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맞닥뜨린 것이 사람들의 외면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다. 물론 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때의 기억이 없다. 단지 나의 어머니에게 띄엄띄엄 들었던 그녀의 서글펐던 과거가 나의 피부를, 나의 심장을 고스란히 관통하여 아프고 저릴 뿐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나 자신은 범죄의 결과도 불행의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독히도 가난하긴 했지만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불편한 대상이었던 이유는 내가 단순히 '여자' 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서나 들어 봤을 이야기를 현재, 그것도 21세기에 듣게 된다면 누가 믿어 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답답하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인데 누구를 설득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내가 태어난 것은 40년 전의 일이고, 그 당시 내 존재를 불편하게 생각했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원죄와 지독히도 가난했던 삶은 결국 내 삶에 큰 상처를 남겼다. 어린 나이에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놓고 불편한 눈빛과 말들을 내뱉는데 어찌 모를 수 있었을까? 결국 상처를 덜 받기 위해 나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고 그 결과 독립적인 성향을 갖는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반갑지 않다. 나중에 영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외국 문화에는 ‘Personal space’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 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의미로 사용한다고 한다. 나의 독립적인 성향이 그들에게는 ‘보통의 한국인들과는 다르게 독립적인 성향을 갖는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정의하는 내가 싫다. 겨우 무뎌진 상처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자석처럼 어떤 이끌림에 끌려 한참 동안 덧나서 아픈 상처를 들여다본 후 나는 빌어본다. ‘제발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마라.’
미리 밝혀 두지만 나는 ‘여성’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위해 투쟁할 만큼 내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분명 ‘여성’ 이라고 차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내 어머니의 삶이 그러했고 나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자신조차 나의 지난 삶을 되돌아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지금이 그 시작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릴적 기억은 6살인가 7살 부터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상황들은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거나 아주 흐릿한 기억을 붙들고 쓰는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유별나게 남자 아이를 원했던 한 가정에 여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서 나의 소외감이 시작되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억울하다. 내가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그 부당함은 왜 나의 몫이어야 하는가? 되묻고 되물어도 나는 답을 알지 못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도 쉬기 어려울 때 우연히 집어든 책이 단테의 신곡이었다. 책에 의하면 일련의 결과(인간의 행위나 자연의 결과)들은 자연의 이치와 같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환영하지 않았던 가정의 가족이 되었던 것 역시 특별히 누군가의 잘못이 아닌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신이 나를 지독히도 미워했기 때문에 이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해를 살아도 끊이지 않는 불행은 필히 신에 의한 저주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에 의하면 신은 나 따위에게 불행을 몰아 주기위해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 논리에 설득당했고 결국 나의 모든 불행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불행을 불행 그 자체로 받아들인 것은 최근의 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40여년간 신의 저주의 대상이었다는 생각을 품으면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테의 신곡은 단순히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불행을 받아들이라고 결론 짓지는 않는다. 다음은 중요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게 되도 정의, 그렇게 되지 않아도 정의라고, 그렇다면 자네들이 살아야 할 길은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라네. 만물이 모두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면,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 하늘이 자네들을 움직이게 한다네. 그러나 그것을 알고, 그것을 빛으로 삼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간다면, 자네들은 하늘의 작용에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가 아니겠는가. 혼란은 자네들 마음속에 있을 따름이야.
나의 힘들고 고단한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불행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 책이다.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할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멀리했다고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차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나는 자주 울었다고 한다. 아마도 나를 봐 달라는 관심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관심 받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어머니의 고된 삶을 더욱 힘들게만 했다. 할머니에게는 손자가 아니면 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였던 어린 나를 돌봐 주는 것을 거부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힘든 노동 현장에 나를 업고 다니셨고, 힘든 육체 노동 후에도 잠시의 휴식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 댔으며 그때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어머니를 타박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줄곧 나를 업고 생활하셨다. 지금 어머니의 굽은 허리와 나의 O자형 다리는 그 결과이리라. 어머니는 종종 그녀의 지난 날들을 무심한듯 얘기하신다. 너무 덤덤해서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더욱 가슴이 저민다. 그리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것은 ‘내 존재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내가 남자였다면’ 이라는 죄책감은 결국 ‘엄마는 왜 아빠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모두를 힘들게 할까’라는 비난과 질책의 감정으로 바뀐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감정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장녀는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나는 지금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또한 ‘장녀 콤플렉스’라는 말처럼 나는 내가 하고싶었던 일들을 입 밖으로 내뱉어보지 못했다. 참고서가 필요하다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품삯을 받는 밭일을 하셔야 했다. 일을 다녀온 어머니는 밤새 끙끙 앓으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가 감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라디오가 있었고, 어느 날은 침대가 있었다. 가난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던 나는 ‘침대’를 가져볼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와 동생 방에 침대가 놓여 있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새것이 생겼다는 기쁨이 컸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는 어떤 댓가를 치렀을까’ 라고 생각하면 철없던 내가 용서가 안된다. 지금은 낡고 동작도 하지 않는 라디오를 어머니는 버리지 못하신다. 힘들게 번 돈으로 산 것이라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셨다.
