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퇴원한 아빠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증상은 기침과 가래였다. 기침과 가래가 끊임없이 나와서 아빠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어느 날은 잠들기 전부터 아침까지 기침과 가래가 계속되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것으로 아빠 뿐만 아니라 남은 가족들도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도 기침은 낳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빠는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주기적으로 폐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제초제가 온 장기에 퍼진 상태였고, 특히 폐와 신장의 손상이 심했다)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아빠 본인도 괴로우셨는지 폐 검사를 받으셨다.
검사를 받고 결과를 들으러 병원을 방문한 것은 엄마와 아빠 둘 뿐이었다. 동생과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하지 않았다. 결과를 듣고 온 그날 엄마는 걱정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어렵게 입을 뗐다. ‘어떻게 하니, 폐에 혹이 보인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라.’ 이 말을 듣는 나의 반응이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다. 나는 분명 아빠가 자살을 시도했던 그 사건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염증일 것이고 아빠에게는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내 확신은 엄마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았는지 여전히 고민이 많으셨다. 결국 폐 검사를 받았던 병원에서 써준 소견서를 들고 엄마와 아빠는 대학병원에 다녀오셨다.
아빠는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왜 단 한순간도 아빠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빠는 혹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와 같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제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을까? 아빠를 이해하기 위해 그 상황을 상상해본다. 별일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학병원을 가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길을 걷다 돌뿌리에 걸려서 넘어지는 그런 사소한 일은 아니다.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 역시도 두려운 감정이 앞선다. 늘 살만큼 살았다고 얘기하는 아빠였지만 분명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빠는 집에 돌아와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아빠는 늘 그랬다. 사소한 일에는 걱정이 앞섰지만 큰 일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대학병원에 방문한 첫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CT사진과 소견서를 전달하고 담당 의사가 배정되는 정도의 진전이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 발견된 혹이 2cm로 의사들은 크게 염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암은 나이먹은 사람일수록 자라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아빠는 매주 병원을 갔지만 최종 진단명은 듣지 못했다. 왜 의사들은 조직검사를 해볼 시도도차 하지 않았을까? 아빠의 암 덩어리가 2cm에서 9cm로 커질 때까지 왜 방관만 했을까? 검사가 늦어진다면 아빠는 왜 병원을 바꿔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매주 병원에 가는 것을 6개월을 하고도 정확한 병명을 전해 듣지 못한 엄마는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다른 병원으로 옮길 테니 소견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아빠는 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한 병원에서 계속 진료를 받아야지 왜 쓸데없이 병원을 옮기냐고. 그런데 나는 엄마의 요구가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빠는 단순한 감기 때문에 6개월간 병원을 갔던 것이 아니다. 폐에 혹이 있다며 빨리 대학병원에 가보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들고 병원을 갔었던 것이다. 하지만 6개월의 기간동안 병원에서 병명을 밝히지 못한다면 더 이상 그 의사들을 신뢰할 필요가 있었을까? 왜 아빠는 그 병원에 집착했던 것일까? 아빠는 본인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폐에 있는 혹으로 갔던 대학병원은 아빠가 자살을 시도하고 실려갔던 병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빠를 잘 치료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아빠의 판단은 틀렸었다. 그 병원의 태도는 비겁했다. 병원에 방문한 첫날 의사의 첫마디는 ‘약을 먹었을때의 치료에는 문제가 없었다.’라는 것이었다. 의사는 아빠의 현재의 병보다 그 자신의 책임 회피가 먼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빠는 의사와 병원을 믿었던 것이다.
6개월 후 엄마는 아빠를 끌고 인근 다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첫날은 나도 동행했다. 이전 대학병원에서 찍었던 여러 사진들과 치료 과정들을 새로운 의사 선생님께 전달했다. 그리고는 바로 또다시 CT사진을 찍자고 했다. 아빠는 왜 또 사진을 찍어야 하냐며 짜증냈다. 여전히 강제로 병원을 옮긴 엄마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주 의사는 바로 조직검사를 제안했다. 처음 찍었던 사진의 혹이 이미 너무 많이 자란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는 왜 이제야 왔냐며 가족들을 나무라듯이 바라보았다. 결국 2주후 아빠는 조직검사를 위해 입원을 하셨고, 이틀 뒤 퇴원하셨다. 아빠가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입원한 이유는 지병 때문이었다. 피가 나면 잘 멈추지 않기 때문에 조직 검사로 인해 피가 멈추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에게 연락이 왔다. 첫날부터 함께 동행했던 내가 아빠의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빠의 다음 방문일자와 관련하여 모두 내가 문자로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번에 의사를 만나는 장소는 평소와 다르게 암병동이었다. 그 순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암이구나..
하지만 이 사실을 엄마와 아빠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분명 걱정부터 할 것이 뻔했다. 하루라도 두 분이 편했으면 싶어서 구지 알리지 않았다. 조직검사 결과를 듣기위해 병원에 방문한 당일, 아빠의 발걸음은 평소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려 했다. 나는 재빨리 이번에는 암 병동으로 가야 한다며 방향을 바꿨다. 왜 미리 말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사를 만났을 때, 방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내 직감이 맞았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예상하셨듯이 암입니다’ 라는 의사의 말 이후로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상황이 어떤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물었어야 했지만 머리가 하얘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이후 의사는 또다시 말했다.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되어서 암 3기입니다. 좀 더 빨리 오시지 그랬어요’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빠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암 덩어리를 제거하면 가장 좋지만 다른 쪽 폐 역시 기관지 확장증이 있기 때문에 커져버린 암덩어리를 제거하면 기관지 확장증을 앓고 있는 다른 폐가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물어봐야 할 것 같았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진찰실을 나오려는데 간호사 분이 나를 붙들었다. 아빠를 암환자로 등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병원비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까짓 혜택은 받지 않아도 좋으니 아빠의 병이 암이 아니라 단순히 염증이면 좋겠다고..
아빠가 자살을 시도하고 1년 6개월을 정상적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듯이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간절히 바랬다. 내 남은 생명의 반을 아빠에게 떼어줄 테니 아빠가 더 오래 살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