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되면 아내가 바빠진다. 곧 다가올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농장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올해 심고 싶은 꽃들을 고르고 거기에 맞는 화분을 골라 주문을 한다. 아내가 진지한 모습으로 인터넷 서핑을 할 때는 가능한 말을 걸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게 제일 좋다. 아내는 뭐에 빠져 있으며 다른 것에는 잘 신경을 쓰지 못하는 성격이니 괜히 끼어들면 방해만 하게 된다. 일을 마치면 빨리 알려 주고 싶은 마음에 부랴부랴 나를 찾을 것이기 때문에 궁금해도 조금 참고 있어야 한다. 한참이 지나 나를 찾는 아내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못 들은 척 딴짓을 하고 있으면 급하다는 듯 손짓을 하며 부른다. 세상에 없는 것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인터넷에서 구입한 것들을 보여주며 자랑을 시작한다.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는 제라늄을 보며 꽃향기 그윽한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번 봄은 예년과 다른 점이 있다. 작년 초겨울에 충북에 있는 나무 농장에서 구근을 구해오면서 우리 집엔 봄이 일찍 시작되었다. 아내도 구근을 재배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내년에 필 꽃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구근에 대한 정보도 찾아보고 구근을 심을 화분과 토양도 구입했다. 먼저 구근을 종류 별로 화분에 나누어 심고 토양을 적당한 두께로 덮고 나서 꽃 이름표를 꽂아 놓는다. 심는 것으로 끝이 아니고 추운 날씨에 얼지 않도록 흙 위에 비닐로 덮어주었다가 낮에는 열어 햇볕도 쐬어주고 가끔 부족한 물도 주며 정성을 쏟는다. 구근은 겨우내 흙 속에서 눈비를 맞으면 봄을 기다린다.
구근을 만들기 위해서는 봄에 꽃이 피고 나면 꽃대를 잘라내어 구근 비대가 충분히 되도록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구근 비대가 되면 캐서 세척과 소독을 거쳐 일정기간 말린 후 잎과 줄기를 잘라내고 구근만 저장 보관하였다가 겨울이 시작되면 흙에 심어 겨울을 나게 한다. 일상에서 쉽게 보았던 꽃들이 이렇게 많은 과정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한 송이 한 송이 소중하고 대견했다.
주문한 꽃들이 배달되면 아내의 일상이 바뀐다. 아직 쌀쌀한 날씨지만 햇살을 받아야 잘 큰다며 아침이면 화분들을 밖으로 내놓고 밤이 되면 다시 거실로 자리를 옮겨 주기를 한 달 가까이 반복했다. 구입한 개수도 만만치 않거니와 저렴한 꽃을 구입하다 보니 키도 작고 꽃대도 여려 자칫 잘못 건드리면 꽃이나 새순이 날아갈 수 있다. 가끔 아내를 도와주고 싶다가도 애지중지해하는 어린 순이 다칠까 봐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구근도 겨울을 보내고 싹을 틔우기 위해 흙을 비집고 나오려 애쓰는 모습이 기특하다. 아내는 아직 꽃대도 보이지 않는 새순만 보고도 “수선화야, 애썼다.”, “튤립이 하나도 다치지 않고 잘 크고 있네.”, “히아신스는 어떨지 정말 기대된다.”며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질세라 제라늄들도 힘을 내며 열심히 자라고 있다. 탄성을 지르며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쫓아가 보면 새끼손가락만 한 줄기에 달린 티눈만 한 꽃망울을 보고는 무슨 보물이라도 찾은 듯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어린애 같다. 모든 꽃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내가 화초를 대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우리 애들을 임신했을 때가 떠올랐다. 결혼을 하고 출산 계획을 세우면서 아내는 가끔 같이 하던 술을 끊었다. 쉬는 날에도 고단함을 뒤로하고 운동을 하며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새 생명을 맞이하기 위해 심신을 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신을 하고 나서는 음식도 가려 먹고 소홀히 하던 책도 늘 곁에 두고 읽기 시작했다. 절약이 몸에 밴 아내가 임신을 하여서는 당시 3천 원이라는 큰돈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지불하고 가게에서 가장 크고 먹음직스러운 배를 사서 먹던 모습, 감기 몸살로 일주일이 넘게 아파 누워 있으면서도 약은 절대 먹을 수 없다며 킁킁대던 모습, 많이 누워있으면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고 책과 씨름하다 앉아서 졸던 모습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놀라울 뿐이었다. 아내는 이미 엄마가 되어 있었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익어간다고 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라는 것 같다. 태아 때부터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자양분으로 세상과 만날 준비를 한다. 아이는 태어나서 엄마의 무한한 칭찬과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걷게도 되고 말도 하게 된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을 할 때도, 결혼을 하여 엄마의 품을 떠날 때까지 아이들은 엄마의 한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성장한다. 대학에 다니는 큰애는 힘든 청소년기를 엄마의 따뜻한 응원을 받으며 잘 견디어내고 있고, 군 복무 중인 둘째도 매일 저녁 엄마와 통화를 하며 고단하고 지난한 군 생활의 긴 여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 이제 지칠 만도 한데 평생을 한결같이 나까지 챙기는 아내의 잔소리가 정겹고 고맙다. 남자 셋을 향한 그녀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수선화, 히아신스, 튤립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린 제라늄들도 줄기에 비해 크고 많이 달린 형형색색 꽃들을 힘겹게 받치고 있다. 멋진 꽃도 있고 조금 아쉬운 꽃도 있다. 제각기 환경은 다르지만 아내의 칭찬을 들으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자라고 있다. 모두 다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