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니 녹음실에서 책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린아이들 책 읽는 소리보다 듣기 좋은 소리는 없다는 어른들의 말이 실감 났다. 초등학교 시절 소리 내어 책을 읽어 본 후론 책을 소리 내어 읽을 기회가 많지도 않고 읽어 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국어 과목에 읽기가 있어서 학교에서 자주 읽기도 하고 집에서 몇 번 읽어 오라는 숙제도 있어 많이 읽곤 했다. 우리들의 책 읽는 소리를 곁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는 표정이었다. 지치고 힘든 일상의 피로를 잠시나마 잊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에 위안을 받고 있는 듯했다. 한동안 숨을 죽이고 책 읽는 소리를 듣는데 집중해 본다.
몇 해 전 블로그를 보다가 우연히 점자도서관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글을 쓴 사람이 점자도서관에서 낭독 봉사를 하고 나오면서 느꼈던 감정을 글로 남긴 수기였다. 봉사를 통해 글쓴이가 느꼈던 행복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니 ‘빛들’이라는 애칭이 눈에 띄었다. 시각장애인을 상징할 수 있는 ‘빛’과 시각을 대신한 감각을 통해 독서활동을 즐기고 있는 시각장애인의 대표적인 독서방법 중 하나인 ‘듣기’의 의미를 내포한다며, 시각장애인에게 ‘빛’이 될 수 있도록, 정보의 황금‘들’판이되겠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가슴이 설레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낭독봉사에 대한 공지를 확인해보니 일주일에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를 확인해서 봉사자가 없으면 신청을 하여 참여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점자도서관으로 낭독 봉사를 다녔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낭독을 위한 기본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한다. 봄과 가을에 두 번에 걸쳐 전직 아나운서가 와서 발성과 호흡에 대한 기본적인 방법을 가르쳐 준다. 교육을 이수하고 나면 봉사자가 낭독을 하고 싶은 책을 선정하게 된다. 이미 읽은 책 중에 함께 하면 좋을 책을 골라서 다시 한번 그 책을 읽어보며 낭독을 어떻게 할 것 인지 구상한다. 낭독을 하는 요일이 되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여 도서관에 가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녹음실에서 두 시간 정도 녹음을 하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녹음을 하는지 몰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곳에 근무하는 분들이 친절하게 잘 가르쳐줘서 별 어려움이 없이 녹음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낭독 과정이다. 나이 탓에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준비하여 간 독서용 안경으로 바꿔 끼고, 책과의 거리도 체크하여 독서대의 경사를 맞추고 나면 드디어 책 읽을 준비가 끝나게 된다. 다음은 낭독을 하면서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띄어 읽기와 숨 쉬는 타이밍, 정확한 발음을 하여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잘 읽다 가도 혀가 꼬이거나 호흡을 놓치거나 글자를 틀리게 읽으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낭독을 해야 하니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수정에 수정을 더해 간신히 낭독을 마쳤어도 녹음 기능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해 전체가 날아가서 새로 녹음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간당 낭독 분량도 늘어가고 많이 수정하지 않아도 녹음을 마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재미가 붙어가기 시작했다.
낭독을 하다 힘이 들거나 시간에 쫓기게 되면 자칫 소홀히 할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내가 읽는 책을 듣게 될 분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낭독 소리를 통해 나의 마음가짐이 오롯이 전달될 거란 생각에 다시금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일 년 정도 참여를 하며 두 권의 책을 낭독하여 녹음하고 세 권 째 낭독하다가 사정이 생겨 중단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봉사를 그만두면서 녹음을 끝내지 못한 책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았다. 언젠가 다시 시작하면 꼭 마무리를 하리라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
학창 시절에 책을 읽고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핑계로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겨 그간 소홀히 하였던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 직접 해보지 않은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생각과 지식을 공유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책을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눈으로 읽는 것보다 단어나 어휘 하나하나가 또렷이 다가와 글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고, 어순이나 문장의 내용도 더 정확하게 파악이 되어 어색한 부분이나 잘못된 표현을 금방 알게 되는 좋은 점이 있다. 낭독 봉사를 한 후로는 글을 쓰고 나서 소리 내어 읽어 보는 습관이 생겼다.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것이 퇴고에 무척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누구를 위한다는 얕은 생각으로 시작한 낭독 봉사가 오히려 나를 책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고, 책 읽기의 중요함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책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가 책 읽기라고 하니 나의 작은 행동이 의미 있게 여겨지기도 했었다. 오직 소리만으로 낭독자와 청취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는 낭독 봉사에 참여할 수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또 다른 세상에 눈뜨게 해 준 낭독봉사를 조만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 이 글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점자도서관에 대해 홍보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봉사에 참여하고 싶은 분들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작성한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