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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영 Sep 14. 2022

살고자 하는 의지와 쇠약해지는 체력

아빠는 늘 다음을 기약했다. 다 낳으면..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다 낳으면 여기 저기 다녀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겠다고 말하곤 했다. 폐와 신장에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다는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에도 아빠는 희망을 놓지 않았었다.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로 예전처럼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의사들의 말을 굳게 믿고 항암 치료를 시작했었다. 항암치료가 독하다는 것은 TV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고 있었다. 머리가 빠지는 것은 물론 구토 증세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내용들을 확인했다. 기대반, 우려반으로 아빠의 항암 치료가 시작되다.

처음 1~2번의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는 괜찮았다. 힘들어하긴 했지만 구토 증세도 없었고 아직 머리가 빠지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까지만 해도 가족이 모두 외식하는 것이 가능했다. 가까운 바닷가에 가서 거리를 거닐고 회를 먹고, 더부룩한 배속에 음료까지 밀어 넣으며 조금은 특별한 하루를 보냈었다. 이것이 아빠와 하게되는 마지막 여행인줄 알았다면 더 좋은 곳을 가고 더 좋은 음식을 먹었을텐데.. 그런데 3번째 항암 치료부터 아빠는 누워만 있었다. 구토 증세는 없었지만 음식 섭취를 어려워했고 몸무게는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10번째 항암치료에서 아빠의 몸무게는 10kg이상 줄어든 상태였고 이제 누워서 잠만 자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빨리 입맛이 돌아와야 한다며 이것 저것 사다달라고 했지만 사다주면 한 젓가락을 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당시에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빨리 낳고 싶다면 억지로라도 음식물을 섭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계속 잔소리를 했다. 제발 좀 먹고 걸어보려는 노력을 하라고. 그때마다 아빠는 숨이 차서 할 수 없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갔던 어느날 아빠는 항암치료 전에 또 한번의 폐 CT 사진을 찍어야 했다. (신장도 암 진단을 받았지만, 신장에 자리잡은 암은 폐암과 같이 급하지는 않다며 치료를 늦춘 상태였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분 중 한 명이 간호사와 얘기하는데 마치 100m 달리기를 막 마친 사람처럼 한마디 말을 할 때마다 힘들어했었다. 그때 당시 ‘아빠도 곧 저러실까?’라고 걱정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분 만큼은 아니지만 아빠는 말을 할 때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숨이 차다고 했다. 그리고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었던 것은 항암치료의 부작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독한 약물이 허약한 아빠의 몸에 퍼지면서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살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한 아빠를 탓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빠는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죽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단 한번도 막연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아빠도 사람이다. 분명 두렵고 무서웠을 것이다. 

몸은 쇠약할 데로 쇠약 해졌지만 여전히 아빠는 ‘다 낳으면’이라는 가정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셨다. 그렇게 3개월이 흐르면서 아빠는 더 이상 걷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때 당시 코로나 때문에 회사는 재택근무를 권고했었다. 그래서 때로는 업무시간에 잠시, 때로는 휴가를 내서 부모님과 병원을 다녀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걷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내가 동행하는 것은 의미 없었다. 운전을 할 수 없었던 나는 (15년차 장롱면허이다) 아빠의 병원 방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족들과 상의 끝에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때 당시 동생은 새로운 회사로 출근한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휴직을 얘기할 처지가 못 되었다. 휴직을 얘기해보고 안되면 그만두는 것을 고민하라고 했지만, 동생은 휴직 얘기는 못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동생의 사정을 들은 회사는 휴직으로 처리해주었다. 처음에는 3개월의 휴직을 생각했지만 2개월 이상은 힘들다는 회사의 의견에 따라 2개월 휴가를 얻었다. 2개월 동안 동생은 아빠를 위한 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아빠를 부축하여 화장실을 데려다 주거나, 아빠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사다 날랐다. 

가끔은 걱정이 되었다. 동생이 복직한 이후에는 어떻게 상황을 헤쳐나가야할까? 아빠를 요양원에 모셔야 할까? 엄마 혼자 간병이 가능할까? 몇시간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간병인을 알아봐야할까? 이런 저런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었다. 더 좋아지지도 않고 더 나빠지지도 않는 최악의 상황이 지속되었고 그렇게 또다시 2개월이 흘렀다. 엄마는 동생이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동생이 없는 상황들에 대해 걱정이 많았지만, 나는 동생이 복직해야 한다고 했다. 요즈음 같은 시기에 장기간의 경력 단절은 재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내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빠른 시간 내에 운전 연수를 받는다면 아빠와의 병원 동행은 문제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동생이 복직할 즈음에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를 중단하겠다고 했다. 완치가 아니라 더 이상 아빠의 몸은 항암치료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생과 아빠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엄마가 의사와 상담할 때 의사는 보호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더 이상의 치료는 불가능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단다. 차마 환자 앞에서 얘기할 수 없었던 의사는 환자를 밖으로 내보내고 보호자만 남겨둔 상태에서 엄마에게 이런 말을 전했던 것이다. 엄마는 그날 병원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동생과 나에게 전했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이 얘기를 듣지 못했던 아빠는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화가 났다. 살고 싶으면 먹어야지 왜 안먹냐고.

거동이 불가능한 아빠를 위해 간이 욕조를 구매했다. 동생과 엄마가 아빠를 욕조로 옮기고 씼겨주었고 이 과정이 끝나면 엄마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아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조금의 움직임에도 숨차 했기 때문에 씼는 것조차 아빠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살고 싶어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에 엄마는 걱정이 앞섰다. 목사님을 모셔서 기도를 받자고 아빠에게 말했더니 아빠는 매일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엄마 역시 매일 새벽 기도를 다시시면서 눈물로 기도를 했다고 했다.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기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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