내가 3살 되던 해 어머니는 드디어 가족들이 원하던 아들을 출산했고 나의 소외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다행인 것은 나는 그때의 기억이 없다. 어렴풋이 할머니가 동생을 바라보는 아련한 눈빛이 기억날 뿐이다. 그때 당시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몸의 절반은 움직이지 못하셨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동생을 마음껏 사랑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을까? 아니면 맘껏 뛰어노는 동생의 자유로운 몸짓이 부러웠던 것일까? 할머니는 종종 아련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몇 년 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떠난 후 나는 한동안 할머니가 사용했던 방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할머니의 혼령이 나타나서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 같았다. 한번이라도 나를 품에 안아보지 않았던 것, 한번이라도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 할머니는 지금 하늘 나라에서 후회하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여전히 오매불망 아들과 손자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나중에 할머니를 만나거든 묻고 싶다. 아들, 손자를 신과 같이 떠받들고 살았던 결과, 행복하였었냐고, 그래서 무엇을 얻었냐고 꼭 물어볼 것이다.
그렇다,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할머니의 가르침데로 아버지는 본인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오셨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늘 본인이 옳았고 가족들의 안위보다 본인의 안위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나에게 또다른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또 한 사람,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현재 70을 넘기셨지만 여전히 세상의 중심은 본인이다. 본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지만 가족들이 바라보는 아버지는 분명 본인이 세상의 중심이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생의 절반 즈음을 살아온 현재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단지 할머니의 가르침데로 살아왔던것 뿐이었다. 나의 어머니와 고모들의 희생으로 아버지는 본인이 하고 싶은 데로 살아왔다. 쉬고 싶으면 그냥 쉬면 되고, 놀고 싶다면 그 역시 그냥 놀면 되었던 것이다. 참고서가 필요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수십번을 고민하던 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상처만 아픈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그것이 상처라는 것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고 치료가 가능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는 치유할 방법이 없다. 단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살거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갈 뿐이다.
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던 아버지에게도 아들은 늘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나이 7살로 기억한다. 어린이 날이었지만 여느 날과 같은 보통의 날이었고, 동생과 나는 별다른 기대 없이 뛰어놀기 바빴다. 어린이 날이라 같이 뛰어 놀 친구들 없이 동생과 나 둘 뿐이었다. 한창 즐겁게 뛰어노는데 아버지가 동생을 불렀다. 자전거에서 로봇 장난감을 꺼내더니 동생에게 내미셨다. 그것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나는 화가 났고 억울한 마음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은 그칠 줄 모르더니 급기야 동네가 떠나갈 듯한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나의 울음 소리에 어머니는 놀래서 뛰쳐나오셨다. 그날 왜 부모님이 집에 계셨는지는 모르겠다. 작은 트럭에 가득 실은 야채를 팔기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니셨다. 과일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 쉼 없이 일하셨던 두 분은 하필 그날 집에 계셨던 것이다. 나의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고, 동생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쨌든 그날 아버지는 동생에게만 선물을 주셨다. 계속 얘기하지만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그것은 나의 생존 본능일 것이다. 가슴 아팠던 기억들을 모두 끌어안고 살아가기에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버거웠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과거의 사건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분 좋은 일이건 가슴 아픈 일이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한 나 자신에 대한 배려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기억이 마치 어제일과 같이 생생한 것을 보면 상처가 꽤 크고 깊게 남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평소 나의 울음 소리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으셨다. 어려서부터 울보였던 나였기에 왠만한울음 소리는 개의치 않으시는 어머니였지만 그날은 놀라서 버선발로 나오셨다. 내가 얼마나 울보였는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태어나자 마자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린 아이가 자신의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향한 미소였을까? 울음뿐이었을 것이다.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아프다는 의사표현의 수단은 울음뿐이었을 것인데 왜 나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이것마저 외면했을까? 병원을 전전했지만 모두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인을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마지막 희망으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한의원에 가셨다고 했다. 제발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나는 결국 한의사가 지어준 한약을 먹고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후로도 쭉 잔병치레를 해왔고 아플 때마다 어머니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말고는 나의 울부짖음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울보 얘기가 있다. 