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빠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부모님에게 고민을 털어놔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아빠는 대화의 대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나는 아빠와 대화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빠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이후에는 한심하면서 안타까운 한 명의 인간이었다. 아빠는 동거인이었지만 관계성은 남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동생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내가 가족 모두와 심리적 거리감을 두고 살아오는 동안 동생도 비슷한 방법을 터득했던 것 같다. 결국 우리 가족은 각자가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서로에게 의지할 수도 있었지만 혼자 견디면서 살아왔다. 가족들끼리 아빠를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할 수는 없었으니까.
각자의 고립 가운데에서도 나는 엄마를 배려해야 했다. 아빠가 술에 취해 자고 있을 때에도 엄마는 일 하느라 밤 늦게 귀가하는 날들이 많았다. 엄마는 인력 사무소에 등록하여 매일 이곳 저곳 식당을 전전했다. 멀리 위치한 식당을 배정받을 때마다 엄마의 귀가는 늦어지곤 했던 것이다. 솔직히 내가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이렇게까지 힘든 생활을 했었는지 알지 못했다. 나 역시 사춘기였고 매일 싸우는 엄마 아빠 때문에 집이 답답하고 싫었었다. 그래서 나 역시 가족들과 담을 쌓고 살아왔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엄마가 가여워졌다. 때로는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엄마가 답답했지만, 아빠를 대하는 방식대로 엄마를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누르고 엄마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로 했다. 엄마의 대화 상대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엄마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로 한 것은 일종의 의무였다.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해준 엄마에 대한 보상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 배려가 아빠를 향하지는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아빠를 내 삶에서 배제시켰다. 어린 시절 나를 외롭게 키운 아빠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단지 더 이상 아빠가 필요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빠 역시도 본인이 젊었다면 자식들의 냉담한 반응에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술을 얻어 마시겠다는 주위의 친구들이 있었고, 돈을 펑펑 써 대는 습관 때문에 술집에서도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본인이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아빠를 찾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아빠는 가족들에게 시선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가족들을 찾아서는 안 되었다. 아빠는 가족들에게 본인의 역할을 보여주지 않았다. 따라서 아빠의 시간과 돈을 함께 나눠 사용한 사람들로부터 위안을 찾아야했다. 나이 먹어 병들고, 경제적 능력도 없을 때에서야 가족 안에서 삶의 평안을 얻고 싶었던 아빠였지만 그러기에는 나를 포함한 가족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아빠라는 사람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는 아빠의 부재가 컸었다. 아빠가 가족들 곁에 없었다는 것을 단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 역시 늙고 힘 없는 지금 외롭다고 불평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외롭다고 불평한들 공감해줄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빠도 당황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족들은 이미 충분히 연습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멀리하는 연습, 가족이라고 무조건 기대서는 안된다는 생각, 가족 구성원이 모두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없다는 생각들을 40년 넘는 시간동안 훈련을 해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아빠는 주위에 늘 사람들이 가득했었다. 그러다가 돈이 없게 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환경이 익숙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빠의 독립을 지켜봐 줄 여유가 없었다. 이미 상처에 상처가 거듭되어 마음이 곪아 터져 딱지가 앉은 자리를 또 다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외롭다는 말을 가족들 앞에서 해서는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