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지영 Sep 14. 2022

얼마나 힘들면 자살을 시도했을까?

모든 사건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아빠의 욕심과 사람들의 부추김 혹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겠다는 마음.. 불운의 시작은 사람들의 삐뚤어진 마음이었다. 

아빠는 사회생활 경험이 거의 없다. 살면서 대수술을 몇 번 받아 병원 생활이 길기도 했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참아내기 보다는 그 상황을 던져 버리는 쪽을 선택하면서 살아왔던 분이다. 대부분의 가장들 혹은 가장이 아니더라도 당장의 카드값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동료들의 따돌림에도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사람들과 관계가 서툴다. 다른 사람들이 아빠를 진짜 좋아해서 접근하는 것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의 중심에 서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갖는 기대감도 부담스럽지만 그들의 질타를 들어야 하는 상황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은 늘 가장자리였다. 구지 가장자리가 아니더라도 군중 속에 포함되어 잘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속 편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길 원했고 다른 사람들이 본인을 떠받드는 상황을 즐기셨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작은 마을이다. 서울과 경기의 경계선에 100가구 남짓한 가구들이 모여 사는 매우 작은 마을이다. 그만큼 서울 시내와 비교했을 때 여유롭지만 낙후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도 어르신들을 위한 마을회관이 있다. 아빠의 불행의 시작은 마을회관의 회장을 하겠다고 나서면서부터였다. 작은 동네였지만 사람들과의 불화가 많아서 마을 회관의 회장 자리는 1년에 한번씩 바뀔 정도였지만 아빠는 앞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의 감언이설에 회장직을 수락했다.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인지 회장으로서의 역할,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전혀 없었다. 단지 회장에 대한 직함이 좋았던 아빠는 고민없이 수락했던 것이다. 아빠의 성격을 알았던 가족들은 아빠가 수락하지 않는 쪽으로 설득했지만 가족들의 말을 들을 아빠가 아니었다. 결국 아빠의 불운은 아빠 본인이 자처했던 것이다. 

회장이 된 이후에 아빠는 회장이라는 타이틀에 취해서 동네 어르신들과 매일 술을 드셨다. 내 기억으로는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만취 상태까지 드셨던 것 같다.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회장직에 취해 있는 동안 함께 일했던 총무는 공금을 횡령했던 것 같다. 마을회관에 무슨 공금이냐고 하겠지만 정부의 보조금과 마을회관 공터를 주차장으로 개조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수입금이 꽤 컸다. 또한 가끔 드라마 촬영을 위해 오거나 동네 인근에 주유소라도 들어서면 마을회관에 일정 금액의 돈을 주었던 것 같다. 

문제는 늘 만취해 있던 아빠는 마을회관의 수입이 얼마나 들어오고 어디에 쓰이는지 단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총무는 어떤 누구의 감시도 없이 아빠를 방패막이 삼아 공금을 횡령했고 이 사실을 안 일부 주민들은 공금 횡령을 문제 삼았다. 총무는 회장이 시켜서 했던 일이라며 뒤로 물러섰고 모든 책임은 아빠에게 돌아왔다. 영악한 총무는 아빠가 시켜서 한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 두었고 아빠는 앞뒤 상황을 모른 채 고소를 당했다. 

아빠는 억울하다고 했다. 마을회관 돈을 만져 보지도 못했는데 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느냐고 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아빠편을 들어줬어야 했지만 나는 아빠의 잘못도 50%라고 생각했다.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가장 높은 직급의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말렸던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회장직을 수락했던 사람이 아빠 아니었던가.

한 건의 고소는 5건, 10건으로 늘어났다. 횡령, 폭행 등등 고소에 고소가 이어졌다. 마치 고소가 취미인 듯한 사람들 같았다. 모든 고소의 대상은 아빠였다. 그들 역시 총무를 고소하고 싶었지만 총무는 자신의 이름을 어떤 서류에도 올려놓지 않았다. 반면에 아빠는 마을회관에 본인의 인감을 놓아두고는 필요할 때 언제든 사용하라고 했던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소의 대상은 명확하고 분명했다. 눈에 잘 띄고 좋은 먹잇감은 아빠 뿐이었다.

처음 고소장이 접수되었을 때에는 가족들 역시 아빠에게 등을 돌렸다. 가족들이 만류하는 것을 본인의 고집으로 수락했고, 1년 내내 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술만 마신 결과라고 생각했다. 결국 아빠는 총무의 도움을 받아 변호사를 선임했고 재판을 준비했다. 총무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미는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아닌, 총무가 소개해준 변소사와 계약했다는 뜻이다. 총무의 경우 본인이 고소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도의상 도와준다며 생색이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이 피곤했다. 겪지 않아도 될 것을 겪어야 하는 것에 대해 아빠에게 무척 화나 있었고 심지어 아빠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도 사리 분별 못하는 아빠가 한심했고 답답했다. 

