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재영 Jul 19. 2021

자화상

이른 아침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빠와 아들은 둘 다 말이 없이 걷기만 했다. 시내버스가 정류장에 다가오자 “아빠,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여기 있는 동안 많이 생각하고 변화하고 성장했습니다.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을 잊지 못할 거예요.” 둘째가 나를 꼭 안아주고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둘째가 제주를 떠났다. 작년 12월에 들어왔으니 정확히 7개월 만에 출도 하였다. 


어느 날 커피숍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카드 잔액이 없었다고 한다. 급히 엄마에게 전화를 하여 송금이 될 때까지 가게에 잡혀 있으면서 정말 부끄러웠단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무계획하게 생활하며 부모에게 손이나 벌리는 자신이 한심했다고 한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무작정 제주로 왔다고 했다. 특별한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지도 않고 현실 도피의 심정으로 도망쳐 왔다고 했다. 


40년 전,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삶의 터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전을 들고 밥상을 메고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향했었다. 아버지가 공장 노동자인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심정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고시 낭인 생활 4년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미완의 도전으로 끝났다. 물론 그때의 노력이 지금 생활의 디딤돌이 되긴 하였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방 하나 덜렁 메고 제주에 있는 나를 찾아온 둘째를 보니 상황은 다르지만 그때 나의 심정이 아니었나 싶다. 


제주 생활의 가장 큰 매력은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지만 제주에 있는 것 만으로 지금까지의 삶과 조금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제주에 처음 왔을 때 나 홀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속박되지 않고 나만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둘째도 제주에 와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 거라 생각한다.


둘째는 다음 날부터 출근시간에 같이 집을 나섰다. 가방 하나 메고 탐라도서관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청년이 되어 있었다. 남자 둘이 생활하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고 서툴기만 했다. 혼자 살 때야 대충 끼니만 때우며 생활해도 되지만 아들이라는 상전을 모시고 있으니 매끼 반찬도 준비하고 식사도 대충이 아닌 제대로 해야만 했다. 자신을 찾기 위해 놀고먹는 대학생 포스를 포기하고 왔다는데 먹는 것이라도 신경을 써주고 싶었다. 심지어 퇴근하고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던 솔로의 낭만도 눈치가 보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끔 외식도 같이 하고 산책도 같이 하면서 조금씩 둘째를 알아 가기 시작했다. 큰 애에 치여 여행 한번 같이 못하고 변변히 차 한잔 같이 하지 못했던 둘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이 따뜻하고 사고가 깊고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이성적이고 추진력이 뛰어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그런 아이였다. 몰랐던 보석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책도 사고 인터넷 강좌도 신청하면서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여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곁에서 보지 못한 터라 내심 놀라웠다. 그러더니 취업 준비를 해 보겠다고 했다. 대체 과목인 영어와 한국사 시험에 응시했다. 영어는 떨어지고 한국사는 1급에 단번에 합격을 하였다. 요점 정리를 했다는 노트를 보니 합격은 너무 당연했다. 영어도 다시 응시하여 자격을 취득했다. 공부에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침 김에 본격적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며 도서관에서 독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눈만 뜨면 독서실로 달려갔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온전히 공부에 매달렸다. 어디서 그런 끈기가 나오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마지막 2주는 정말 힘들어 보였다. 힘듦을 쏟아낼 만도 한데 아무 말없이 묵묵히 견디어 냈다. 둘째를 보며 내가 합격을 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를 닮은 아들이 아닌 나를 뛰어넘는 청출어람의 모습을 본 것이다.


떠나기 전날 차 한잔 같이 했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행복했다고 했다. 인생 맥주집에 같이 갔을 때가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 자기가 헌혈해서 받은 상품권으로 햄버거를 나눠 먹은 이야기, 칼집 삼겹살이 가장 맛있었다는 이야기, 안주는 역시 곱창이 최고라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잠시 제주에서의 둘 만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제주에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있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제주에서의 시간들이 힘들 때 많은 힘이 될 것 같다고도 했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7개월의 여정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시험 당일 통화를 했다. 둘째가 꼭 합격을 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해 주었다. “너는 충분히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의미 있고 중요하다. 너는 과정에 충실했고,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했다. 아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일이 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