이 역시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어머니를 통해 수십번은 더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큰 고모 댁을 방문하기위해 버스를 탔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얼마나 울어 대던지 이러다 내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넌 그런 애였어, 독해..’ 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사실 나는 지금도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한다. 서울 촌놈도 아니고, 버스를 10분 이상만 타도 멀미로 고생하는데,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했을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당당히 어머니에게 말했다. 지금도 멀미로 고생하는데 어린 나이에 말도 못하고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해보았냐고. 어머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어쨌든 나는 심각한 울보였다. 그리고 어린이날의 서러움은 내가 어떻게 손써볼 겨를도 없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하나의 발화점으로 '팡'하고 폭발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대화가 없었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대화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와의 교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구지 힘들게 그 방법을 찾고 싶지도 않다. 어느날 친구와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문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그 얘기를 듣던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자신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막상 돌아가시니 많이 후회가 남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는 맞았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의식없이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셨다.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아버지를 데려갈 때에도 나는 어머니만 함께 보냈다. 나중에 가겠다는 말만 남기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별일 없이 곧 집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상 병원에 도착해서 상황을 지켜보니 심각했다. 잠시였지만 어머니 혼자 모든 상황을 감당하게 했던 것이 미안했고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는 의사와의 면담을 나에게 맡기셨다. 의사가 하는 말들을 내가 더 잘 이해하지 않겠느냐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미안해했다. 의사와 면담을 하는 동안에도 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혼수상태인 동안 나는 음식물 섭취를 거의 하지 못했다. 죄책감이었다. 이런 감정이 생길 줄이야.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나는 죄책감으로 내내 울면서 지냈다. 분명 상처를 받은 이는 나였는데, 내가 피해자였는데 왜 죄책감은 내 몫이어야 할까? 병원에서 퇴원한 아버지는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건강한 편이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하지 않지만 최소한 미워하지는 않는다(정확히는 여전히 미워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었던 동안 느낀 죄책감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감정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아마 죽어서도 용서가 안될 것 같다.
동생에게만 어린이날 선물을 주셨던 아버지는 나의 울음에 적잖이 당황하셨던 듯하다. 또 어머니의 잔소리도 한몫 했는지 아버지는 바로 자전거를 타고 인형을 사 오셨다. 인형을 받고 내가 기뻐했는지, 슬퍼했는지에 대한 기억 역시 없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살게 되었고 소심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사랑받지 못했지만 나는 제법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렸었고 그들의 리더가 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이날 사건 이후로 나는 더이상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소심하고 사람에게 관심 없던 내 성격은 학창시절에도 계속되었다. 나는 학창시절 내내 친한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왕따는 아니었지만 친구들의 곁을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친구들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고 누구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상처와 분노만 남은 나 같은 사람과 친구가 되어줄 이가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가끔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고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이용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덕분에 마음의 문을 더 꽁꽁 잠궈두게 되지만.. 속 깊은 말을 나눌 정도는 아니지만 중학교때 제법 가까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정말이지 나로서는 오랜만에 마음의 문을 열었던 친구였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고(지금이야 혼자 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나의 학창시절에는 혼자 밥 먹는 상황은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잘생긴 선배에 대해 얘기했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였던 탔에 주로 남자 연예인이나 멋있는 선배에 대해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친구가 어느 날부터 거절하기 힘든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로 계속 지내고 싶다면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 시험 문제의 답을 공유해달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 자신이 사람에 대해 특히 그 친구에 대해 진심을 다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서툴렀을지 모르지만 나는 분명 마음의 문을 열었었다. 나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앞뒤로 앉았던 그 친구는 시험 때마다 쪽지로 자신이 풀지 못한 문제의 번호를 적어 보냈다. 여러 번 오고 가는 쪽지였음에도 선생님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중간고사를 마쳤다. 그리고 기말고사가 치러지는 어느날 나는 더이상 친구에게 답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에게 전달받은 쪽지에 ‘싫어’라는 글자를 써서 전달했다. 