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꿈의 격차 02화

불안한 삶

by 서지영

나의 불안한 삶은 15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나에게 지독한 소외감을 주었던 아버지였다. 이즈음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야 할 것 같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자기중심적인 분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성향은 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다. 유난히도 아들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는 아버지의 생각과 판단, 행동을 늘 지지하셨다. 비록 그 행동이 법을 어기는 행위였다 해도 할머니는 아버지가 무조건 옳다 하셨을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그의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여과 없는 삶을 살아왔다. 공부는 끔찍이 싫어했지만 음주가무는 즐기셨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많이 배우지 못하셨다. 인생을 즐기기에 앞서 적당한 선을 지키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었다면 아버지의 인생은 지금과 달랐을까?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이 틀린 것이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결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도 본인이 그런 상처를 줬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식으로부터 미움 받는 부모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부모에 의해 자식의 인생은 번창할 수도 있고, 시궁창에 처박힐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학창시절 누구나 다닌 학원을 다녀본 적이 거의 없다. 고등학교 3학년때 어머니를 졸라서 수학 학원을 다녔던 기억이 전부이다.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고, 나는 공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학습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늘 바빴다. 동생과 나의 학비와 동생의 사교육비, 그리고 생활비까지.. 어머니로서는 삶 자체가 충분히 고달팠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주 얘기하셨다. “공부해”. 하지만 “공부해”라는 말에는 왜 공부가 중요하고,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지 않았다. 단지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는 “공부해”라는 말은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대학을 진학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진로를 고민할 시기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원한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상상해볼 수 없었다. 단지 부모님의 직업들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의 직업은 높은 학력을 요구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물론 학교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학교 역시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한반에 60명에서 65명까지 꽉 채운 교실에서 선생님은 개개인의 진로를 함께 고민해줄 여유가 없었으며, 그날 그날의 진도를 나가기에도 바빴다.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에 대한 고민없이 단순히 취업이 잘 된다는 학과를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선생님조차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전공을 살려 취업을 했고 지금까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17년 가까운 기간 동안 IT 직종에서 일하면서 나 자신에게조차 묻지 않았다. “그때의 선택에 후회하니?”, “행복하니?”라는 질문을 인생의 중간 즈음에라도 했었다면 지금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불행한 삶은 아니지만 행복한 삶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삶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으니 이제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해야 할 것 같다. 아버지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더니 이윽고 여러 방향으로 가지치기를 했다. 특히 가족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가지들은 다음과 같다.


1. 내가 돈을 벌었으니, 나를 위해 쓰는 것이 먼저지

나는 그 어떤 부모로부터 자식보다 자신이 먼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의 성향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행위자에게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가족이어야 할까, 어렵고 힘든 일만 공유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나는 가족의 구성원이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힘든 육체노동으로 번 돈을 유흥비용으로 사용하셨다. 늘 술에 취해 귀가하셨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장시간의 술주정이 이어졌다. 그 당시 우리집은 어려운 살림에 각자의 방이 없었다. 동생과 나, 부모님을 위한 방과, 할아버지를 위한 방, 이렇게 두개가 있었다. 아버지가 번 돈을 그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다. 세상의 중심이 그 자신이었던 아버지였기에 가족을 위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급기야는 다른 여자를 만나셨다. 술과 여자로 가족을 등한시한 7년간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싸우셨다. 부모님의 싸움은 늘 어머니의 눈물로 끝났다. ‘내가 이 집에서 없어져야지’, ‘내가 죽어야지’라는 말과 함께. 반면에 아버지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늘 편하게 주무셨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해장에 필요한 음식들을 요구하셨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지켜봤을 때의 내 나이가 고작 15살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본인이 그 자식의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아 버린 것을 알고 있을까?

