의 수도였던 히바는 아무다리야 강 하류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시절부터 카라쿰 사막의 출입구이자 실크로드의 중요 경유지였다고 한다. 히바의 중심부는 외성인 디샨칼라, 내성인 이찬칼라 이렇게 이중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찬칼라는 남북길이 650m, 동서길이 400m, 높이 10m에 달하는 성벽이란다.
내성 이찬칼라(Ichan kala)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안 창문 커튼을 열어젖히니 얼음처럼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방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2월 말, 히바는 한겨울이었다. 방안은 금세 적막해졌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 고독감이 뱀처럼 몸통을 휘감으며 올라왔다. 동시에 내면은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잠복하고 있던 생각이 파편처럼 툭툭 튀어 올랐다. 이 상태에 들어오면 나는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무거울 때도 있는데 오늘은 좀 무거웠다.
"잘 도착했니?" 부하라에서 굴리야한테 메세지가 왔다. 곧 토히르씨한테도 메세지가 왔다.
따끈한 차를 꿀꺽 들이키고 달콤한 건포도를 입에 넣었다. 곧 괜찮아질 것을 안다. 곧 가벼워질 것을 안다. 그럼 굴리야와 토히르씨에게 보내줄 사진도 한 장 떡하니 찍을 거다.
시간이 박제된 듯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내성을 천천히 음미하듯 걸었다. 중심 쪽으로 나가자 드디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흥겨운 노랫소리와 박수소리가 한데 뒤엉켜 들렸다. 지금 막 결혼한 커플이었다. 커플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서 춤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즈벡에는 결혼하는 커플들이 참 많다. 어떻게 결혼이라는 결심이 개인에게 찾아오는 걸까? 인생의 어떤 특수한 지점과 상황, 적절한 타이밍 같은 자연스런 흐름이 형성되는 건가? 의지인가, 운명적인 이끌림인가? 어째 나는 저 세 가지 요인 중 그 어떤 것에도 근접해본 적이 없다...
이찬칼라 안을 걷다가 남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성 외곽을 빙 둘러싸고 이어져 난 길이 나왔다. 길옆으로는 황량하게 펼쳐진 넓은 터가 있었고, 터 안쪽에는 주민들이 사는 동네가 있었다. 곳곳에 정비가 안 된 흙밭에는 닭들이 뛰어다녔다. 코흘리개 어린애들은 신나게 술래잡기를 했다. 저쪽에는 사막바람을 가로질러 걷는 한 여인이 있었다. 긴 벨벳 드레스에 두건을 길게 두른 여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강인하게 느껴졌다. 언제라도 기품 있고 용감하게 말에 올라타서는 채찍을 휘두르며 초원을 누빌 것만 같다.
땅을 밟고 걸으니 어수선했던 마음이 차츰 내려앉고 잠잠해졌다. 속에서 튀어 오르는 생각들과 고민들을 오롯이 마주했다. 질문하고 질문했다.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또 그렇게 내 속에 흐르도록 놔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