쪽지를 받은 친구는 그 즉시 선생님을 불렀다. 내가 문제의 답을 알려 달라며 자신을 협박하는 통에 시험에 집중할 수 없다며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 쪽지를 선생님에게 전달했다. 순간 나의 머리는 하얘지면서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시험이 끝난 그날 나는 선생님에게 불려갔다. 오직. 나만. 홀로. 나는 왜 그때 현명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일까. 필체만 확인했어도 누가 답을 요청했고, 누가 제공했는지 바로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 기막힌 상황에서는 화도 나지 않는다는 말은 옳다. 암묵적으로 나는 그 친구에게 지속적으로 답을 요구했던 가해자였던 것이다. ‘답정너’인 상황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갖게 된 나는 이제 더이상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소심한 내 성격상 그 친구를 용서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 친구가 어디서든 불안하고 불평 가득한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추후 대학생활에서도 있었다. 공부에만 매진해야 할 중고등교때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수능 점수는 낮았고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전문대에 진학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할 당시에 닷컴 버블로 IT업계의 취업률이 높다는 뉴스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전산학과에 진학했다. 일반적으로 전산학과는 여성의 비율이 낮은 편이지만 전문대는 그렇지 않다. 상업고등학교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커리어 변경이나 학위를 위해 늦은 나이에 학교에 진학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특히 여성들이 많았으며, 내가 다녔던 학교의 학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녀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학업에 몰두했으며, 때로는 연애에 몰두했다. 나와 무관한 그녀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뜻하지 않게 내가 그녀들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진학한 이상 나의 최대 관심사는 취업이었다. 졸업 전에 혹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조언을 구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환경에 적응하고,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1년이 지나갔다.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 군대를 다녀온 남자 선배들이 복학하였다. 그 중 한 선배와 나는 과제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특히 선배는 취업을 위해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모든 과정들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선배에게도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두렵고 버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선배와 나의 대화 장면이 자주 목격되면서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한 그녀들의 질투가 시작되었다. 선배는 귀공자 타입의 잘생긴 외모였다. 아마도 그녀들 중 누군가가 선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질투의 표적이 된 나는 온갖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졸업과 함께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녀들 중 누가 선배를 좋아했던 것일까? 그녀와 선배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까? 같은 업종에서 일한다면 지인의 지인을 통해서라도 한번쯤은 이름을 듣게 되는데, 나는 그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솔직히 이제 그들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다(이름조차 기억에 없는 것은 그들에 대한 완벽한 복수가 아닐까?) 이것이 왜 별일이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이미 20년을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불편한 대상이었고, 그래서 그들에게서 멀어짐으로써 나 자신을 방어하면서 살아왔다. 다시 용기 내어 사람에게 다가가갔지만 배신감으로 사람을 더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사람들로 인하여 나는 1년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졌다. 개개인은 힘이 없지만 그들이 그룹으로 묶여지면 권력으로 둔갑한다. 누가 그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을 권한을 부여했던 것일까? 그들의 눈과 귀를 피해 살아야 했던 나는 그들에게 어떤 권한도 허락하지 않았다. 현재의 집단 따돌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무리를 지어 희생자를 찾는 한 무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양인 단 한 명의 사람이 있고, 그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는 방관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방관자도 가해자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행동임을 알고도 묵인한 그들 역시 가해자이다. 희생자를 향한 그들의 차가운 눈빛을 한번이라도 보았다면 나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방관자나 가해자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이 별일 아니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누구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는 감히 ‘이해해’라는 말을 함부로해서는 안된다.
‘위대한 생각의 힘’과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사람들은 상황을 개선하는게 급급해 자기 자신을 개선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발이 묶여 있다.
우리가 중대한 순간에 무엇을 하는지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달려 있고, 우리가 누구인지는 지난 세월 자기 수양의 결과다.
상황을 방치하고 회피했던 탔일까? 자기 수양의 부족함 때문일까? 결국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생채기로 남아있다. 삶에 지치고 불행이 끊이지 않을때 봤던 사주에서, 나는 초년운이 없는 반면 노년운이 좋다고 했다. 내 인생에 꾸준히 생채기를 남긴 가슴 아픈 상황들은 단순히 그렇게 타고난 운명 때문이었던 것일까? 사주를 봐주시는 분에게 ‘그래서 몇 살부터 좋아지는데요?’라고 물었더니, 60을 넘겨야 한단다. 60넘은 나이에 운이 좋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타고난 운영 자체도 참.. 나 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