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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영 Sep 14. 2022

용서의 손을 내밀지만 어색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한동안 누워만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걱정되는지 종종 아픈데 없는지 물었지만 그때마다 아빠는 괜찮다고만 했다. 다행히 아빠의 폭력성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몇일이 지나서 아빠는 조금씩 걷는 연습도 하셨다. 하지만 부쩍 늙어버린 아빠의 모습은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다. 

가족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아빠는 빠르게 회복했다. 음식도 예전처럼 먹고 걷는 것이 자연스러워 지면서 아빠는 다시 밭일을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삼촌댁의 밭에서 가족들이 먹을 채소들을 키웠고 또다시 내 출근을 책임지셨다. 한동안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졌던 집안의 작고 사소한 결함들도 하나씩 해결하셨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듯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가 또다시 자살을 시도할 것이 걱정되어 모든 농약과 제초제를 삼촌댁에 옮겨 두었고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은 눈에 띄지 않도록 치워 두었다. 나와 동생은 아빠의 신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다시 아빠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걱정도 되었지만 무엇보다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달에 한번은 외식을 하려했고 그럴 상황이 못되면 고기를 사서 가족들끼리 구워 먹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왜 쓸데없는데 돈을 쓰냐며 귀찮다는 듯이 말씀하셨지만 분명 속으로는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신경 써야하는 것은 아빠의 재판이었다. 아빠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재판들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에서 항소를 하고, 또 다시 다른 쪽에서 이기면 그 반대편에서 항소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은 아빠가 회복되고 1년이 지나서야 종료되었다. (사실 지금도 양쪽에서는 소송이 진행중이다. 단지, 더 이상 아빠를 그 소송에 참여시키지 않을 뿐이다) 아빠가 회복은 되었지만 가족들은 계속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잠시라도 아빠가 자리를 비우면 가족 누군가는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아빠를 찾으러 다녔고, 그래도 아빠를 찾지 못하면 안절부절이었다. 

예전 같으면 아빠가 늦은 시간에 귀가를 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빠가 만취해서 귀가하거나 혼자 밭에 다녀와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빠의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가족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아픈 것은 아닌지, 혹시라도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늘 신경을 썼다. 

아빠가 안정기에 접어들 즈음에는 건강 검진도 계획했고 난생 처음으로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엄마와 아빠는 왜 쓸데없는데 돈을 쓰냐며 모두 싫다고 거절하셨다. 나는 더욱더 엄마와 아빠가 걱정되었지만 그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내가 엄마,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건강 검진, 함께 식사하기와 같은 간단하면서도 소소한 것들이 전부였다. 

평소 아빠가 고모댁을 방문하나 주위 드라이브를 할 때마다 ‘같이 가자’라는 말을 건네곤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늘 거절했다. 주말에도 일이 많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주중에는 사람과 일에 치이고 주말에는 밀린 업무를 하거나 집필을 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잠깐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이기적인 나였지만 아빠가 회복된 이후부터는 조금씩 바뀌려고 노력했다. 집필은 우선순위의 가장 마지막에 제쳐 두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1순위로 올려 두었다. 가족들과 식사하기, 웃고 떠들기, 건강 검진 설득하기, 여행 계획하기 등등 모두 하고 싶었던 일들이었다. 3개월 설득 끝에 엄마와 아빠의 건강검진을 예약했고, 이런 저런 맛집 투어도 자주 했다. 또한 가을이 오면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기로 계획했다.  

아빠 역시 가족에게 한발 더 다가왔다. 그동안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면(사실 아빠는 재판이 진행되는 3년동안 가족들의 외면으로 꽤 외로웠을 것이다) 회복된 이후부터는 가족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셨다.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동생과 나에게 물으셨고, 우리의 의견에 대해서도 비판없이 들어주려고 노력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마음과는 달리 입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아빠와의 대화가 어색했고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빠는 평소 일이 없는 날이면 나의 출근시간을 책임져 주셨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버스로 20분 정도가 소요되지만, 아빠가 데려다주면 5분 정도가 걸린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10년 넘는 시간동안 나를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럴때마다 차안에는 늘 고요한 정적이 가득했다.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나와 아빠는 대화 없이 지내왔다) 아빠가 회복되고 나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던 어느날 아빠가 갑자기 물었다. 자동차 번호판의 파란색은 무슨 의미냐고. 나는 퉁명스럽게 ‘나도 몰라’라고 대답했다. 내 기억으로 그때 아빠가 시도했던 대화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크게는 아니지만 분명 가족의 관계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변해갔기 때문에 나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변화가 너무 미약해서 예전의 습관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여전히 ‘아빠 사랑해’라는 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내가 부르는 아빠의 호칭은 ‘아베’ 그대로였다.(나는 아빠한테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분명 어렸을 때에는 사용했겠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빠’라는 호칭이 왠지 더 친근감이 느껴져서 덜 친근감이 가는 ‘아베’라는 호칭을 사용했었다) 

어떻게 사람이 갑자기 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느렸던 것 같다. 또다시 내 못된 습관들이 고개를 내밀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왜 사람은 늘 후회할 행동을 하는 것일까? 분명 나는 아빠의 외로움을 이해했고 아빠가 가엽다는 생각도 했다. 이쯤되면 아빠가 나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끼쳤더라도 용서하고 화해를 했어야 했지만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아빠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아빠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아빠에게 조금의 마음을 열었을 뿐이었다. 이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진전이었다. 그동안 아빠와 대화하는 것조차 꺼려했던 나에게 아빠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은 확실히 큰 변화였다. 

그동안 아빠를 위해 하지 않았던 많은 행동들이 후회되었고 죄책감이 가슴 한 켠에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마음과 다르게 말과 행동은 여전히 퉁명스럽고 반항적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예전의 모습들이 더 자주 나타났다. 아빠가 엄마에게 짜증을 낼 때마다 나는 또 속으로 생각했다. ‘또 시작이다.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많은 사람들을 지치고 피곤하게 한다면 그 삶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운동삼아 엄마와 종종 걷곤 한다. 나 역시 걷는 행위로 스트레스를 풀기 때문에 이른 아침 2시간의 트래킹은 엄마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했다. 집에서 40분 정도 걸으면 스타벅스가 있는데, 거기서 아침에 커피 한잔을 마시고 돌아오는 2시간 동안 엄마와 나는 아빠의 흉을 보았다. 아빠는 도대체 왜 그러냐..라고 내가 먼저 시작하면 엄마는 늘 맞장구를 치셨다. 중간중간 아빠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엄마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짜증을 내는 아빠를 대하는 것이 엄마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 시간만이라도 엄마가 스트레스를 풀기를 바랬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빠의 흉을 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에게만은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나의 못된 생각과 행동들이 절대 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아빠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나만의 확신 때문이었을까? 아빠가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 것만 같았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분명 나는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에도 늘 당하고 사는 엄마가 더 가슴이 아프니 말이다. 40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내 삶이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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