나는 15살부터 이후 7년간 어머니 곁을 떠나는 것이 불안했다. 정말로 어머니가 집을 나가실 것 같았다. 학교를 가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집중할 수 없었고, 매일 불안했던 심리 상태는 분명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을 것이다. 음침하고 우울한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힘든 육체 노동으로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음식이라도 잘 먹었어야 했지만, 어머니는 늘 김치가 최고라고 하셨다. 어쩌다가 사온 고기는 아버지가 먼저였고, 남은 것들은 동생과 나를 주셨다. 언젠가 집에 생성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평소 우리집에서는 고기나 생선은 구경하기 힘든 음식이었다. 한창 들써서 저녁을 먹으려는데 생선이 없었다. 어김없이 늦은 귀가를 위한 아버지 반찬이란다.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어머니는 왜 그때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을까? 어머니는 그녀 자신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게 왜 헌신했던 것일까? 어머니는 아마도 동생과 내가 눈에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과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떠나도 되지 않았을까?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떠나도 되지 않느냐고, 그것이 힘들면 졸혼이라고 생각해보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어느덧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그가 불쌍해서 떠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 나이 70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기죽어 사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의 요구에 철저히 복종하신다. 이것 역시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향이다. 시집온 첫날부터 아버지와 겸상을 금하셨고, 아버지 밥상에는 고기나 생선 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잔소리를 듣고 살아온 어머니였다. 결국 수십년간 반복되어온 그녀의 행동들이 습관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습관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이되었다.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들을 참아야 했다. 어짜피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은 ‘뭐 먹을래?’로 시작한다. 누군가 나에게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대답한다. 참고 사는 삶이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내가 뭘 먹고 싶은지,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때의 불안한 7년간의 생활을 들여다보면(내 불안한 삶은 15살부터 22살까지 이어졌다) 단 1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다. 어머니가 집을 나갈까 언제나 전전긍긍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귀가했는데 어머니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트럭에 야채를 싣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일을 그만두셨던 때였다. 이후 각자 다른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몇일의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분명히 집에 있어야 했는데 그날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내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어머니가 가실 만한 이웃집들을 찾아다니며 문틈에 귀를 대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나는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가 울면서 동네 아주머니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것은 그만큼 어머니의 생활이 고달팠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정신차리고 공부 하려해도 언제나 술에 취해 술주정하는 아버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듣는 것뿐이었다. 어머니를 이 상황에서 구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 자괴감, 아버지를 향한 원망, 미움.. 결국 남은 것은 이런 감정들뿐이었다. 대학교를 갈 수 있는 형편도 안되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못했던 나는 전문대를 진학했다. 그런데 그 2년의 기간도 불안하고 힘들었다.

나는 대학 생활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대학 생활 2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점심으로 밥대신 분식만 먹었다. 학교 식당보다 분식이 500원 정도 쌌기 때문이다. 하루에 주어진 용돈은 교통비와 분식 값이 전부였기에 선택권이 없었다. 친구들이 놀러 가자고 할 때마다 나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매일을 힘겹게 버텨냈음에도 아무 생각 없이 놀 수 있는 단 하루의 자유가 왜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을까? 나 스스로 돈을 벌기 전까지 단 한번도 외식이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다. 단 한번도 여행을 가본적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모든 술값은 아버지가 계산하셨으며, 정말 많이 취한 날에는 늘 택시를 타고 귀가하셨다. 또 바람 피운 상대에게 쏟아 부은 돈까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500원이 없어서 밥 대신 떡볶이만 먹었던 2년, 하지만 어김없이 택시를 타고, 자신에게만 유독 한없이 너그러웠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나의 학창시절을 망쳐 놓은 것을 용서할 수 없다. 친구 한 명 없이 지내야 했던 학창시절, 혹시라도 발생할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불안감, 매일 계속되는 아버지의 술주정으로 나의 20년 넘는 시간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지금도 생각해본다. 20년이라는 시간을 다르게 보냈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힘들게 공부하면서 사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까?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를 이렇게 지독히도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그래서 가능하면 아버지와 마주치는 기회를 차단했다. 결국 내 인생 통틀어 아버지와 대화했던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을 것이다. 대화라고 할 것도 없다. ‘식사하세요’, ‘전화 왔어요’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나는 어머니의 성향을 물려받아 자존심이 강하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의 치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 따라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 큰 도전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나는 전문대에 진학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4년제에 진학했고, 그들이 ‘너는 어느 대학가?’라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었다.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문대에 다녔었다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사진을 찍지 않았고,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를 지켜준 것이 ‘자존심’이고, 지금의 나를 갉아먹는 것 역시 ‘자존심’이다.


