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빠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었을까? 내 기억력의 문제일까, 아니면 진짜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일까? 학업 성적이 떨어졌을 때, 수능 점수가 낮아서 끝도 없는 바닥으로 자존감이 낮아졌을 때, 진로를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어떤 심정으로 어렵고 힘든 과정들을 거쳐왔던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지난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고 있으니.
대화는 상호간에 의미 있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의미 없는 단어들을 퍼붓는다면 그것은 대화일까? 소음일까? 나에게 아빠는 소음이었다. 아빠는 유독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싫은 이유들을 읊곤 했다. 살면서 내 맘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설사 특정 사람이 싫다고 가족들에게 일일이 그 이유를 퍼부어 댄다면 듣는 사람들은 얼마나 피곤할까? 그것은 의미 없는, 그냥 시끄러운 소음이다. 소음도 대화라면 나는 아빠와 꽤 많은 대화를 했던 셈이다. 매일 저녁마다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들어야 했으니까. 소음의 반은 욕설이고 반은 부정적인 단어들의 나열일 뿐이었다. 매일 이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내가 아빠를 어떤 존재로 인지했을 지는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빠가 그의 자식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니까 관심이 있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단 한번도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 봐준 적이 없었다. 물론 아빠가 자식들을 믿어서 물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빠도 부모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주 약간의 관심은을 보이고, 인생의 길잡이는 되어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인생에서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나는 아빠를 찾지 않았다. 평소에 관심을 보여야 의논이라는 것을 할텐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고 있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내 미래를 논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아빠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내가 너무 의미에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다시 일상적인 대화로 되돌아가보자. 저녁은 먹었는지, 학교에서는 생활은 어땠는지 등을 묻는 것이 일상적인 대화라면, 이것 역시 나는 아빠와 나눠본 기억이 없다. 아빠는 주로 술안주가 없다, 음식 맛이 왜 이러냐 등등 본인과 관련된 일상적인 대화를 엄마와 나눴을 뿐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서로가 고민을 얘기할 수 있는 관계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가끔 만나는 친구와 같이 일상적인 대화도 불가능했다면 과연 아빠와 나는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