고소에 맞고소, 또 다른 고소가 2년간 진행되었다. 이때 즈음에는 엄마도 두손 두발을 걷고 아빠를 도왔다. 아빠가 억울하고 가엾어서라기 보다는 꽤 큰 금액의 돈이 변호사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미 수천만원의 돈을 사용하고도 재판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한 건을 이기면 반대쪽에서 항소를 해왔고, 반면에 재판에서 지면 총무는 항소를 해야 한다고 아빠를 부추겼다. 가족들은 항소하지 말고 여기서 끝내자고 했지만 아빠는 가족들보다는 총무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이것이 아빠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가족들의 의견은 항상 무시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마치 신의 말처럼 받아들이는 태도. 결국 아빠는 총무가 고소를 하자면 고소를 했고, 항소를 하자면 항소를 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고 그럴수록 반대편 사람들의 타겟이 되어갔다.

끝나지 않는 재판은 3년이 흘렀어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0개 중 2개 정도가 마무리되었고 여전히 아빠 이름으로 걸려있는 재판은 8개정도 남아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을 위해 수천만원이 더 필요했다. 여전히 나는 이 과정 어디에서 발을 걸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재판에 개입해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가족들에게 피해만 끼치는 아빠가 참을 수 없이 미웠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엄마는 동생의 출근을 챙겨 주느라 바빴지만 나에게 와서 아빠가 이상하다고 했다. 아빠가 약을 먹은 것 같다는 것이다. 

아빠는 보통 동생이 출근할 때 즈음에는 마당에서 손볼 일은 없는지 이곳 저곳을 살피거나 동네운동장을 한바퀴 걷고 오셨다. 그날따라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엄마가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또한 새벽 예배를 다녀올 때 현관 앞에 아빠가 사용했던 컵이 놓여 있었는데, 냄새를 맡아보니 약(제조제) 냄새가 났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에게 약을 먹었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직 아빠가 괜찮아 보였고 약을 먹더라도 조금만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사람이 그렇게 쉽게 목숨을 끊겠어?’라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119에 연락하고 바로 구급대가 도착했고 엄마가 아빠와 동행했다. 급한 일만 해결하고 나도 바로 따라가겠다고 전했다. 1시간 후 나 역시 움직이려고 하는데 엄마에게 연락이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봤지만 전화벨은 집에서 울렸다. 경황이 없던 엄마가 휴대폰을 두고 갔던 것이다. 나는 다시 119에 연락하여 아빠가 어느 병원으로 이동됐는지 확인했고 이동하면서 동생에게도 병원으로 오라고 전했다. 

병원에 도착해서야 아빠가 심각한 상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 의식이 있었던 아빠는 치료를 거부했고, 의사는 보호자들을 불러 아빠가 어떤 약을 먹었는지 확인하면서 아빠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라고 했다. 엄마가 아빠를 설득하는 동안 나는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아빠가 어떤 약을 먹었는지 찾기 시작했다. 아빠는 제초제를 드신 것이다. 그때도 역시 가족들이 먹을 만큼의 밭농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농약과 제초제가 많았다. 그 중 하나를 뜯어서 소주와 함께 드셨던 것이다. 제조제 병을 들고 병원에 도착하였더니 의사는 성분을 확인했다며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치료를 거부하는 아빠를 설득하라고 했다. 가족들이 한 명씩 아빠를 만나면서 제발 치료를 받으라고 설득했고 결국 아빠는 위세척을 했지만 이미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엄마가 새벽기도를 갔던 시간이 4시라고 가정하면 분명 4시 조금 넘어서 약을 먹었을 것이다. 이미 5시간이 흐른 후였기 때문에 의사들은 예후가 좋지 않다고 했다. 

뻔뻔스럽게도 총무는 병원에 도착해서는 아빠를 대상으로 고소했던 반대편 사람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자살을 생각하게 했던 것은 총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빠는 약을 먹기전에 유서를 남겼다. 지속되는 재판과정이 너무 힘들다고.. 반대편에서 끊임없이 고소해오는 사람들도 견딜 수 없지만 총무 때문에 더 힘들다고 했다. 

위세척은 했지만 너무 늦은 탓에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부터 아빠는 의식이 없었다. 가족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중환자실 앞에서 아빠가 무사히 깨어나기를 기도했다. 보호자에게 일일이 그날의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간호사를 찾아가 아빠의 상태를 물었다. 그때마다 간호사분들은 의사선생님을 만나게 해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늘 최악을 가정하고 아빠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오늘은 폐에 물이차서 힘들어한다. 오늘은 아빠가 자가 호흡을 못했다.’ 등등의 답변 뿐이었다. 그러더니 아빠가 위급한 상황일 경우 심폐소생술을 진행할 것인지 물었다. 현재 약물이 온몸에 퍼져 있기 때문에 깨어났을 때의 상황을 장담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심폐소생술을 진행할 것인지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의사선생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의사선생님의 답변이 부정적인 것을 듣고는 하지 않겠다며 서류에 사인하셨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나는 자책했다. 아빠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줄걸, 아빠가 얼마나 힘들지 그 마음을 살펴줄걸.. 그랬다면 아빠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았을테고,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에는 내 마음이 꽁꽁 닫혀 있었다. 너무 두꺼워서 나 조차도 이제 밖으로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왜 나는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야 후회를 하는 것일까.

이전 06화 대화가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