2. 왜 나만 일해야 하지?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셨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생활력’이 없었다. 나는 가끔 궁금하다. 아버지는 왜 결혼이라는 것을 선택했을까? 아버지는 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즐기는 그 자체가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나이 30을 넘기자 불안한 할머니는 아버지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실제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맞선 이튿날 결혼 날짜를 잡았다. 어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두 번 만난 사람하고 결혼을 약속할 수 있느냐고. 그런데 어머니는 한번도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신 적이 없다. 단지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그때는 그러고들 살았다고만 하셨다. 어머니의 선택에는 두가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어머니 역시 30살이 가까웠지만 결혼을 못함으로써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죄책감과(어머니 세대에는 결혼이 선택이 아니고 필수였다는 것을 고려해야한다), 중매를 주선한 사람의 거짓말이다. 중매를 주선한 사람은 아버지 집안이 부유하기 때문에 결혼하면 어머니가 고생 없이 살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 어머니가 아버지의 성향을 파악했다면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향이라는 것을 파악하기에는 이틀은 너무 짧았다. 그렇게 결혼은 성사되었고 그때부터 어머니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삶을 즐겼다는 말은 저축해 둔 돈이 없다는 것과 동의어가 될 것이다. 힘들게 번 돈은 주로 유흥비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저축해둔 돈이 없는 것은 물론, 결혼 이후 가족에게 생활비를 주는 것에도 인색하셨다. 본인이 원해서 했던 결혼도 아니고, 사랑이 전제된 결혼도 아니었으니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갖지 않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결혼 이후에도 자신을 위한 지출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족들의 빈곤한 생활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식당 설거지나 건물 청소 등을 전전하면서 동생과 나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어머니는 본인 나이 65살까지 건물 청소일을 하셨다. 아마 본인의 건강이 허락했다면 더 길게 일하지 않았을까? 반면에 아버지는 50살 이후 거의 일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했던 육체노동은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50살 이전의 경제활동도 따지고 보면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가 청소일 하는 건물에서 경비원을 채용한다고 아버지에게 일해볼 것을 권하셨다. 아버지는 한달 일하시고 그만두셨다. 세상의 중심으로 살아왔던 분이다. 일을 하고 싶으면 하고, 누구 하나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면 일을 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건물 입주자들에게 존중 섞인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드셨던 것 같다. 50살 이후 지금까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노동에 대한 대가와 자식들의 생활비로 생활하신다. (사실 그 이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집안을 이만큼 이끌어 온 것은 본인의 노력과 희생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해두지만 내가 태어난 이후 우리집은 어떤 발전도 없다. 내 나이 40이 넘었고, 자식들에게 큰 돈이 들어갈 일이 없었음에도 부모님의 전 재산은 몇 천만원이 전부였다(동생과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돈이 들어갈 일이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일거리로 밭일을 하신다. 삼촌 땅의 한 켠을 빌려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채소들을 심으셨다. 어느 날 어머니는 밭일이 많을 것 같지 않다며 아버지에게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나 혼자 먹는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일하냐’고 핀잔주는 아버지.. 기가 찬다.


3. 감정 쓰레기통

얼마나 많은 가슴 아픈 얘기들을 듣고 자랐을까? 아버지의 술주정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어머니와 나였다. 그때 당시 동생은 어렸고,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고 자랐기 때문에 나와 같은 감정으로 아버지를 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버지가 귀가하기 전에 잠이라도 자는 날이면 ‘쟤 내일부터 학교 보내지마, 가르쳐서 뭐할건데’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셨다. 나는 지금도 잠귀가 밝다. 늦은 저녁 누군가 거실에서 발걸음을 옮겨도 바로 잠에서 깰 정도이다. 어린시절에도 잠들었더라도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잠에서 깨는 일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왜 나에게 독한 말들을 퍼부었던 것일까? 한번도 책임지지 않았던 가족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내가 태어남으로써 본인의 책임감이 가중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나는 매일 밤에 남몰래 울면서 잠들었다. 4명이서 북적북적 함께 자야하는 작은 방에서 혹시라도 누군가 내 울음 소리를 들을까 하여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해가 떴을 때 진짜 학교를 갈 수 없을까봐 두려웠다. 중학교 때부터는 내 방이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눈물을 감추면서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 어머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어야 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날까봐.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그때 우리를 떠나시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 그녀의 인생을 위해서. 적어도 한 사람은 행복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셨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있다. 어머니의 발목을 잡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 가족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었을 힘든 육체노동을 65세까지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최근 나는 어머니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은 같이 걸으려고 노력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이 일했던 장소를 가리키신다. ‘저 인력 사무소는 1년간 갔었어. 여기 가라하면 가고, 저기 가라하면 가고..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그래도 1년을 다녔네.’ 또 다른 식당을 가리키시면서, ‘저기는 13년간 일했던 곳이야.’ ‘저 건물은 16년 넘게 청소한 곳이야.’ 좁디 좁은 공간에서 13년간 식당 설거지를 하셨던 어머니는 지금도 폐쇄공포증을 앓고 계신다. 방문을 닫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볼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무렇지 않은듯이 그동안 일했던 장소들을 말해주었던 그날 나는 어김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다 잠들었다.

삶은 참.. 아프고 고달프다.


내가 만일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쓸데없는 걱정은 덜어두고 행복한 고민만 하리라

단순한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고
삶의 매 순간순간 집중하리라
할 수만 있다면 빚을 지고서라도 여행을 가리라

새로운 것을 겁내지 않고 해보고 후회하리라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하고 살리라.

내가 만일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이들을 알아가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리라

포기할 것은 일찍 놓고
다양한 가능성을 추구하며 경험해 보리라

다름을 이해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리라

어떤 이에겐 길다면 길고
어떤 이에겐 짧디 짧은 이 내 삶이,
수많은 실수와 경험들로 지나 왔겠지만

더 많은 실수를 하며 느끼고
더 다양한 경험을 찾아 다니며 살아가리라.


그렇게 살아가리라 – 전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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